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7살 아이에게 내 췌장 떼어줄 수 없나요"…엄마의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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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후 21개월 아이가 1형당뇨…주사때마다 아이도 엄마도 울어
"질병 명칭 췌도부전증으로 바꾸고, 중증난치질환에 포함해야"
[※ 편집자 주= 이 기사는 1형당뇨인과 그 가족들이 김미영 1형당뇨환우회 대표를 통해 연합뉴스에 보내온 개별적인 삶의 사례를 묶은 것입니다.
1형당뇨인들의 [삶] 기사는 조만간 두차례 더 송고할 예정입니다.
] "내 췌장을 우리 아이한테 떼어주면 안 되나요", "1형당뇨라는 말을 듣는 순간 아이와 죽을 생각을 했어요"
1형당뇨 진단을 받은 사람과 그 가족은 질환에 대한 의사의 설명을 듣는 순간 날벼락 같은 충격을 받는다.
몇 년간 우울증에 빠지기도 하고, 극단적 선택을 시도하기도 한다.
김미영 1형당뇨환우회 대표는 "1형당뇨는 평생 완치되지 않고 매일 인슐린 주사를 해야 하는 질병이기 때문에 관리가 쉽지 않다"면서 "이전에는 1년에 1천500번 이상 인슐린을 주사하고, 4천번 가까이 혈당 체크를 해야 했기에 아이의 부모는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는 연속혈당측정기와 인슐린펌프의 국내 보급 이전의 일이었다"면서 "지금은 이들 기기 덕분으로 1형당뇨인들도 비당뇨인과 다름없이 충분히 먹고, 공부하고, 운동할 수 있다"고 했다.
아래 내용은 1형당뇨 극복을 위해 긍정적 마음을 갖고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환우와 그 가족들의 사례를 묶은 것이다.
이들은 1형당뇨를 중증난치질환으로 분류하고, 질환 이름을 '췌도부전증'으로 바꿔야 한다고 했다.
◇ "어떻게 아이와 죽을까 생각했다"
(9살 1형당뇨 아이를 둔 엄마) 동네병원 소아청소년과에 간 것은 당뇨 때문이 아니었다.
코로나 격리 해제 후 아이의 컨디션이 좋지 않아서 방문했다.
의사는 아이의 혈당이 500mg/dl이라고 했다.
우리 가족은 그 수치가 높은 것이냐고 물었다.
그 정도로 우리 가족은 당뇨를 몰랐고, 당뇨와 무관했다.
우리는 곧바로 대학병원 응급실로 향했다.
대학병원 의사는 아이가 음식을 먹을 때마다 평생에 걸쳐 인슐린을 맞아야 한다고 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어떻게 아이와 죽을까"라는 생각이 내 마음을 파고들었다.
하지만 부모는 아이 생명을 지킬 의무가 있지, 아이의 목숨을 버릴 권리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든지 아이를 건강하게 키워야 했다.
나는 의사에게 "내 췌장을 아이에게 떼어줄 수 없나요?"라고 물었다.
그럴 수 없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나는 아이를 위해 남은 인생을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병원에서 퇴원하는 날이 가장 막막했던 순간이었다.
지금까지 퇴원은 질병이 낫고 몸이 회복되는 것을 의미했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병원 밖 세상으로 내던져지는 느낌이었다.
예상대로 집에서의 혈당 관리는 어려웠다.
음식, 인슐린, 호르몬, 몸의 활동 등 여러 요인과 혈당수치의 상관성을 오직 경험으로 파악해야 했다.
처음에는 고혈당과 저혈당이 반복됐다.
내가 관리를 잘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아이에게 미안했고 힘들었다.
내가 아이의 생명을 갉아먹는 것 같았다.
가장 절망적인 것은 아무리 관리를 잘해도 완치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이었다.
한 달을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살았다.
그러다 희망적인 글을 봤다.
슈거트리라는 1형당뇨인 카페에 올라온 글이었다.
미국에서 열심히 치료제를 개발 중이고, 건강하게 관리하며 기다리면 된다고 했다.
희망이 생겼다.
어떻게든 아이를 건강하게 키워내야겠다고 다짐했다.
치료제 개발에 10년이 걸릴지, 50년 또는 100년이 필요한지는 모른다.
