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검증체계 없는 남북합의는 모래성
한국 정부가 북한의 군사정찰위성 발사에 대응해 9·19 남북군사합의 중 정찰비행 중단 조항에 대한 효력 정지를 발표하자, 북한은 이에 반발하면서 9·19 합의 전면 파기를 선언했다. 북한은 또 비무장지대 GP(전방초소) 복원, 해안포 재개방, 훈련 재개 등 휴전선 군사력의 원상 회복을 위한 행동에 돌입했다. 남북군사합의가 처한 이런 운명은 합의 이행을 검증할 수단이 없고 강제할 수단은 더더욱 없는 ‘군사합의’가 직면할 수밖에 없는 숙명을 여실히 보여준다.

국가 사이의 군축 합의나 군사적 신뢰 구축 합의에서 ‘검증체계’는 가장 중요한 요소다. 상대방의 합의 이행이 검증되지 않는 군사합의는 그 이행을 보장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역사상 검증체계가 가장 강력한 군사합의는 냉전시대 미국과 소련(현 러시아) 사이에 맺어진 전략무기제한협정(SALT)과 전략무기감축협정(START)이다. 이들 협정은 ‘상대국의 약속 위반이 의심스러울 경우 사찰팀을 연간 100회 이상 24시간 전 사전통고 후 급파’할 수 있는 긴급사찰 제도를 보장했다. 그런 고도의 검증체계 덕분에 협정은 수십 년간 지속될 수 있었다.

반면에 북한이 한국 또는 국제사회와 맺은 핵합의와 군사합의에는 단 한 번도 예외 없이 검증체계가 누락됐다. 그나마 포함된 제한적 검증 수단마저 북한의 거부로 이행되지 못했다. 결국 북한의 핵합의, 군사합의는 몇 해를 못 넘기고 폐기되는 운명을 맞고는 했다. 합의 이행에 대한 검증을 거부한다는 것은 합의를 이행할 의사가 없다는 의지의 표현이라고밖에 해석할 수 없다.

대표적 사례는 1991년 남북 비핵화 공동선언이었다. 이 선언에서 남과 북은 비핵화를 검증하기 위해 상호사찰 실시에 합의했다. 그러나 상호사찰 규정을 만들기 위한 남북 핵통제공동위원회는 1년이 넘도록 이견만을 거듭하다 결국 결렬돼 버렸다. 한국 측은 SALT 협정처럼 24시간 전 통고 후 실시하는 긴급사찰을 연간 50회까지 허용하자는 주장을 내세웠지만 북한은 1개월 전 사전 통고하는 사찰을 연간 2회만 실시하자는 입장을 고수했다. 이는 숨겨야 할 것이 많다는 의미였고, 북한이 비핵화 약속을 진정으로 이행할 의사가 없다는 것을 강력하게 시사한 대목이기도 했다.

북한과의 다른 합의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미국과 북한은 1994년 북한 비핵화를 위한 ‘제네바 합의’라는 역사적 합의를 이룩했고,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찰관이 제네바 합의의 이행을 감독하기로 하는 데 이르렀다. 그러나 북한은 ‘합의 불이행’이 IAEA 사찰관에게 발각되자 사찰관을 추방해 버렸다. 이렇게 검증 수단이 사라진 제네바 합의는 결국 2002년 와해됐다.

2005년 북핵 6자회담에서 합의한 ‘9·19 핵합의’ 역시 검증체계 없는 원론적 합의에 불과했다. 그런 맹점을 보완하고자 2007년 6자회담에서 채택한 북핵 ‘2·13 합의’와 ‘10·3 합의’에도 검증체계는 반영되지 못했다. 미국이 북한에 합의 이행의 검증을 강력히 요구하자 ‘9·19 핵합의’는 붕괴됐다.

9·19 남북군사합의는 남북 양측의 합의 이행을 감시할 철저한 검증체계를 설정하기는커녕 그나마 존재하던 기존 검증 수단인 정찰비행마저 금지함으로써 우리 군의 눈과 귀를 가린 위험천만한 합의였다. 감시되고 검증되지 않는 군사합의가 정상적으로 이행될 수 없다는 건 동서고금의 진리다. 평화는 이상인 동시에 냉정한 현실이다. 오로지 상대방의 선의와 호의에 의존해야 하는 검증되지 않는 평화는 언제라도 무너져 내릴 수 있는 모래성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