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 전쟁은 언제 끝이 날까요… 연극 ‘더 정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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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김상우의 아주 사적인 연극일기
처음 가보는 극장인 ‘연희예술극장’ 에서 관람한 연극 '더 정글'은 실제로 프랑스 칼레에 있었던 난민촌을 소재로 한 작품이다. 극작가 조 머피와 조 로버슨은 이 난민촌에 들어가 2년간 생활하며 작품을 썼고 무대에 올려 지난 2018년 2019년 런던과 뉴욕 연극계로부터 극찬을 받았다. 가디언지와 선데이 타임즈는 이 작품이 “다른 문화, 다른 인종, 다른 역사에 대한 편견을 버리고 ‘난민’이라는 집단을 사실적인 눈으로 다시 볼 수 있게 만들어 준 수작으로, 지구 전체가 함께 풀어야 하는 위기에 대해 ‘인간성’, ‘공존’, 그리고 ‘이해’에 가까이 가도록 하는 최고의 작품” 이라고 평가했다. 우리나라에서는 극단 ETS 가 지난 2020년에 초연했으며 이번이 두 번째 공연이다. 김혜리 연출이 예술감독도 맡고 있는 ETS는 그동안 연극을 통해 공존, 다양성, 인간애의 주제를 다뤄왔으며 매 작품의 완성도도 뛰어나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극단이기도 하다.
1부에서는 등장 인물들이 ‘정글’이라 불리는 난민촌에 어떻게 모이게 되었는지를 설명한다. 수단, 시리아,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에리트리아, 팔레스타인, 이란, 이라크, 예맨, 크루드스탄에서 탈출한 사람들은 아무것도 없는 황량한 칼레 지역에 마련된 난민캠프에 집을 짓고 식당을 만들고 학교를 세운다. 여기에 영국에서 온 자원봉사자들이 그들과 부대끼며 생활한다 무대가 T자 형태로 중앙에 놓여있고 객석이 그 주위를 둘러싸도록 배치해서 배우들이 바로 내 옆에서 소리치고 뛰어다니니 나도 마치 난민캠프에 함께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난민들은 이 곳에서 벗어나 영국으로 가기 위해 프랑스 국경을 넘는 트럭에 뛰어들어 몰래 타는 것을 ‘트라이’ 라 부르며, 무사히 밀입국에 성공하는 것을 ‘굿챈스’라 한다. 어느날 ‘트라이’를 하는 과정에서 이 곳 레스토랑에서 일하는 노를라가 차에 치어 죽는 일이 생긴다. 난민들끼리의 갈등은 끝이 없고, 자원봉사자들과도 충돌한다. 온갖 국적의 사람들이 대화하고, 통역하고, 소통하는 설정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데시벨이 높아지고 배우들의 고함과 절규가 끊임없이 이어져 사실 보는 동안 내내 몸이 힘들었다. 연극 배우는 극한직업이라는 사실을 새삼 재확인하기도. 그런데, 이 연극이 초연된 것은 2018년이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이 발발하기 전이고, 최근 이스라엘과 하마스 전쟁도 터지기 이전이다. 연극처럼 난민 캠프에 있게 된 사람들의 사정도 딱하지만 그래도 저들은 한몸 뉘기라도 하지 지금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상황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하다. 가자지구의 누적 사망자수는 만오천명을 넘어섰고 이 중 어린이의 숫자가 40%가 넘는 6천여명이다. 이스라엘은 민간 병원까지 공습 폭격하여 환자를 치료하지도 못할 뿐 아니라 마취 없이 제왕절개, 두개골 수술을 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무대에서 배우들이 난민촌의 문제로 악을 쓰고 동분서주해도 내 머릿속에는 하마스에게 납치 후 살해된 이스라엘 여성, 이스라엘의 폭격으로 희생된 팔레스타인 민간인들의 모습이 더 강렬하게 떠올랐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의 수도인 키이우를 침공한 작년, 그 아름다운 도시가 파괴되고 민간인이 학살당할 때에도 한동안 우울감에 시달렸다. 지구 반대쪽의 일이라고 어떻게 아무렇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전쟁에서는 그 잔인무도한 살육의 리포트에 눈물이 났다. 