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달 가족중 한명이 아파 입원했다. 짧지 않은 시간동안 병원을 오가며 나름대로 심적인 보조를 하는데 최선을 다했지만, 병세가 호전되지 않자 건강을 되찾을 수는 있을지, 병으로 생긴 신체 변화로 인해 환자가 자존감에 타격을 받지 않을지, 정서적으로 우울하거나 희망을 놓는 것은 아닐지 걱정되는 마음을 다스리기 어려웠다.

이 때 크게 위안이 되었던 것은 의료진들의 능력과 태도였다. 주치의는 적절한 종류와 양의 약을 투여하고 신체반응의 추이를 지켜봤다. 당직의와 의학적 조치 내역을 꼼꼼히 공유했고, 다시 그 내용을 이해하기 쉬운 말로 보호자에게 설명해줬다. 의사 및 간호사 등 모든 스태프들은 친절하고 따스하게 환자를 대하고 불편한 곳이 없는지 상태를 살폈을 뿐 아니라 보호자의 어지러운 마음을 토닥여 줬다. 덕분에 환자는 잘 회복하여 퇴원할 수 있었다.

안도할 수 있게 된 지금, 이 과정에서 문득 떠오른 그림이 있어 이를 매개로 '좋은 의료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에 대해 이야기 해보고자 한다. 대상이 되는 작품은 '과학과 인정(人情·Science and Charity)'(1897·그림 1)이란 유화다.
[도판 1] 파블로 피카소, <과학과 관용>, 1897, 캔버스에 유화, 197 cm × 249.5 cm , 바르셀로나 피카소 미술관 소장
[도판 1] 파블로 피카소, <과학과 관용>, 1897, 캔버스에 유화, 197 cm × 249.5 cm , 바르셀로나 피카소 미술관 소장
거대한 규모의 캔버스에 작고 소박한 실내공간이 사실주의적으로 그려져 있고 공간을 가로지르며 침대가 놓여있는데 그 위엔 병색이 짙은 환자가 힘없이 누워있다. 환자의 오른편에는 의사가 앉아 시계를 들여다보며 환자의 손목을 잡고 분당 맥박수를 재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 건너편에는 카톨릭 수녀가 서있는데 한손으로는 아기를 안고 다른 손으로 따뜻한 차를 환자에게 건네고 있다.

이 그림을 그린 화가는 누구일까. 다름 아닌 '현대미술의 거장' 파블로 피카소다. 입체파였던 그에게 언제 이렇게 공간과 인물을 유려하게 표현하던 시기가 있었는가 싶다. 이 작품은 피카소가 15살일 때 그린 것이다.

피카소는 스페인 말라가라는 마을의 성공하지 못한 화가인 아버지와 쾌활하고 다정한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말 하기도 전에 그림부터 그리는 피카소를 보고 아버지는 그의 미술 교육에 열과 성을 다했다. 아동기에 이미 피카소의 소묘실력은 미술학교의 학우들뿐 아니라 아버지를 능가했다고 한다. 통상적인 미술교육을 받던 아동기와 10대 시절엔 피카소도 당대 화단이 요구하던 사실주의 화풍을 견지했음을 보여주는 사례인 것이다.

'과학과 인정'은 당시 말라가 지역 미술전(Exposición Provincial de Málaga) 금메달을 수상했으며 마드리드 순수예술전(Exposición General de Bellas Artes in Madrid)에서 선외 가작(Honorable Mention)으로 선정되었을 만큼 빼어난 작품성을 인정받았던 수작이다.

이 작품은 말라가에서 전염병이 유행하던 시기 피카소가 그린 질병 관련 주제의 세 작품 중 하나다. (시리즈의 남은 둘로 1894년작 '환자(The Sick Woman)'와 1899년작 '마지막 순간(Last Moments)'이 있다). 1895년 피카소가 애정하던 여동생 콘치타가 일곱살 어린 나이에 디프테리아로 세상을 떠났고 또 다른 어린 여동생도 콜레라로 목숨을 잃었다.

디프테리아와 박테리아가 처음 발견된 것은 1883년으로, 1884년 실험실 배양을 실시한 지 수년이 지난 1888년 항독소(치료제) 개발이 이뤄졌다. 동물실험으로 효과를 확인한 것은 1890년, 사람에도 유효함을 확인한 것이 1891년이며 1895년에 상용화됐다. 그러나 당시 디프테리아 항독소는 부유한 가정이나 구할 수 있는 고가의 치료제였고, 경제적으로 넉넉치 못했던 피카소 가족은 콘치타의 생명을 살릴 수 없었다. (그는 후일 한 판화작품 뒤에 이런 글귀를 남기기도 했다. “누구나 생의 끝에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 다만 부유한 이는 마차를 타고 가고 가난한 이는 걸어서 간다는 차이가 있을 뿐.” )1) 이러한 개인적 경험이 피카소로 하여금 병, 환자, 의사, 치료 등의 의학적 주제에 관심을 갖게 했을 것이다.

피카소의 '과학과 인정'은 병상에 누워있는 환자인 여성을 중심으로 좌우에 각각 의사와 수녀를 배치해 이들의 세계가 과학의 영역과 인정의 영역으로 양분돼 있음을 보여준다.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태도로 병증을 다루고 있는 의사는 표준시간 단위를 확인할 수 있는 시계에 시선을 고정한 채 환자의 손목에서 맥박을 재고 있는데 환자와 시선 교환 등의 정서적 교류를 일체 하지 않는 모습이다.