아무튼 그 기간을 버텨야 한다고 생각했다.
왜 우리 아이에게 이런 병이 왔느냐고 원망하는 것은 그만하기로 했다.
먼 미래에 대한 두려움보다 하루하루 잘해 나가고, 당장 내일의 일에 집중하기로 했다.
더욱 희망이 생긴 것은 환우회를 통해 연속혈당측정기, 인슐린 펌프, 인공췌장 시스템의 존재를 알게 됐기 때문이다.
이들 기기 덕분에 우리 아이와 가족이 조금 더 건강하고 편하게 일상생활을 할 수 있게 됐다.
혈당 관리와 일상생활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게 된 것이다.
1형당뇨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개선돼야 한다.
동네 안과, 치과, 심지어 소아청소년과에서도 1형당뇨라고 하면 눈을 흘기며 아이와 나를 번갈아 쳐다본다.
나는 1형당뇨라는 질병 명칭이 '췌도부전증'으로 바뀌었으면 한다.
명칭 변경이 이 질병에 대한 오해와 편견을 줄여줄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1형당뇨가 중증난치질환으로 인정되고, 요양비에서 요양급여로 전환되는 것도 내가 간절히 희망하는 사안이다.
의료비 부담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아이의 의료기기 소모품, 혈당 관리 용품 등의 비용은 감당하기 벅찰 정도다.
건강보험공단에서 요양비 명목으로 일부 지원이 되지만, 본인 부담금이 적지 않다.
게다가 실리콘 테이프, 방수 테이프 등 의료용품 등은 지원되지 않는다.
◇"몸부림치는 아이 잡고 주사 놓고는 같이 울었다"
(생후 21개월에 1형당뇨 진단받은 아이의 엄마) 아이가 태어난 지 21개월 됐을 때였다.
소아과에 가도 이상은 없다고 하는데, 아이의 손과 발이 차가웠고 시간이 지나면서 팔과 다리마저 싸늘해졌다.
먹지도 못하고 의식을 잃어갔다.
병원 응급실에 갔더니 1형당뇨라고 했다.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동안 아이 음식은 유기농 매장에서 식재료를 구입해 저염식으로 만들었다.
젤리 종류는 먹여본 적이 없었다.
1형당뇨는 자가면역질환으로 식생활 습관과 관련 없이 발병한다는 것은 그 후에 알았다.
아이는 응급실에서부터 케톤산증 치료를 받았는데, 이틀 동안 의식이 없었다.
깨어나서도 1주일 가까이 걷지도 못했다.
식사 때마다 돌아오는 주사 시간은 지옥 같았다.
자기의 질환을 알 수 없는 아이는 주사를 맞지 않겠다고 몸부림치면서 울었다.
아이를 억지로 붙잡고 주사를 놓고 난 후에 나도 같이 울곤 했다.
혈당 관리에서 가장 어려운 점은 인슐린 주사 양을 부모가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었다.
눈물 한 방울보다 적은 양이 더 들어가면 저혈당이 오고, 그 한 방울이 부족하면 고혈당이 나타났다.
같은 식사를 해도 투입해야 하는 인슐린양은 달랐다.
잠투정으로 아이가 울면 음식을 먹지 않았는데도 고혈당이 찾아왔다.
나는 너무 막막해서 매일 울며 지냈다.
어느 날 입원실 옆자리 환자의 보호자가 김미영 대표에 대해 말했던 것이 기억났다.
나는 그가 운영하는 인터넷 카페에 들어갔고, 그곳의 도움으로 연속혈당측정기를 아이에게 부착했다.
삶이 달라졌다.
밤을 새우며 한 시간에 한 번씩 혈당 체크를 했었는데, 이제는 혈당수치가 5분마다 자동으로 휴대전화에 들어왔다.
잠을 제대로 잘 수 있게 된 것이다.
아이는 음식도 자유롭게 먹는다.
또래들이 먹는 것과 다르지 않다.
키도 친구들보다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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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우리 부부는 난치성 질환이라는 사실에 괴로웠다.
유병 기간이 5년, 10년 이렇게 정해져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이제는 관리를 잘하면 아이가 건강하게 살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이 생겼다.
1형당뇨는 인식개선이 필요한 질환이다.
1형당뇨라고 하면 단것을 많이 먹었는지 묻는 사람들이 많다.
