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아더 “북한 땅을 중공에 떼주는 건 자유세계 최대 패배" [책마을]
1950년 6·25 전쟁이 터진지 석달여 만에 유엔군과 국군은 서울을 수복했다. 그 해 10월 9일, 38선을 넘어서 마침내 북진에 성공하자 중국군은 북한을 도우려 압록강을 넘어왔다. 확전을 원치 않았던 영국은 ‘비무장지대’란 아이디어를 내놨다. 한반도 북부 어딘가에 완충지대를 두자는 구상이다. 완충지대의 목적은 한국과 중국이 맞닿지 않도록 하자는 것이다. 프랑스도 거들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 전략적 가치가 크기 않았던 한반도를 두고 중국과 대규모 전쟁을 치르고 싶지 않았다.

신간 <DMZ의 역사>는 DMZ를 중심으로 195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를 살펴본 책이다. 책을 쓴 한모니까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조교수는 “우리는 DMZ를 얼마나 알고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며 “DMZ의 역사를 살필수록, 지구적 사건들이 시공간을 넘어 남북한의 경계 DMZ에서 복잡하게 얽혀서 드러났다”고 했다.
맥아더 “북한 땅을 중공에 떼주는 건 자유세계 최대 패배" [책마을]
한반도 북부에 완충지대를 두자는 구상은 어째서 실현되지 않았을까. 미국의 반대 때문이었다. 유엔군 총사령관 맥아더 장군이 호전적이었다. 그는 중국의 참전에도 자신만만했다. 맥아더는 합참에 보낸 전문에서 “(영국이) 북한의 한 지역을 중공에 떼어줌으로써 중공을 달래려 한다”며 “중공의 침략 행위에 굴복해 북한 지역의 일부라도 넘겨준다면, 이는 최근 자유세계가 당하는 최대의 패배가 될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11월이 되자 전황이 급변했다. 중국군의 반격이 거셌다. 12월 서부전선을 담당하던 미8군이 대패해 38선까지 철수했다. 이때부터 미국 워싱턴 역시 휴전과 비무장지대 설치를 진지하게 검토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1951년 7월 10일 정전을 위한 본회담이 시작됐다.

북한과 중국은 38선을 군사분계선으로 정하자고 했다. 각각 10㎞씩 물러 20㎞의 비무장지대를 두자고 했다. 유엔사 측은 38선이 아닌 현재의 전선을 반영해 선을 그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38선보다 높은 곳에 휴전선이 정해져야 한국 방어가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결국 전선을 기준으로 한 군사분계선과 그로부터 남북이 각각 2㎞씩 물러나 비무장지대를 구축하는 안이 합의됐다.
Getty Images Ban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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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1953년 7월 27일 휴전이 이뤄진 후의 DMZ의 역사도 비중 있게 다룬다. 말은 ‘비무장지대’였지만 실상은 달랐다. 빠르게 재무장화됐다. 북한은 땅굴과 같은 지하 요새화 작업에 나섰다. 한국은 경계초소(GP)를 곳곳에 세웠다. 충돌도 벌어졌다. 1966년 11월 북한군의 공격에 미군 6명과 카투사 1명이 사망했다. 이듬해 4월엔 오울렛 초소 사건이 벌어졌다. 군사분계선을 넘어온 북한군 3명을 사살한 사건으로, DMZ의 긴장감이 극도로 높아졌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이던 한국은 DMZ에서 벌어진 북한의 도발에 대해 방어 수준을 넘어 적극적으로 보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국이 반대했다. 미국은 베트남에서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한국의 추가 베트남 전쟁 파병도 필요했다. 미국이 보기에 북한의 도발은 한반도에서 전쟁을 일으키기 위한 목적이 아니었다. 한국의 베트남전 추가 파병을 방해하는 데 있다고 봤다.
강원도 철원에서 바라본 비무장지대(DMZ). 사진=Getty Images Banks
강원도 철원에서 바라본 비무장지대(DMZ). 사진=Getty Images Banks
책은 DMZ의 역사를 상세하게 잘 정리했다. 다만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서는 DMZ가 당초 취지대로 진정한 비무장지대가 되어야 한다는 저자의 주장은 최근 상황을 고려할 때 다소 공허하게 들린다. 지정학을 다룬 전략서가 아니라 역사서인 만큼 ‘역사’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임근호 기자 eige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