혹자는 나를 보고 정작 주위 사람들에게는 무관심하면서 다른 나라의 일에 슬퍼하는 모습이 위선적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전쟁은 다른 어떤 일상적인 사건과도 비교할 수 없는 비극이다. 전쟁은 공격하는 쪽이든, 방어하는 쪽이든 인간으로서의 윤리, 도덕은 물론 최소한의 인간성까지 말살시킨다. 인종과 민족을 떠나 그 참상에 비통해 하고 지구상에서 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해 작은 목소리라도 내야 한다. 뉴욕, 런던, 파리 등에서는 전쟁을 비판하는 시위가 연일 이어지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이 이슈에 대해 너무나 조용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1990년대 걸프전을 TV 중계로 보기 시작하며 다른 나라의 전쟁 모습을 안방에서도 볼 수 있게 되었다. 지금은 트위터 등의 소셜미디어를 통해 스마트폰으로도 팔레스타인 등의 소식을 더욱 구체적이고, 생생하게 볼 수 있게 되었지만 그것에서 비롯된 슬픔과 분노가 반전 여론을 형성하는 동력에 이르진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어쩌면 우리는 수많은 정보의 홍수 속에서 이제 전쟁의 참극도 하나의 볼거리로 여기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이제 현실이 연극, 드라마보다도 더 자극적이고 엽기적이며 상상 초월인 세상이 되었다. 이 시대의 희곡, 드라마 작가들은 참으로 난감할 것이다. 사람들은 왠만한 스토리, 심지어 저 비참하고 비인간적인 난민캠프의 이야기에도 어느 정도 무감각해진 것 같다.
‘더 정글’ 2부에서는 난민촌을 철거하는 내용이 나오는데 실제로 프랑스 정부는 난민들의 생활을 개선하고 지역 질서를 바로 잡겠다는 명분으로 칼레의 ‘정글’을 철거했으나 다른 지역에서 그 인원들을 온전히 수용하지 못해 갈 곳 없어진 난민들이 여전히 칼레를 떠돌며 지역 주민들과 마찰을 빚고 공권력으로부터 폭력을 당하고 있다고 한다. 아무리 딱한 사정이라 하더라도 난민을 받아들이는 문제에 님비 현상이 없을 수 없다. 이 작품의 배경이 된 프랑스와 영국에서도 마지못해 난민을 수용했다
그러나 독일의 난민 정책은 조금 달랐다. 독일은 난민에게 국경을 개방하고 100만명 가량의 난민을 받아들였으며 난민 관련 예산도 두 배로 늘렸다. 이를 창조 경제의 기회로 만들어 난민을 대상으로 할 3만여명의 자국민 독일어 교사를 뽑았다. 그렇다 해도 물론 쉽지 않은 문제이다. 기본적으로 이들을 장기적으로 수용하려면 천막이 아닌 많은 수의 주택이 필요할 것이며, 경제력 없는 난민들의 주거 지역은 슬럼화되어 범죄의 온상이 될 수도 있다. 대놓고 이들을 공격하려는 인종차별 주의자들도 있다. 그러나 인류애를 전제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정하면 그 원칙을 우선으로 삼는 것이다. 그것은 결국 옳고 그름에 관련한 선택의 문제이다. 연극에서 인상적인 것은 영국의 자원봉사자들이었다. 베스, 샘, 폴라, 데릭. 그들은 고향의 따뜻한 잠자리를 그리워하면서도 ‘정글’에서 난민과 함께 하는 삶을 ‘선택’ 한다. 단순하게 판단할 순 없지만 난민을 대하는 자세에서도 개인과 국가의 품격이 드러난다. 우리나라는 어떠한가? 지난해 대구에서는 난민촌이 아니라 정당한 절차를 거쳐 건립될 이슬람 사원의 현장 앞에서 주민들이 일부러 이들이 금기시하는 돼지고기 바베큐 파티를 열었다. 이 장면을 보며 같은 인간으로서 자괴감을 느꼈다. 세계에서 가장 심각한 인구감소 위기를 겪으면서도 몽골, 동남아 등에서 온 이민자들을 배척하고 차별하는 마당에 우리나라는 아직 난민을 보듬을 넉넉함은 갖추지 못한 듯 하다. 잊고 있을 때가 많은데 대한민국은 종전 국가가 아닌 휴전 국가이다. 최근 뉴스에 의하면 북한은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발사하고 9.19합의로 파괴했던 GP를 복원 후 중화기를 반입했다고 했다. 당장 우리 정부는 북한 무장에 상응한 조치를 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잠재적 난민인 것이다.