일반 사람들뿐 아니라 의료진, 기자들도 칼럼에 '소아당뇨', '선천적 질환', '유전병'이라고 잘못 쓰는 경우가 적지 않다.
우리 환우회는 1형당뇨라는 명칭을 췌도부전증으로 바꾸는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우리가 편견과 싸우지 않고 질환을 제대로 표현할 수 있도록 정부가 도와주기를 바란다.
◇"1형당뇨 당당히 알렸더니 남친이 도망가네요"
(1형당뇨 합병증으로 위 마비를 겪고 있는 최지아 씨) 어느 날 극심한 복통과 구토 증세가 왔다.
동네의 내과를 찾았더니 급성 장염이라는 진단이 나왔고, 포도당 수액을 맞았다.
그날 밤 구토와 복통이 멈추지 않아 대학병원 응급실로 달려갔다.
눈을 떠보니 중환자실이었다.
어느새 사흘이 지난 상태였다.
2008년에 나는 인슐린 주사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는 1형당뇨인이 됐다.
이미 무너진 면역체계 때문인지 당뇨 외에 급성 췌장염, 위 마비, 급성 신우신염, 급성 연조직염 등 질병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찾아왔다.
꿈꿔왔던 대학 캠퍼스의 로망은 사라졌다.
병원에서 과제와 발표 준비를 해야 했다.
대학교 졸업 후에는 1형당뇨를 당당히 알리고 취업하면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착각이었다.
그건 치명적 약점이 됐다.
사람들은 내가 몸이 조금만 아파도 "당뇨가 있으니 아프지"라는 말을 자주 했다.
그 말이 듣기 싫었던 나는 번아웃 증후군이 올 정도로 밤낮없이 일했다.
그 결과, 위 마비가 재발했다.
회사 측은 민폐가 된다면서 떠나라고 했다.
권고사직이었다.
연애도 결혼도 순탄하지 않았다.
당뇨병의 끝은 다리 절단, 실명이 아니냐면서 무서워 도망간 남자친구들도 있었다.
그런데 짚신도 짝이 있다는 말이 틀리지 않았다.
나를 있는 그대로 바라봐 주는 남편을 만나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고 있다.
충분히 할 수 있잖아요.
응원할게요" ' />
위 마비는 잘 알려지지 않은 1형당뇨 합병증이다.
현대의학에서 완치법도, 치료법도 없는 질병이다.
혈당 외에 온도, 습도, 호르몬 등 다양한 요소의 영향을 받기에 미리 대처하기가 쉽지 않다.
소화 속도가 비정상적으로 지연되면서 음식물이 위에 그대로 남아있다가 구토로 나온다.
위액과 담즙을 토하다 심해지면 피까지 올라오기도 한다.
이 증상은 짧게는 며칠, 길게는 몇 달간 지속된다.
구토하다 실신하고 깨어나서는 또 구토한다.
항암 치료 시에 쓰는 항구토제도 소용이 없다.
자연적으로 멈출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위 마비를 가진 사람은 연속혈당측정기와 인슐린 펌프가 꼭 필요하다.
소화 속도와 인슐린 작용 시간을 예측하기 어렵고 혈당이 급격하게 변동하는 것이 이 질환의 특징이기 때문이다.
나는 1형당뇨가 중증난치질환으로 분류되기를 희망한다.
위 마비는 1형당뇨병 범주에 속하는 자율신경계 합병증이다.
1형당뇨병이 중증난치질환이 되면 병원비 감면 등의 혜택을 받을 수 있다.
나는 1년에 6개월 이상을 병원에서 보내다 보니 본인 부담금만 연간 1천만원 이상이다.
◇ "낮에는 병원, 밤에는 KTX 타고 직장에 가서 일했다"
(7살에 1형당뇨 진단받은 아이의 엄마) 우리 아이는 7살이 되던 2021년 1월에 1형당뇨를 진단받았다.
살이 계속 빠지고, 밤에는 자다 깨서 화장실을 가는 일이 잦았다.
물을 많이 마시는 증상도 있었다.
동네 소아과에 찾아가 이 이야기를 했더니 의사는 혈당 체크를 권했다.
혈당수치가 503mg/dl이었다.
그 길로 경북에서 KTX를 타고 대전의 충남대학병원 응급실로 달려갔다.
