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는 이 글이 불편할 지 모르겠다. 그래도 이제는 한번쯤 짚고 싶어진다. 대규모 미술 축제로 한동안 서울이 들썩였다. 미술 주간이 지정되고 화려한 파티까지 열려 우리가 이렇게나 예술을 사랑하는 민족이었단 말인가 의아하고 신기했다. 물론 멋진 일이다. 근사한 일이고. 예술을 향유하는 사회라니 그 얼마나 유연하고 긍정적이겠나. 수많은 다양성을 인정하고 포용하는 게 예술이니까.

그러나 가슴 한켠 뜨끔해진다. 외연의 성장만큼 과연 내면도 성숙했나? 단순히 몇명이 왔다 갔다, 얼마가 팔렸다로 우리의 수준을 가늠할 수 있는걸까. 수많은 아트페어와 유명 전시들, 수두룩한 그림들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보았을까, 어떻게 느꼈을까. 남들이 가니 우르르 쫓아간 것은 아닐까. 트렌디한 나를 현시하고픈 욕망은 아니었을까. 그림 앞에서 더 멋진 셀카를 찍어 올리고픈 욕심은 아니었을까.
한국국제아트페어(KIAF) 서울
한국국제아트페어(KIAF) 서울
그게 어떻다고! 그래서 어쩌라고! 그렇다. 그것도 맞는 말이다. 이유야 어떻든 예술의 바다에서 신나게 유영하던 잠수하던 그건 자유니까. 찰랑거리며 노는 것도, 심연 속으로 천착하는 것도 전부 선택일 뿐이다. 그리고 그 모든 예술에의 선택은 이미 탁월함을 지니고 있는 것도 분명한 일이고. 다만 자본주의 예술 축제가 너무 화려하고 눈부셔 하루를 성실하게 살아가는 이들에게 더 낯선 무엇이 될까 걱정하는 것이다. 아득한 그들만의 리그처럼 더 멀어질까 염려하는 것이다.

여전히 대다수의 사람들은 예술과 멀다. 전시 한 번 보는 것도 사실은 큰 일이다. 큰 맘 먹고 시간을 빼야하고, 또 가서도 무엇을 어떻게 느껴야 하는지 잘 모르는 채 빙빙 돌다 온다. 그래도 전시 보러간 게 어디예요! 기특해 박수쳐드린다. 하지만 언제까지 그럴 순 없다. 예술을 SNS 사진 업로드 소재로만 쓰기엔 너무 아깝다. 그림 한 점 안에 무엇이 있는지, 내게로 와서 무엇이 되는지 알면 500배 재밌고 의미 있어진다.

전시를 보러갈 때, 혼자서 가보라. 어쩔 수 없이 누군가 같이 갔다면 뚝 떨어져 걸을 것. 천천히 걷다가 제일 맘에 들어오는 한 점만 찾는다. 그리고 응시한다. 1분, 2분, 3분... 어색함도 잠시, 몰입하면 그림과 나만 남는다. 그리고 그 때 떠오른 단어, 문장을 반드시 기록한다. 그림 앞에 우두커니 멈춰서서 내 삶의 소중한 것들을 천천히 길어올린다.

이번 프리즈 아트페어에서 가슴에 남은 단 하나의 작품은 아니쉬 카푸어 반타블랙이었다. 이 작품은 앞에서 보면 완전한 검정 평면, 옆에서 보면 볼록한 검정 반구체다. 빛을 거의 완전히 흡수하는 검은 물질은 우리의 눈을 속인다. 보이는 게 정말 진실이냐고, 진실은 보이지 않을 수 있다고, 뼈 때리듯 눈과 마음을 사로잡으며 사유를 불러일으킨다. 마침 국제 갤러리에서 아니쉬 카푸어 개인전이 열리고 있어서, 그 다음날로 쫓아갔다. 가히 충격적인 감각의 정점과 맞닥뜨린 기분. 말보다 눈, 눈보다 가슴이다. 직접 보러 가시기를.
© The Guardian
© The Guardian
예술, 이처럼 특별한 것임엔 분명하다. 나도 예술 언저리에서 밥 먹고 살고 있으니. 그러다보니 제대로 함께 누리고 싶은 것이다. 모두 향유자가 되길 바라마지 않는 것이다. 물론 셀카 찍으러 전시회에 가도 된다. 전시회에서 수다만 떨어도 된다. 다만 질문하는 그림 한 점 꼭 찾아내길 바란다. 그 질문 오래 오래 생각하길 바란다. 그렇게 하다 보면 셀카보다 온전히 그림을 담고 싶어질 것이다. 더 정교하게 담고 싶어서 안달하며 사진에 진심일 것이다. 물론 실제의 감동이 제대로 안담긴다며 안타까워할 것이다.

저변이 확대돼야 한다고들 한다. 그렇다면 예술 시장을 말할 게 아니라 예술 광장을 넓힐 일이다. 화려하고 빛나는 명품관이 아니라, 누구라도 즐기고 누릴 수 있는 커다란 열린 광장이 필요한 것이다. 서로 어서 와, 같이 놀자고 할 일이다. 예술로 우리는 질문해야 한다. 당신은 어떤 그림이 말을 걸어왔나요? 그리고 한껏 다정하게 들어야 한다. 바로 그것이 예술로 대화하는 법이다. 예술 향유란 그들만의 리그가 아니다. 내가 들인 귀한 시간과 마음이 만들어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