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사람 투자 손실, 내 계좌로 넘긴 증권사
증권사들이 채권형 랩 및 신탁 운용 과정에서 고객 계좌의 손실을 불법 자전거래를 통해 다른 고객의 계좌로 전가한 사실이 드러났다. 고객의 투자손실을 증권사 고유자산으로 메우는 불법 행위와 리스크 관리 및 이상가격 거래 등에 대한 내부통제 소홀도 확인됐다.

금융감독원은 채권형 랩·신탁 검사 결과 업무처리 관련 위법사항과 리스크 관리·내부통제상 다수의 문제점이 확인됐다고 17일 밝혔다. 지난 5월 이후 9개 증권사의 채권형 랩·신탁 업무실태에 대한 집중 점검을 통해서다.

채권형 랩어카운트(이하 '랩') 및 특정금전신탁(이하 '신탁')은 증권사가 고객과의 1:1계약을 통해 자산을 운용하는 대표적인 금융상품이다. 다수의 고객자산을 집합 운용하는 펀드와 달리, 개별 고객의 투자목적과 자금수요를 감안한 단독 운용이 가능하다는 특징 때문에 법인고객의 단기자금 운용수단으로 선호됐다.

지난해 하반기 자금시장 경색으로 인해 다수의 법인고객들이 가입 중이던 채권형 랩·신탁의 환매를 요청했지만 CP 등 편입자산의 시장 매도가 어려워지며 환매가 중단·지연됐다. 이 과정에서 일부 증권사가 고객의 투자손실을 회사의 고유자산으로 보전해주었다는 의혹이 제기되는 등 시장 불신이 확산했다.

제3자 이익 도모 거래 예시(금융감독원)
주요 검사 내용을 살펴보면 먼저 일부 운용역이 만기도래 계좌의 목표수익률 달성을 위해 불법 자전거래(연계·교체거래)를 통해 고객계좌 간 손익을 넘긴 사실이 포착됐다. 다른 증권사와 총 6천여 회의 연계 및 교체거래를 통해 특정고객 계좌의 CP를 다른 고객의 계좌로 고가 매도하여 5천억 원 규모의 손실을 고객 간 전가한 방식이다.

비정상적인 가격의 거래를 통해 고객에게 손해를 전가한 행위는 업무상 배임 소지가 있는 중대 위법행위라는 게 당국 판단이다. 관련 혐의자(운용역)는 총 9사 30명 내외이며, 금감원은 주요 혐의사실을 수사당국에 제공할 계획이다.

목표 수익률 달성이 어려워지자 대표이사 등 주요 경영진의 결정 하에 고객 계좌의 CP를 고가 매수하는 방식으로 이익을 제공한 행위도 드러났다. 다른 증권사에 가입한 특정금전신탁을 통해 고객 랩·신탁의 CP 등을 고가매수(연계·교체거래)해주는 방식으로 총 1,100억 원 규모의 이익 제공이 이뤄졌다.

일부 증권사는 고객과의 계약으로 정한 편입자산의 잔존만기, 신용등급 등을 위반하여 랩·신탁을 운용했다. 이밖에 목표수익률을 맞추기 위해 동일 투자자의 랩 계좌 간 위법 자전거래를 벌이거나 고객자산의 손실을 보전하기 위해 고유자금으로 펀드를 설정하고 특정 채권, CP를 고가매수하도록 요청한 경우도 파악됐다.

올바른 랩·신탁 시장질서가 정착되기 위해서는 증권업계의 개선 노력이 필요하다는 판단이다. 시장금리와 괴리되는 가격으로 이루어지는 이상거래 등에 대한 모니터링 및 내부통제가 필요한 이유다.

금융 당국은 투자자들을 향해 랩·신탁이 실적배당상품인 만큼 증권사에 과도한 목표수익률 제시를 요구하거나 이를 신뢰해서는 안된다고 경고했다. 자산의 내역, 만기 등을 수시로 확인함으로써, 적정하게 운용되고 있는지를 스스로 점검하는 한편, 투자손실 보전 또는 목표수익률 보장을 요구하는 행위는 투자자 자기책임원칙을 위반하는 행위임을 유념하라는 조언이다.

금감원은 이번 검사 결과 확인된 위법행위를 신속히 조치해 랩·신탁 시장 질서를 확립할 방침이다. 금감원 관계자는 "운용상 위법행위로 손실이 발생한 랩·신탁 계좌에 대해서는 금투협회와 증권업계가 협의하여 객관적인 가격 산정 및 적법한 손해배상 절차 등을 통해 환매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겠다"고 전했다.


박승완기자 pswan@wowtv.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