검사 결과 1형당뇨였다.
세상의 모든 불행이 나에게 쏟아진 듯했다.
나는 아이를 혼자 기르고 있었는데, 진단 소식을 들은 아이 아빠는 이 상황을 외면했다.
당장 생계와 아이 케어(돌봄)를 나 혼자 해야 했다.
아이가 입원해 있을 때조차 쉴 수 없었다.
낮에는 병원에서 아이를 돌보고, 밤에는 KTX를 타고 직장에 가서 밀린 업무를 처리해야 했다.
퇴원 후 집에서의 혈당 관리는 더욱 어려워졌다.
병원 교육시스템이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았기에 입원 기간에 혈당 관리에 대해 제대로 배울 수 없었다.
날이 갈수록 춤추는 혈당에 지쳐만 갔다.
가혹한 시련이었다.
하루에도 수십번씩 삶을 포기하고 싶었다.
그러다 슈거트리라는 카페와 환우회를 알게 됐다.
환우 가족들이 연속혈당기 사용법, 혈당 흐름 패턴, 초속효 인슐린과 기저 인슐린의 작용, 음식에 따른 혈당의 변화 등 소중한 경험을 나눠줬다.
그건 병원 의료진 그 누구로부터도 배울 수 없었던 것이었다.
나는 1형당뇨에 대한 의료기관의 교육이 필요하다고 본다.
이 질환에 걸리면 환자 본인이나 가족의 엄청난 노력 없이는 일상을 유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유서 쓰고 인슐린을 모두 모아서 내 몸에 주사했다"
(1형당뇨 진단받은 50대 여성) 내가 1형당뇨를 진단받은 것은 2020년 8월이었다.
출근 후 배가 심하게 아팠다.
조퇴하고 병원에 가야 할 정도였다.
초음파, 엑스레이, 혈액검사에서 이상소견이 없다고 했다.
약 먹고 일주일 뒤에 내원하라는 의사의 말을 듣고 집에 왔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구토와 설사가 반복됐다.
입이 타들어 가니 물만 찾았다.
다음 날 아침에는 일어날 힘조차 없었다.
급하게 119구급차를 타고 상급 병원으로 달려갔다.
의사는 깜짝 놀라면서 케토산증이 동반된 1형당뇨이니 중환자실로 들어가야 한다고 했다.
퇴원 후 3곳의 병원에 가봤지만 만족스럽지 못했다.
심지어 한 대학병원에서는 1형 당뇨에 대해 잘 모르는 눈치였다.
의사가 1형당뇨가 아닌 2형 당뇨에 관해 설명했다.
의사들도 잘 모르는 1형 당뇨가 왜 50대인 나에게 왔을까.
친정 식구들 누구도 당뇨를 가진 사람은 없었다.
나는 입원실에서부터 1형당뇨에 관한 내용을 집중적으로 찾아봤다.
어떤 특정 기능식품으로 완치했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그 식품을 구입하러 갔다.
매달 130여만원의 비용이 들었지만, 완치가 가능하다고 하니 감수했다.
휴직계도 냈다.
완치되기를 하루하루 기도하면서 그 식품을 먹었다.
한 달간은 죽기 살기로 했다.
질환은 호전되지 않았다.
170㎝ 키에 70kg이었던 몸무게는 55kg까지 빠졌다.
사람들과의 왕래도 끊겼다.
이런 생활을 4개월을 하니 살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유서를 쓰고 집에 있는 인슐린을 모두 모아서 내 몸에 주입했다.
점점 저혈당 증상을 느꼈다.
저혈당이 지속되면 쇼크로 죽게 된다.
나는 눈을 감았다.
눈을 뜨고 나니 119대원들이 집에서 내 몸에 포도당 링거를 꽂고 있었다.
내 몸은 땀에 흠뻑 젖은 채 침대에 있었다.
옆에서 남편은 울고 있었다.
나는 남편을 부둥켜안고는 같이 울었다.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인터넷 검색을 하자 그땐 보지 못했던 1형당뇨인들의 인터넷 카페가 나왔다.
그곳에서 마라톤한다는 환우의 글도 봤다.
나만 1형당뇨인 줄 알았는데, 열심히 사는 사람들도 있었다.
지금 나는 비 당뇨인과 같은 생활을 한다.
