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네이버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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켄 윌버의 <무경계>를 읽다가 영화 '설국열차'가 떠올랐다. 기상 이변으로 얼어붙은 지구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생존자를 태운 기차 속 빈민굴 같은 꼬리 칸과 호화로운 앞쪽 칸은 계급의 경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치다. 소유와 집착은 정신과 물질의 경계를 만들고 궁극에는 파멸을 불러오는데, 왜 우리는 경계를 긋고 살아가는가. 나는 어디에 경계를 두고 있는가.

돌이켜보면 커트라인에 들어가려고 애쓰는 삶의 연속이었다. 교복을 입던 시절에는 내신 등급에 시달렸고, 캠퍼스를 누리던 시절에는 학점과 싸웠고, 취업 문턱을 통과하자마자 고과를 마주해야 했다. ‘생존선’에 얽매이는 체질은 아닌지라 야간 자율 학습 시간에 교문 밖으로 도망치기도 했고, ‘기승전취업’에 매진하기보다 글 쓰는 삶을 살기도 했고, 몇 년간 잘 다니던 회사에 사표를 내고 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어릴 때부터 나는 경계선에 서 있을 때마다 거리낌이 있었다. 너와 나를 구분하고 약자와 강자를 나누고 인간과 자연을 구분하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성공하려면 줄을 잘 타야 한다는 조언, 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말들도 불편했다. 한데 경계를 긋고 사는 것도 나쁘지만은 않았다. 굽은 팔 안쪽에 있으면 안정감이 느껴졌고, 적을 만들어 한쪽 편에 있으면 소속감이 생겨 외롭지 않은 적도 있었기 때문이다.

경계를 긋고 살면 편하다. 그런데 그 경계로 내가 행복한지는 의문이다. 하늘과 땅, 남자와 여자, 사람과 동물, 과거와 현재, 위와 아래 등 경계를 설정하면서 그에 따른 신념과 감정이 생겨났다. 그로 인해 인간은 불행해지지 않았는가. 인간이 나눈 선에 인간이 걸려 넘어지고 의식의 영토는 좁아지지 않았는가. 문명의 여명기 이후 영토를 넓히기 위해 세계는 투쟁했고 결말은 참혹하지 않았는가. 지금도 진보와 보수는 서로에게 칼을 겨두고, 국가와 국가 간의 소리 없는 전쟁이 계속되고 있다.

나와 우리의 불행은 경계를 설정하여 양극단을 만드는 데에서 비롯한다. 한쪽만 추구하고 다른 쪽을 회피하려는 생각이 나와 우리를 괴롭힌다. 사실 양극단은 존재하지 않고 내가 만들어낸 허상에 불과하다. 켄 윌버는 “자신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그 어느 것도’ 진정한 나, 아는 나, 내면의 나”가 아니라고 말한다. 이것은 지각되거나 정의할 수도 없다.
이미지 출처: mindboo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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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어떻게 행복해지고 궁극의 의식상태에 도달할 수 있을까? 나라는 개체를 확장해야겠다. 내 안에 있는 그림자를 인식하는 수준을 넘어서 나라고 생각하는 존재에서 ‘초아자적인’ 모습을 넘어서 합일의식을 깨우쳐야겠다. 켄 윌버는 “괴로움을 판단하지 않고, 회피하거나, 각색하거나, 합리화하지 않고 단순히 그것을 자각”하는 태도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페르소나와 그림자, 자아와 신체, 전유기체와 환경으로 구분되는 경계선을 넘어서 합일의식까지 확장될 때 삶은 풍요로워진다.

“부분이란 없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우리는 전체로 하강하게 된다. 지금 이 순간 ‘내가 없다’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 우리는 자신의 진정한 정체는 언제나 지고의 본성임을 알게 된다. 언제나 현존하고 있는 무경계 자각의 빛 속에서는 한때 ‘내면의 고립된 나’라고 상상했던 그것이 저 밖의 우주와 하나가 된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당신이다.”

분별심이 생길 때 나는 <무경계>의 문장을 읽는다. 저항하는 일체를 내려놓는다. 무경계에 도달하지는 못해도 경계를 확장하는 삶을 살자고 다짐해본다. 경계가 넓어지고 의식이 확장되면 낮고 작고 좁은 것들을 더 품을 수 있는 사람이 되겠다. 그로 인해 내 삶은 더 풍요로워지겠다. 함민복 시인은 그의 시 '꽃'에서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라고 썼다. 우주에 사는 모든 것에 경계는 없고 꽃만 있을 뿐이다.
경계를 긋고 살면 과연 편하기만 할까...켄 윌버의 <무경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