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 판결로 '살균제-질환 인과성' 부인된 피해자도 배상 길 열려
문제 드러난 지 12년 해결은 '요원'…가해기업들, 소송 내며 분담금 지급 미뤄
가습기살균제 배상범위 넓어졌다…정작 가해기업은 '책임 회피'
9일 대법원의 가습기살균제 관련 판결은 폐 질환과 살균제 간 인과관계를 인정받지 못한 피해자가 위자료를 받을 길이 열렸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판결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가습기살균제 업체들이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분담금 지급을 차일피일 미루고 있어 피해자에 대한 완전한 보상은 아직 요원한 실정이다.

◇ 정부 인과성 판단, '절대적 기준' 아니게 돼
이날 대법원 1부는 가습기살균제 사용 후 폐 질환과 관련해 정부 조사에서 '3단계'로 판정받은 김모 씨가 살균제 제조·판매사 옥시레킷벤키저(옥시) 등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 상고심에서 김씨에게 500만원 위자료 지급을 명한 원심을 확정했다.

3단계는 '가습기살균제로 인한 폐 질환 가능성이 작다'라고 판정된 경우다.

3단계 판정자는 '가능성이 거의 없음'을 뜻하는 4단계 판정자와 함께 초기 정부 지원금 대상에서 제외됐다.

정부가 인과성을 부인한 만큼 기업에서도 배상받지 못했다.

옥시도 정부가 폐 질환과 가습기살균제 간 인과성을 인정한 1단계와 2단계 피해자에겐 배상했지만, 3단계와 4단계 판정자에 대해선 별다른 조처를 하지 않았다.

피해 인정 범위를 넓히고 현행 배상체계를 규정한 가습기살균제피해구제법 시행 직전인 2020년 4월 기준으로 3단계와 4단계 판정자는 5천83명이다.

당시까지 정부로부터 피해를 조사받고 판정받은 사람(5천725명)의 90%에 가까웠다.

2020년 4월까지 정부로부터 폐 질환과 가습기살균제 인과관계를 인정받은 사람(1단계와 2단계 판정자)은 488명에 그쳤다.

가습기살균제 배상범위 넓어졌다…정작 가해기업은 '책임 회피'
3단계와 4단계 판정자에게도 기업이 배상해야 한다는 목소리는 계속 나왔다.

특히 3단계와 4단계 판정자도 폐 질환과 가습기살균제 간 연관성이 확인된다는 연구 결과가 나오면서 배상을 요구하는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인하대병원 직업환경의학교실 임종한 교수팀은 지난 2019년 9월 3단계와 4단계 판정자 중 간질성 폐렴 환자가 하루에 가습기살균제를 9~11시간 또는 14~24시간 사용한 경우 8시간 미만 사용자보다 폐 섬유화가 일어날 위험이 각각 4.54배, 9.07배까지 치솟는다는 추산을 담은 연구 결과를 국제 학술지에 게재했다.

대법원은 이날 정부의 3단계 판정은 "가습기살균제로 인한 말단 기관지 부위 중심 폐 질환 가능성을 판정한 것일 뿐"이라면서 질환 발생·악화와 가습기살균제 인과관계는 "사용자의 구체적인 증명에 따라 유무가 달라질 수 있다"라고 설명했다.

가습기살균제가 질환의 원인인지를 판단할 때 정부의 판정이 '절대기준'은 아니라는 의미로 풀이된다.

3단계와 4단계 판정자들이 과거 정부 판정에 구애받지 않고 소송을 제기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환경보건시민센터는 위자료 배상이 인정된 점에 주목했다.

센터는 "병원비만 지원하는 구제를 넘어 정신적, 경제적 피해에 대해 위자료를 포함한 배·보상을 해야 한다는 의미가 담긴 판결"이라고 밝혔다.

가습기살균제 배상범위 넓어졌다…정작 가해기업은 '책임 회피'
◇ 문제 드러난 지 12년 해결은 '요원'…기업들, 분담금 지급 미뤄
이번 판결로 현행 가습기살균제피해구제법에 따라 피해를 인정받고 '구제급여'를 받은 피해자가 추가 소송에 나설 가능성은 작아 보인다.

가습기살균제피해구제법과 민법에 따르면 법원이 손해배상액을 정할 때 구제급여로 받은 만큼은 제외하게 돼 있기 때문이다.

구제급여는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나 유족에게 '손해배상청구권 대위'를 전제로 지급된다.

재원은 가습기살균제·원료물질 사업자 분담금이다.

가습기살균제 문제는 2011년 불거졌다.

당시 급성호흡부전 환자가 잇달아 발생했는데, 가습기살균제를 자주 사용한 영유아와 임산부, 기저질환자 등에게 폐섬유증이 생긴 것으로 조사돼 이슈화됐다.

가습기살균제 주성분인 폴리헥사메틸렌구아니딘(PHMG)과 염화에톡시에틸구아니딘(PGH) 등은 '정부 유해성 심사 대상'에서 제외되거나 흡입독성 평가를 거치지 않은 채 20년 가까이 판매됐다.

이 물질들은 피부에 닿을 땐 문제가 되지 않지만, 흡입하면 위해성을 지니는 것으로 추후 밝혀졌다.

지난달 31일 기준 정부로부터 피해를 인정받은 피해자만 7천877명이다.

피해자 가운데 이미 유명을 달리한 사람이 1천835명에 달한다.

문제가 세상에 알려진 지 12년이 지났지만, 아직 해결은 요원하다.

환경부가 올해 초 피해자 구제급여를 위한 사업자 분담금을 재부과했을 때도 옥시 등 일부 기업은 법상 납부 기한이 임박해서야 겨우 돈을 냈다.

이후 옥시는 '앞으로는 분담금을 낼 수 없다'라고 환경부에 통보했고, 애경산업은 낸 분담금을 돌려달라며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민간기구인 가습기살균제 피해구제를 위한 조정위원회가 작년 3월 조정안을 내놨지만, 조정안에 따른 피해구제액 60%를 분담해야 하는 옥시와 애경이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조정위를 통한 해결은 무산됐다.

옥시와 애경은 문제의 '종국적 해결'과 '원료물질 생산자 추가 분담'을 요구한다.

다만 조정안 등으로 합의된 금액을 지급하면, 미래에 확인되는 피해까지 포함해 기업에 더는 책임을 묻지 말자는 '종국성 요구'는 법 원칙에 어긋난다는 지적이 나온다.

원료물질 생산자가 더 책임져야 한다는 주장을 두고는 옥시 등 가습기살균제 사업자와 SK케미칼 등 원료물질사업자가 첨예하게 대립 중이다.

이에 가습기살균제 원료물질인 클로로메틸아이소티아졸리논(CMIT)과 메틸아이소티아졸리논(MIT)이 유해하다는 것을 알면서 가습기살균제를 만들어 판매한 혐의로 기소된 SK케미칼과 애경 전직 임원들 2심 선고가 주목된다.

이들은 1심에서 'CMIT와 MIT가 폐 질환을 유발한다고 입증되지 않았다'라는 이유로 무죄를 선고받았는데, 이 판결 이후 CMIT와 MIT가 폐 질환을 일으킬 수 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PHMG와 PGH로 만든 가습기살균제를 판 옥시는 임직원들이 앞서 업무상 과실치상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SK케미칼과 애경 전직 임원들이 2심에서 유죄가 선고되면 피해자 배상에서도 두 기업이 더 책임져야 한다는 주장에 힘이 실릴 수 있다.

2심 선고는 내년 1월 11일로 예정돼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