운동도, 직장 생활도 열심히 하고 있다.
/연합뉴스
"질병 명칭 췌도부전증으로 바꾸고, 중증난치질환에 포함해야"
[※ 편집자 주= 이 기사는 1형당뇨인과 그 가족들이 김미영 1형당뇨환우회 대표를 통해 연합뉴스에 보내온 개별적인 삶의 사례를 묶은 것입니다.
1형당뇨인들의 [삶] 기사는 조만간 두차례 더 송고할 예정입니다.
] "내 췌장을 우리 아이한테 떼어주면 안 되나요", "1형당뇨라는 말을 듣는 순간 아이와 죽을 생각을 했어요"
1형당뇨 진단을 받은 사람과 그 가족은 질환에 대한 의사의 설명을 듣는 순간 날벼락 같은 충격을 받는다.
몇 년간 우울증에 빠지기도 하고, 극단적 선택을 시도하기도 한다.
김미영 1형당뇨환우회 대표는 "1형당뇨는 평생 완치되지 않고 매일 인슐린 주사를 해야 하는 질병이기 때문에 관리가 쉽지 않다"면서 "이전에는 1년에 1천500번 이상 인슐린을 주사하고, 4천번 가까이 혈당 체크를 해야 했기에 아이의 부모는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는 연속혈당측정기와 인슐린펌프의 국내 보급 이전의 일이었다"면서 "지금은 이들 기기 덕분으로 1형당뇨인들도 비당뇨인과 다름없이 충분히 먹고, 공부하고, 운동할 수 있다"고 했다.
아래 내용은 1형당뇨 극복을 위해 긍정적 마음을 갖고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환우와 그 가족들의 사례를 묶은 것이다.
이들은 1형당뇨를 중증난치질환으로 분류하고, 질환 이름을 '췌도부전증'으로 바꿔야 한다고 했다.
◇ "어떻게 아이와 죽을까 생각했다"
(9살 1형당뇨 아이를 둔 엄마) 동네병원 소아청소년과에 간 것은 당뇨 때문이 아니었다.
코로나 격리 해제 후 아이의 컨디션이 좋지 않아서 방문했다.
의사는 아이의 혈당이 500mg/dl이라고 했다.
우리 가족은 그 수치가 높은 것이냐고 물었다.
그 정도로 우리 가족은 당뇨를 몰랐고, 당뇨와 무관했다.
우리는 곧바로 대학병원 응급실로 향했다.
대학병원 의사는 아이가 음식을 먹을 때마다 평생에 걸쳐 인슐린을 맞아야 한다고 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어떻게 아이와 죽을까"라는 생각이 내 마음을 파고들었다.
하지만 부모는 아이 생명을 지킬 의무가 있지, 아이의 목숨을 버릴 권리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든지 아이를 건강하게 키워야 했다.
나는 의사에게 "내 췌장을 아이에게 떼어줄 수 없나요?"라고 물었다.
그럴 수 없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나는 아이를 위해 남은 인생을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병원에서 퇴원하는 날이 가장 막막했던 순간이었다.
지금까지 퇴원은 질병이 낫고 몸이 회복되는 것을 의미했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병원 밖 세상으로 내던져지는 느낌이었다.
예상대로 집에서의 혈당 관리는 어려웠다.
음식, 인슐린, 호르몬, 몸의 활동 등 여러 요인과 혈당수치의 상관성을 오직 경험으로 파악해야 했다.
처음에는 고혈당과 저혈당이 반복됐다.
내가 관리를 잘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아이에게 미안했고 힘들었다.
내가 아이의 생명을 갉아먹는 것 같았다.
가장 절망적인 것은 아무리 관리를 잘해도 완치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이었다.
한 달을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살았다.
그러다 희망적인 글을 봤다.
슈거트리라는 1형당뇨인 카페에 올라온 글이었다.
미국에서 열심히 치료제를 개발 중이고, 건강하게 관리하며 기다리면 된다고 했다.
희망이 생겼다.
어떻게든 아이를 건강하게 키워내야겠다고 다짐했다.
치료제 개발에 10년이 걸릴지, 50년 또는 100년이 필요한지는 모른다.
아무튼 그 기간을 버텨야 한다고 생각했다.