1부에서는 등장 인물들이 ‘정글’이라 불리는 난민촌에 어떻게 모이게 되었는지를 설명한다. 수단, 시리아,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에리트리아, 팔레스타인, 이란, 이라크, 예맨, 크루드스탄에서 탈출한 사람들은 아무것도 없는 황량한 칼레 지역에 마련된 난민캠프에 집을 짓고 식당을 만들고 학교를 세운다. 여기에 영국에서 온 자원봉사자들이 그들과 부대끼며 생활한다 무대가 T자 형태로 중앙에 놓여있고 객석이 그 주위를 둘러싸도록 배치해서 배우들이 바로 내 옆에서 소리치고 뛰어다니니 나도 마치 난민캠프에 함께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난민들은 이 곳에서 벗어나 영국으로 가기 위해 프랑스 국경을 넘는 트럭에 뛰어들어 몰래 타는 것을 ‘트라이’ 라 부르며, 무사히 밀입국에 성공하는 것을 ‘굿챈스’라 한다. 어느날 ‘트라이’를 하는 과정에서 이 곳 레스토랑에서 일하는 노를라가 차에 치어 죽는 일이 생긴다. 난민들끼리의 갈등은 끝이 없고, 자원봉사자들과도 충돌한다. 온갖 국적의 사람들이 대화하고, 통역하고, 소통하는 설정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데시벨이 높아지고 배우들의 고함과 절규가 끊임없이 이어져 사실 보는 동안 내내 몸이 힘들었다. 연극 배우는 극한직업이라는 사실을 새삼 재확인하기도. 그런데, 이 연극이 초연된 것은 2018년이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이 발발하기 전이고, 최근 이스라엘과 하마스 전쟁도 터지기 이전이다. 연극처럼 난민 캠프에 있게 된 사람들의 사정도 딱하지만 그래도 저들은 한몸 뉘기라도 하지 지금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상황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하다. 가자지구의 누적 사망자수는 만오천명을 넘어섰고 이 중 어린이의 숫자가 40%가 넘는 6천여명이다. 이스라엘은 민간 병원까지 공습 폭격하여 환자를 치료하지도 못할 뿐 아니라 마취 없이 제왕절개, 두개골 수술을 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무대에서 배우들이 난민촌의 문제로 악을 쓰고 동분서주해도 내 머릿속에는 하마스에게 납치 후 살해된 이스라엘 여성, 이스라엘의 폭격으로 희생된 팔레스타인 민간인들의 모습이 더 강렬하게 떠올랐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의 수도인 키이우를 침공한 작년, 그 아름다운 도시가 파괴되고 민간인이 학살당할 때에도 한동안 우울감에 시달렸다. 지구 반대쪽의 일이라고 어떻게 아무렇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전쟁에서는 그 잔인무도한 살육의 리포트에 눈물이 났다. 혹자는 나를 보고 정작 주위 사람들에게는 무관심하면서 다른 나라의 일에 슬퍼하는 모습이 위선적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전쟁은 다른 어떤 일상적인 사건과도 비교할 수 없는 비극이다. 전쟁은 공격하는 쪽이든, 방어하는 쪽이든 인간으로서의 윤리, 도덕은 물론 최소한의 인간성까지 말살시킨다. 인종과 민족을 떠나 그 참상에 비통해 하고 지구상에서 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해 작은 목소리라도 내야 한다. 뉴욕, 런던, 파리 등에서는 전쟁을 비판하는 시위가 연일 이어지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이 이슈에 대해 너무나 조용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1990년대 걸프전을 TV 중계로 보기 시작하며 다른 나라의 전쟁 모습을 안방에서도 볼 수 있게 되었다. 지금은 트위터 등의 소셜미디어를 통해 스마트폰으로도 팔레스타인 등의 소식을 더욱 구체적이고, 생생하게 볼 수 있게 되었지만 그것에서 비롯된 슬픔과 분노가 반전 여론을 형성하는 동력에 이르진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어쩌면 우리는 수많은 정보의 홍수 속에서 이제 전쟁의 참극도 하나의 볼거리로 여기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이제 현실이 연극, 드라마보다도 더 자극적이고 엽기적이며 상상 초월인 세상이 되었다. 이 시대의 희곡, 드라마 작가들은 참으로 난감할 것이다. 사람들은 왠만한 스토리, 심지어 저 비참하고 비인간적인 난민캠프의 이야기에도 어느 정도 무감각해진 것 같다.