토마스 쿠튀르의 '병든 광대'(그림 2)와 같은 예시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환자로부터 고개를 돌린 채 진료하는 의사의 도상은 실증주의적 태도와 감정적 무관심을 동일시함으로써 과학적 권위를 부여하는 의도로 종종 사용되던 것이다. 피카소가 참조한 걸로 알려진 스페인 작가 루이스 아란다의 '병동 회진'(그림 3) 또한 유사한 도상을 보여준다.

잿빛 피부색의 환자 주변에 있는 정장 입은 남성 무리는 회진을 도는 의사와 수련생들이다. 담당의는 환자의 등쪽에서 숨소리를 듣고 있고 환자의 정면 앞치마를 한 간호사들 너머 수련의들은 환자의 병세를 관찰하거나 상태를 꼼꼼히 기록하고 있는데, 의사들은 모두 병증 자체를 과학적으로 대하고 있을 뿐 그 누구도 환자의 표정을 살피는 법이 없다.
[도판 2] 토마스 쿠튀르, <병든 광대>, 19세기(상세연도 미상) Photo © President and Fellows of Harvard College
[도판 2] 토마스 쿠튀르, <병든 광대>, 19세기(상세연도 미상) Photo © President and Fellows of Harvard College
[도판 3] 루이스 히메네즈 아란다, <병동 회진>(1889), 스페인 세비야 미술관
[도판 3] 루이스 히메네즈 아란다, <병동 회진>(1889), 스페인 세비야 미술관
그런데 피카소는 이와 더불어 연민, 공감, 인정을 갖고 환자를 돌보는 수녀의 모습을 그려 넣었다. 환자는 힘이 없는 상황에서도 힘들게 눈을 떠 자신의 아이의 안위를 확인하고 싶어한다. 수녀는 한손으로 그녀의 아이를 번쩍 들어 아이 어머니에게 보여주면서 따스한 미소로 환자를 안심시키는 한편 다른 손으로는 증세 완화에 도움이 될만한 따뜻한 음료를 권하고 있다.

환자나 보호자에게 정서적 안정감을 제공하는 존재로 수녀를 등장시키는 것은 또 다른 스페인 화가인 파테르니나의 '병상을 찾은 어머니'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라는 기록이 있다. 피카소의 유능한 지점은 자신이 참조한 도상들을 한 화면에 대비, 공존시킴으로써 환자의 회복을 위해서는 병을 진단하고 치료하기 위한 과학적 접근과 환자의 상태와 감정에 대한 관찰을 바탕으로 한 세심한 정서적 돌봄이 균형있게 제공돼야 함을 주장하는 데 있다.
[도판 4] 엔리케 파테르니나, <병상을 찾은 어머니>(1892) 캔버스에 유화, 스페인 프라도 미술관
[도판 4] 엔리케 파테르니나, <병상을 찾은 어머니>(1892) 캔버스에 유화, 스페인 프라도 미술관
15세의 피카소가 '과학과 인정'을 통해 제안한 좋은 의료의 방향성은 현대 의학에서도 유의미하게 작동한다. 전통적인 의료문화는 ‘질병 중심’으로, 의사가 대화를 주도하고 환자 진료에 대한 모든 결정을 내리는 방식이었는데, 그 과정에서 많은 환자와 보호자들은 다양한 부정적인 경험을 하고 불만을 표현해왔다. 이를테면 의사가 환자를 물건처럼 취급하고 존중하지 않는다거나, 환자의 상태나 치료계획, 예후에 대한 설명이 부족한 것, 의료진의 실수를 감추려는 것 등이 그 불만에 해당한다.

이를 개선하기 위해 ‘환자 중심 의료’의 가치가 점점 주목받고 있다. ‘환자 중심성’이란 환자 개인의 선호, 필요와 가치를 존중하고 그에 맞는 진료를 제공하며 임상적 의사결정에 환자의 가치가 보장되도록 하는 것을 말한다. 이는 얼핏 들으면 마치 도덕교과서와 같은 추상적이고 공허한 개념으로 느껴져서 의학계에서 일부 반감이 있기도 하지만, 의료인은 환자와 가족의 선택을 존중해야 하고, 정보를 공유하며, 돌봄과 의사결정에 그들이 참여할 수 있게 함으로써 보다 좋은 결과를 도출할 수 있다는 공감대가 점차 형성되고 있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 의사는 지식적인 측면을 더 발전시켜야 하고 (과학의 영역에서 의사의 이미지), 공감과 소통 능력을 통해 다양한 치료 선택을 제시하고 최선의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하는데(인정의 영역에서 간호사나 수녀의 이미지), 현대 의학에서 의사에 이 모든 걸 요구하는 건 힘든 일이 될 수도 있겠다. 하지만 환자를 단순히 ‘병을 가진 사람’으로 보는 전통적 시선을 버리고, 병이 있기 전의 신체적, 정신적 안녕한 상태를 되찾아야 할 필요가 있는 사람으로 보려는 노력을 통해 진정한 인술(仁術)을 실현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1) John Richardson, Marilyn McCully, A Life of Picasso, Vol. 1: The Early Years, 1881-1906, Random House, 1st ed. 1991, p. 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