왜 우리 아이에게 이런 병이 왔느냐고 원망하는 것은 그만하기로 했다.
먼 미래에 대한 두려움보다 하루하루 잘해 나가고, 당장 내일의 일에 집중하기로 했다.
더욱 희망이 생긴 것은 환우회를 통해 연속혈당측정기, 인슐린 펌프, 인공췌장 시스템의 존재를 알게 됐기 때문이다.
이들 기기 덕분에 우리 아이와 가족이 조금 더 건강하고 편하게 일상생활을 할 수 있게 됐다.
혈당 관리와 일상생활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게 된 것이다.
1형당뇨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개선돼야 한다.
동네 안과, 치과, 심지어 소아청소년과에서도 1형당뇨라고 하면 눈을 흘기며 아이와 나를 번갈아 쳐다본다.
나는 1형당뇨라는 질병 명칭이 '췌도부전증'으로 바뀌었으면 한다.
명칭 변경이 이 질병에 대한 오해와 편견을 줄여줄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1형당뇨가 중증난치질환으로 인정되고, 요양비에서 요양급여로 전환되는 것도 내가 간절히 희망하는 사안이다.
의료비 부담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아이의 의료기기 소모품, 혈당 관리 용품 등의 비용은 감당하기 벅찰 정도다.
건강보험공단에서 요양비 명목으로 일부 지원이 되지만, 본인 부담금이 적지 않다.
게다가 실리콘 테이프, 방수 테이프 등 의료용품 등은 지원되지 않는다.
◇"몸부림치는 아이 잡고 주사 놓고는 같이 울었다"
(생후 21개월에 1형당뇨 진단받은 아이의 엄마) 아이가 태어난 지 21개월 됐을 때였다.
소아과에 가도 이상은 없다고 하는데, 아이의 손과 발이 차가웠고 시간이 지나면서 팔과 다리마저 싸늘해졌다.
먹지도 못하고 의식을 잃어갔다.
병원 응급실에 갔더니 1형당뇨라고 했다.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동안 아이 음식은 유기농 매장에서 식재료를 구입해 저염식으로 만들었다.
젤리 종류는 먹여본 적이 없었다.
1형당뇨는 자가면역질환으로 식생활 습관과 관련 없이 발병한다는 것은 그 후에 알았다.
아이는 응급실에서부터 케톤산증 치료를 받았는데, 이틀 동안 의식이 없었다.
깨어나서도 1주일 가까이 걷지도 못했다.
식사 때마다 돌아오는 주사 시간은 지옥 같았다.
자기의 질환을 알 수 없는 아이는 주사를 맞지 않겠다고 몸부림치면서 울었다.
아이를 억지로 붙잡고 주사를 놓고 난 후에 나도 같이 울곤 했다.
혈당 관리에서 가장 어려운 점은 인슐린 주사 양을 부모가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었다.
눈물 한 방울보다 적은 양이 더 들어가면 저혈당이 오고, 그 한 방울이 부족하면 고혈당이 나타났다.
같은 식사를 해도 투입해야 하는 인슐린양은 달랐다.
잠투정으로 아이가 울면 음식을 먹지 않았는데도 고혈당이 찾아왔다.
나는 너무 막막해서 매일 울며 지냈다.
어느 날 입원실 옆자리 환자의 보호자가 김미영 대표에 대해 말했던 것이 기억났다.
나는 그가 운영하는 인터넷 카페에 들어갔고, 그곳의 도움으로 연속혈당측정기를 아이에게 부착했다.
삶이 달라졌다.
밤을 새우며 한 시간에 한 번씩 혈당 체크를 했었는데, 이제는 혈당수치가 5분마다 자동으로 휴대전화에 들어왔다.
잠을 제대로 잘 수 있게 된 것이다.
아이는 음식도 자유롭게 먹는다.
또래들이 먹는 것과 다르지 않다.
키도 친구들보다 크다.
' />
처음에 우리 부부는 난치성 질환이라는 사실에 괴로웠다.
유병 기간이 5년, 10년 이렇게 정해져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이제는 관리를 잘하면 아이가 건강하게 살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이 생겼다.
1형당뇨는 인식개선이 필요한 질환이다.
1형당뇨라고 하면 단것을 많이 먹었는지 묻는 사람들이 많다.
