출처= 다음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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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만은 못하다고 해도 아키 카우리스마키 감독은 여전히 국내에서 지명도가 높다. 세계적인 감독이기도 하고 <레닌그라드 카우보이 미국에 가다>(1989, 사진)에 등장하는 ‘김무쓰’ 헤어스타일의 핀란드 록 밴드 멤버가 남긴 인상이 큰 까닭이다.

아키 카우리스마키는 <죄와 벌>(1983)로 감독 데뷔했는데 연출자 경력이 40년이 된 지금도 동년배 감독보다 비교적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그의 최신작은 <사랑은 낙엽을 타고>(2023)로 칸국제영화제 경쟁 부문에서 심사위원상을 받았다.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영화는 딱 한 장면 봐도 그의 작품임을 알아볼 정도로 개성이 강하다. 등장인물들은 모아이 석상처럼 웬만해선 감정을 드러내 보이는 경우가 없고, 누가 핀란드 출신 감독 아니랄까 봐 극 중 분위기가 겨울 날씨처럼 춥고 황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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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라운 건 그런데도 유머가 풍부하고 영화를 보고 나면 난로 앞에서 몸을 데운 것처럼 따뜻하게 기억된다는 사실이다. <사랑은 낙엽을 타고>의 원제는 ‘떨어진 낙엽 Fallen Leaves’인데 오히려 국내 제목이 더 나아 보이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제목에서처럼 러브 스토리를 다루는 이 영화의 주인공 커플은 안사(알마 포이스트)와 홀라파(바타넨)이다. 이들 삶은 나뭇가지에 걸린 마지막 잎새처럼 쓸쓸하고 아슬아슬하다. 비정규직으로 연명하는 안사는 유통기한이 지난 음식을 가져갔다는 이유로 슈퍼마켓에서 해고당했다.

홀라파는 술이 유일한 낙인데 공사장에서 일하다 숨겨놓은 술을 적발당하는 바람에 역시 잘렸다. 기분도 더러운데 술이나 마셔야지, 는 아니고 공사장 동료와 함께 술도 마시고,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출 수 있는 펍에 갔다가 안사와 합석한 후 그녀가 눈에 들어왔다.

그래서 안나와 홀라파는 연인이 되어 사랑을 나누느냐? 아키 카우리스마키는 마이구미처럼 달짝지근하고 말랑말랑한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 아니다. 첫 번째 데이트에서 영화를 보고 홀라파는 안나에게 연락처를 받았는데 그만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찾다가 쪽지를 흘려 더는 만남을 이어갈 수 없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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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도왔는지 두 번째 만남의 기회를 얻게 된 두 사람. 감정이라고 읽을 수 없는 무표정의 홀라파가 오랜만에 혹은 극적으로 만난 안나를 향해 보고 싶었다고, 내 신발 좀 보라고, 당신을 얼마나 찾아다녔는지 이렇게 닳았다고 말하는 걸 듣고 있으면 쪽지를 잃어버린 실수에도 미워할 수가 없다.

아키 카우리스마키 영화의 매력이 이런 거다. 뭘 해도 실수투성이인 주인공,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돌아오는 건 해고 통보뿐인 캐릭터라고 해도 아키 카우리스마키는 그들이 가진 매력을 어떻게든 세상에 꺼내보게 해 그들을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존재로 만들어버린다.

그와 관련해 <패터슨>(2017) <오직 사랑하는 이들만이 살아남는다>(2014)의 짐 자무시 감독은 “사회의 아웃사이더들에게 갖는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애정을 좋아한다.”고 하면서 그중에서도 “그의 영화가 주는 역설적인 상황, 즉 웃긴 장면은 슬프고, 슬픈 장면은 웃게 만드는 스타일이 좋다.”고 평가한다.

안 그래도 아키 카우리스마키가 <사랑은 낙엽을 타고>를 만들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관련이 있다. ”무의미하고 불필요한 전쟁에 시달리던 중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영화에 대해 준비하기 시작했다. 사랑에 대한 갈망과 연대, 희망, 타인에 대한 존중, 삶과 죽음이 바로 그것이다.”

실제로 극 중 안나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돌아온 집에서 라디오를 켠 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뉴스가 나오자 가차 없이 채널을 돌려 버린다. 그런 뉴스에 분노하는 대신 사랑과 연대 등과 같은 감정으로 이 세상이 좀 더 따뜻해지도록 하겠다는 의지가 읽힌다.

그 실천의 결과가 홀라파와의 사랑이다. 홀라파와의 관계는 그가 쪽지를 잃어버려서, 너무 술을 많이 마셔서, 그리고 사고로 병원에 입원해서 끊어질 뻔한 위기를 여러 차례 맞는다. 그렇게 세상은 홀라파와 안나와 같은 이들을 속이고 괴롭히지만, 그들의 삶은 계속되고 그 원동력은 포기하지 않는 사랑이다.
시궁창 같은 세상에서 술만 마시다 마침내 그녀를 만났다
그들이 첫 데이트에서 극장 관람하는 영화는 짐 자무시의 좀비물 <데드 돈 다이>(2019)다. 홀라파와 안나는 서로를 향한 사랑이 없었다면 좀비 같은 존재였을 테다. 홀라파는 매일 술로 허송세월했을 테고, 안나는 집과 아르바이트를 오가는 단순한 생활로 삶에 의미를 찾지 못했을 것이어서다.

사랑은 사랑하는 상대가 흠이 있어도 손을 내밀 수 있는 용기이자 희생이고, 결국 연대의 행위다. 그럼으로써 사랑이, 연대가 이끄는 건 시궁창 같은 현실의 개선이다. 술이 아니면 단 한 번의 실수에도 에누리 없는 현실을 견디기 힘들었던 홀라파는 안나를 만난 덕에 술이 없어도 아름다운 세상을 누릴 수 있게 됐다.

안나는 사측의 부당한 행위에 혼자 분한 마음을 삭여야 했지만, 홀라파를 만나면서 이제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불어도 쓰러지지 않게 손을 잡아줄 평생의 지원군이 생겼다. 안나와 홀라파는 서로를 만나기 전까지 그저 톱니바퀴처럼 굴러가는 세상이라는 시스템의 부속품 중 없어도 그만인 하나였다.

출처= 다음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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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소나기처럼 무수히 쏟아부은 고난과 난관을 극복한 이들에게 사랑은 개별의 정체성이다. 그래서 <사랑은 낙엽을 타고>는 시스템을 등지고 밝은 미래로 향하는 홀라파와 안나의 뒷모습으로 끝을 맺는다. 이 장면은 찰리 채플린의 유명한 영화를 떠올리게 한다. 바로 <모던 타임즈>(1936)다.

<모던 타임즈>는 영국 산업 혁명 당시를 배경으로 공장 업무에 시달리는 떠돌이(찰리 채플린)와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된 소녀가 <사랑은 낙엽을 타고>의 결말처럼 나아가는 작품이다. 다시 말해, 아키 카우리스마키는 자신만의 <모던 타임즈>를 만든 셈이다. 전쟁광이 날뛰고, 권력자가 민중을 억압하고, 갑이 을을 괴롭혀도 사랑으로, 연대로 지금보다 더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자고.

허남웅 (영화평론가)

▶이 글과 관련된 칼럼(사랑이 지리멸렬한 세상을 구할 수 있을까?) 영화평론가 이동윤의 '아트하우스 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