‘더 정글’ 2부에서는 난민촌을 철거하는 내용이 나오는데 실제로 프랑스 정부는 난민들의 생활을 개선하고 지역 질서를 바로 잡겠다는 명분으로 칼레의 ‘정글’을 철거했으나 다른 지역에서 그 인원들을 온전히 수용하지 못해 갈 곳 없어진 난민들이 여전히 칼레를 떠돌며 지역 주민들과 마찰을 빚고 공권력으로부터 폭력을 당하고 있다고 한다. 아무리 딱한 사정이라 하더라도 난민을 받아들이는 문제에 님비 현상이 없을 수 없다. 이 작품의 배경이 된 프랑스와 영국에서도 마지못해 난민을 수용했다
그러나 독일의 난민 정책은 조금 달랐다. 독일은 난민에게 국경을 개방하고 100만명 가량의 난민을 받아들였으며 난민 관련 예산도 두 배로 늘렸다. 이를 창조 경제의 기회로 만들어 난민을 대상으로 할 3만여명의 자국민 독일어 교사를 뽑았다. 그렇다 해도 물론 쉽지 않은 문제이다. 기본적으로 이들을 장기적으로 수용하려면 천막이 아닌 많은 수의 주택이 필요할 것이며, 경제력 없는 난민들의 주거 지역은 슬럼화되어 범죄의 온상이 될 수도 있다. 대놓고 이들을 공격하려는 인종차별 주의자들도 있다. 그러나 인류애를 전제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정하면 그 원칙을 우선으로 삼는 것이다. 그것은 결국 옳고 그름에 관련한 선택의 문제이다. 연극에서 인상적인 것은 영국의 자원봉사자들이었다. 베스, 샘, 폴라, 데릭. 그들은 고향의 따뜻한 잠자리를 그리워하면서도 ‘정글’에서 난민과 함께 하는 삶을 ‘선택’ 한다. 단순하게 판단할 순 없지만 난민을 대하는 자세에서도 개인과 국가의 품격이 드러난다. 우리나라는 어떠한가? 지난해 대구에서는 난민촌이 아니라 정당한 절차를 거쳐 건립될 이슬람 사원의 현장 앞에서 주민들이 일부러 이들이 금기시하는 돼지고기 바베큐 파티를 열었다. 이 장면을 보며 같은 인간으로서 자괴감을 느꼈다. 세계에서 가장 심각한 인구감소 위기를 겪으면서도 몽골, 동남아 등에서 온 이민자들을 배척하고 차별하는 마당에 우리나라는 아직 난민을 보듬을 넉넉함은 갖추지 못한 듯 하다. 잊고 있을 때가 많은데 대한민국은 종전 국가가 아닌 휴전 국가이다. 최근 뉴스에 의하면 북한은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발사하고 9.19합의로 파괴했던 GP를 복원 후 중화기를 반입했다고 했다. 당장 우리 정부는 북한 무장에 상응한 조치를 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잠재적 난민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