일반 사람들뿐 아니라 의료진, 기자들도 칼럼에 '소아당뇨', '선천적 질환', '유전병'이라고 잘못 쓰는 경우가 적지 않다.
우리 환우회는 1형당뇨라는 명칭을 췌도부전증으로 바꾸는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우리가 편견과 싸우지 않고 질환을 제대로 표현할 수 있도록 정부가 도와주기를 바란다.
◇"1형당뇨 당당히 알렸더니 남친이 도망가네요"
(1형당뇨 합병증으로 위 마비를 겪고 있는 최지아 씨) 어느 날 극심한 복통과 구토 증세가 왔다.
동네의 내과를 찾았더니 급성 장염이라는 진단이 나왔고, 포도당 수액을 맞았다.
그날 밤 구토와 복통이 멈추지 않아 대학병원 응급실로 달려갔다.
눈을 떠보니 중환자실이었다.
어느새 사흘이 지난 상태였다.
2008년에 나는 인슐린 주사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는 1형당뇨인이 됐다.
이미 무너진 면역체계 때문인지 당뇨 외에 급성 췌장염, 위 마비, 급성 신우신염, 급성 연조직염 등 질병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찾아왔다.
꿈꿔왔던 대학 캠퍼스의 로망은 사라졌다.
병원에서 과제와 발표 준비를 해야 했다.
대학교 졸업 후에는 1형당뇨를 당당히 알리고 취업하면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착각이었다.
그건 치명적 약점이 됐다.
사람들은 내가 몸이 조금만 아파도 "당뇨가 있으니 아프지"라는 말을 자주 했다.
그 말이 듣기 싫었던 나는 번아웃 증후군이 올 정도로 밤낮없이 일했다.
그 결과, 위 마비가 재발했다.
회사 측은 민폐가 된다면서 떠나라고 했다.
권고사직이었다.
연애도 결혼도 순탄하지 않았다.
당뇨병의 끝은 다리 절단, 실명이 아니냐면서 무서워 도망간 남자친구들도 있었다.
그런데 짚신도 짝이 있다는 말이 틀리지 않았다.
나를 있는 그대로 바라봐 주는 남편을 만나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고 있다.
충분히 할 수 있잖아요.
응원할게요" ' />
위 마비는 잘 알려지지 않은 1형당뇨 합병증이다.
현대의학에서 완치법도, 치료법도 없는 질병이다.
혈당 외에 온도, 습도, 호르몬 등 다양한 요소의 영향을 받기에 미리 대처하기가 쉽지 않다.
소화 속도가 비정상적으로 지연되면서 음식물이 위에 그대로 남아있다가 구토로 나온다.
위액과 담즙을 토하다 심해지면 피까지 올라오기도 한다.
이 증상은 짧게는 며칠, 길게는 몇 달간 지속된다.
구토하다 실신하고 깨어나서는 또 구토한다.
항암 치료 시에 쓰는 항구토제도 소용이 없다.
자연적으로 멈출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위 마비를 가진 사람은 연속혈당측정기와 인슐린 펌프가 꼭 필요하다.
소화 속도와 인슐린 작용 시간을 예측하기 어렵고 혈당이 급격하게 변동하는 것이 이 질환의 특징이기 때문이다.
나는 1형당뇨가 중증난치질환으로 분류되기를 희망한다.
위 마비는 1형당뇨병 범주에 속하는 자율신경계 합병증이다.
1형당뇨병이 중증난치질환이 되면 병원비 감면 등의 혜택을 받을 수 있다.
나는 1년에 6개월 이상을 병원에서 보내다 보니 본인 부담금만 연간 1천만원 이상이다.
◇ "낮에는 병원, 밤에는 KTX 타고 직장에 가서 일했다"
(7살에 1형당뇨 진단받은 아이의 엄마) 우리 아이는 7살이 되던 2021년 1월에 1형당뇨를 진단받았다.
살이 계속 빠지고, 밤에는 자다 깨서 화장실을 가는 일이 잦았다.
물을 많이 마시는 증상도 있었다.
동네 소아과에 찾아가 이 이야기를 했더니 의사는 혈당 체크를 권했다.
혈당수치가 503mg/dl이었다.
그 길로 경북에서 KTX를 타고 대전의 충남대학병원 응급실로 달려갔다.
검사 결과 1형당뇨였다.
