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니스트 니콜라이 루간스키가 지난 13일 서울 롯데콘서트홀에서 KBS교향악단과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을 연주한 뒤 관객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KBS교향악단 제공
피아니스트 니콜라이 루간스키가 지난 13일 서울 롯데콘서트홀에서 KBS교향악단과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을 연주한 뒤 관객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KBS교향악단 제공
컴퓨터라고 다 같은 컴퓨터가 아니다. 그래픽 성능을 끌어올린 게임용 컴퓨터가 있는가 하면, 용량이 큰 데이터를 빠르게 처리하는 연산용 컴퓨터가 따로 있다. 연주도 마찬가지다. 특정 곡을 오랫동안 갈고닦은 연주자가 들려주는 음악은 뭔가 다르다. ‘라흐마니노프 전문가’로 불리는 러시아 피아니스트 니콜라이 루간스키(51)의 공연이 그랬다.

루간스키는 서울 롯데콘서트홀에서 펼치는 내한 공연에서 KBS교향악단과 함께 두 차례(13·15일)에 걸쳐 라흐마니노프 전곡(총 5곡)을 연주한다. 첫 연주 날인 지난 13일 루간스키와 KBS교향악단은 80여분 동안 협주곡 1번과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광시곡, 협주곡 2번을 들려줬다. 라흐마니노프의 곡은 워낙 어렵고 복잡한 탓에 다들 한 곡도 버거워하는데, 세 곡이라니.

하지만 루간스키에게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릴레이 연주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복잡하고 거대한 곡들을 단순하면서도 우아하게 소화해냈다. 첫 곡은 좀처럼 공연장에서 듣기 힘든 협주곡 1번. 시작하자마자 오케스트라와 피아노 모두 터져 나오는 곡이지만, 의외로 강렬하지 않았다. 이게 그의 연주 스타일이다. 절제되고, 질서정연한 라흐마니노프가 흘러나왔다. 이를 두고 최은규 음악평론가는 “지적인 해석”이라고 했다. 카덴차(협연자 솔로 부분)에선 그 많은 음표가 저마다 있어야 할 곳에, 나와야 할 타이밍에 딱딱 들어맞았다.

이어 연주한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광시곡’에선 절제미가 압권이었다. 이 곡은 하나의 테마로 24개의 변주가 등장하는데, 그에겐 까다로운 일이 아니었다. 그 발걸음에 악단도 보폭을 맞췄다.

하이라이트는 2부의 협주곡 2번. 귀에 꽂히는 멜로디와 화려한 화음으로 인기가 많은 곡이다. 첫 화음을 듣자마자 ‘루간스키가 1부에서 힘을 비축했구나’라고 알아차렸다. 도입부에 등장하는 총 8번의 화음을 활화산처럼 응축된 에너지로 풀어냈다.

1악장 후반부에 등장하는 클라이맥스에서 그는 손과 팔을 수직으로 떨어뜨리며 화음을 만들어냈다. 그런데도 거친 느낌이 없었다. 루간스키는 얼마 전 내한한 예핌 브론프만처럼 소리통이 큰 스타일은 아니지만, 촘촘한 표현으로 풍성한 사운드를 연출했다. 다만 오케스트라와 피아노의 앙상블이 다소 둔하게 들린 대목이 있었다. 아귀가 맞지 않았다고 해야 할까.

루간스키는 라흐마니노프 특유의 광활하면서도 황홀한 멜로디가 쏟아지는 2악장을 지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연주했다. 과하게 표현하기 쉬운 대목이지만 루바토(템포를 자유롭게 연주)를 절제 있게 사용해 억지로 쥐어짜는 느낌은 건네지 않았다. 글리산도(한 음에서 다른 음 사이 건반을 미끄러지듯 연주하는 것) 화음으로 펼쳐지는 3악장은 피아니스트에게 ‘죽음의 계곡’이나 다름없다. 이때가 되면 대개 체력이 바닥나기 마련인데 가장 빨리, 가장 많은 음을 쳐야 하기 때문이다. 루간스키는 이때도 쌩쌩했다.

루간스키의 속주에 오케스트라가 버거워하는 구간도 있었다. 하지만 이 곡은 피아니스트가 8할이라 큰 문제는 안 됐다. 앙코르에선 흥분할 법도 한데, 루간스키는 프렐류드 12번까지 서늘함을 유지했다. 매끄럽게 돌아가는 손가락, 반짝거리는 멜로디로 여운을 남겼다.

라흐마니노프 탄생 150주년이다 보니, 올해 예술의전당과 롯데콘서트홀은 라흐마니노프 판이었다. 그 대미를 ‘라흐마니노프 전문가’가 장식했다는 건, 한국 클래식 팬들에게 더없는 선물이다.

최다은 기자 max@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