세상의 모든 불행이 나에게 쏟아진 듯했다.
나는 아이를 혼자 기르고 있었는데, 진단 소식을 들은 아이 아빠는 이 상황을 외면했다.
당장 생계와 아이 케어(돌봄)를 나 혼자 해야 했다.
아이가 입원해 있을 때조차 쉴 수 없었다.
낮에는 병원에서 아이를 돌보고, 밤에는 KTX를 타고 직장에 가서 밀린 업무를 처리해야 했다.
퇴원 후 집에서의 혈당 관리는 더욱 어려워졌다.
병원 교육시스템이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았기에 입원 기간에 혈당 관리에 대해 제대로 배울 수 없었다.
날이 갈수록 춤추는 혈당에 지쳐만 갔다.
가혹한 시련이었다.
하루에도 수십번씩 삶을 포기하고 싶었다.
그러다 슈거트리라는 카페와 환우회를 알게 됐다.
환우 가족들이 연속혈당기 사용법, 혈당 흐름 패턴, 초속효 인슐린과 기저 인슐린의 작용, 음식에 따른 혈당의 변화 등 소중한 경험을 나눠줬다.
그건 병원 의료진 그 누구로부터도 배울 수 없었던 것이었다.
나는 1형당뇨에 대한 의료기관의 교육이 필요하다고 본다.
이 질환에 걸리면 환자 본인이나 가족의 엄청난 노력 없이는 일상을 유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유서 쓰고 인슐린을 모두 모아서 내 몸에 주사했다"
(1형당뇨 진단받은 50대 여성) 내가 1형당뇨를 진단받은 것은 2020년 8월이었다.
출근 후 배가 심하게 아팠다.
조퇴하고 병원에 가야 할 정도였다.
초음파, 엑스레이, 혈액검사에서 이상소견이 없다고 했다.
약 먹고 일주일 뒤에 내원하라는 의사의 말을 듣고 집에 왔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구토와 설사가 반복됐다.
입이 타들어 가니 물만 찾았다.
다음 날 아침에는 일어날 힘조차 없었다.
급하게 119구급차를 타고 상급 병원으로 달려갔다.
의사는 깜짝 놀라면서 케토산증이 동반된 1형당뇨이니 중환자실로 들어가야 한다고 했다.
퇴원 후 3곳의 병원에 가봤지만 만족스럽지 못했다.
심지어 한 대학병원에서는 1형 당뇨에 대해 잘 모르는 눈치였다.
의사가 1형당뇨가 아닌 2형 당뇨에 관해 설명했다.
의사들도 잘 모르는 1형 당뇨가 왜 50대인 나에게 왔을까.
친정 식구들 누구도 당뇨를 가진 사람은 없었다.
나는 입원실에서부터 1형당뇨에 관한 내용을 집중적으로 찾아봤다.
어떤 특정 기능식품으로 완치했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그 식품을 구입하러 갔다.
매달 130여만원의 비용이 들었지만, 완치가 가능하다고 하니 감수했다.
휴직계도 냈다.
완치되기를 하루하루 기도하면서 그 식품을 먹었다.
한 달간은 죽기 살기로 했다.
질환은 호전되지 않았다.
170㎝ 키에 70kg이었던 몸무게는 55kg까지 빠졌다.
사람들과의 왕래도 끊겼다.
이런 생활을 4개월을 하니 살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유서를 쓰고 집에 있는 인슐린을 모두 모아서 내 몸에 주입했다.
점점 저혈당 증상을 느꼈다.
저혈당이 지속되면 쇼크로 죽게 된다.
나는 눈을 감았다.
눈을 뜨고 나니 119대원들이 집에서 내 몸에 포도당 링거를 꽂고 있었다.
내 몸은 땀에 흠뻑 젖은 채 침대에 있었다.
옆에서 남편은 울고 있었다.
나는 남편을 부둥켜안고는 같이 울었다.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인터넷 검색을 하자 그땐 보지 못했던 1형당뇨인들의 인터넷 카페가 나왔다.
그곳에서 마라톤한다는 환우의 글도 봤다.
나만 1형당뇨인 줄 알았는데, 열심히 사는 사람들도 있었다.
지금 나는 비 당뇨인과 같은 생활을 한다.
운동도, 직장 생활도 열심히 하고 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