뱅상 부사르 연출…빨간 야구모자에 검은 가죽점퍼 차림의 오페라
치밀한 동선 설계로 음악의 여백이 지닌 아름다움 표현

빨간 야구모자에 검은 가죽점퍼를 입은 젊은 소프라노 가수가 오페라 연습실로 걸어 들어와 보면대 앞에 앉아 악보를 펼친다.

21일 서울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막을 올린 국립오페라단 '라 트라비아타'의 첫 장면이다.

'축배의 노래'에 늘 등장하던 턱시도와 이브닝드레스 차림의 파티 손님들 대신 동시대의 일상적 인물들이 무대를 채웠다.

국립오페라단은 베르디의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를 19세기 파리에서 우리 시대의 이야기로 옮겼다.

원작은 코르티잔(상류층 남성과 계약을 맺고 부유한 생활을 보장받는 대가로 쾌락을 제공하는 여성) 비올레타와 부르주아 청년 알프레도의 사랑과 이별을 통해 상류층의 이중 윤리를 고발한다는 내용이다.

2018년 '마농', 2019년 '호프만의 이야기' 연출로 국내 관객들의 호평을 받은 프랑스 연출가 뱅상 부사르는 다시 한번 한국 관객들을 강렬하게 사로잡았다.

현대적 연출로 돋보인 음악의 여백…오페라 '라 트라비아타'
부사르가 그린 여주인공 비올레타는 극 중에서도 소프라노 가수로 '라 트라비아타' 리허설에 참여하고 있다.

극중 인물들은 실제 오페라 연습실에서처럼 보면대 앞에 일렬로 앉아 잡담을 나누거나 악보를 분석한다.

'마농'과 '호프만의 이야기'에서 그랬듯 이번에도 여주인공은 때때로 무대 위 그랜드피아노 위에 앉거나 누워서 노래를 부른다.

모든 장면에서 무대를 지키는 피아노는 예술적 창조의 산실이며 무덤인 동시에 금고이자 침대로 기능한다.

부사르의 연출에 종종 수호천사의 모습으로 등장하는 주인공 내면의 자아는 여자 어린이의 모습으로 무대에 나타나 비올레타와 대립하거나 교감한다.

흰옷을 입은 아이는 욕망과 허영에 휘둘리기 전 비올레타의 순수했던 어린 시절을 상징한다.

현대적 연출로 돋보인 음악의 여백…오페라 '라 트라비아타'
치밀하게 짜인 가수들의 동선은 등장인물들의 심리를 정확하게 포착해 관객들에게 전달했다.

무엇보다도 '라 트라비아타'의 음악이 지닌 여백의 아름다움을 확연히 드러냈다.

특히 알프레도의 아버지 제르몽과 비올레타의 긴 이중창이 들어있는 2막 1장의 연출은 인물들의 심리적 거리를 표현하면서 베르디의 극도로 절제된 음악의 효과를 극대화했다.

음악의 구조를 선명하게 보여준 연출이었다.

'오페라 리허설'과 '아버지의 이별 요구'라는 현실의 상황에서 '오페라 공연 상황'으로 넘어간 점도 눈에 띈다.

연출가는 이를 통해 원작에 존재하는 2막 1장과 2막 2장의 단절을 없애는 동시에 현실과 환상의 경계 역시 무너뜨렸다.

요란한 형광 파티 드레스들, 분노한 알프레도가 돈다발을 뿌릴 때마다 반드시 지폐를 주워 챙기는 제르몽, 듀폴 남작, 하녀와 하인은 현대인의 물질에 대한 집착과 깊이 없는 삶의 태도를 재치 있게 드러낸다.

현대적 연출로 돋보인 음악의 여백…오페라 '라 트라비아타'
국내 공연에서 거의 들을 수 없던 몇몇 아리아 후반부를 들려주어 극에 대한 이해를 도운 것은 지휘자 제바스티안 랑 레싱의 공이다.

랑 레싱이 지휘한 경기필하모닉오케스트라는 베르디의 역동적인 리듬과 박진감도 극적으로 살렸다.

특히 고요하고 단순한 음악으로 최고의 효과에 도달하는 부분들에서 경이로운 기량을 선보였다.

덕분에 어떤 '라 트라비아타 공연'보다도 음악이 또렷하고 아름답게 들렸다.

비올레타 역의 소프라노 박소영은 복잡한 동선과 연기를 소화하는 중에도 단어 하나하나의 뉘앙스를 살려가며 비올레타의 기쁨과 절망을 감동적으로 전달했다.

박소영의 뛰어난 음악적 집중력은 관객의 몰입도를 더욱 높였다.

알프레도 역을 노래한 테너 김효종의 미성과 선명한 고음은 서정적인 패시지뿐만 아니라 격렬한 분노를 표현하는 부분에서도 흐트러짐 없이 빛났다.

제르몽 역의 바리톤 정승기는 깊이 있는 곡 해석력으로 관객을 설득하는 데 부족함이 없었다함이 없었다.

특히 비올레타와의 이중창과 아들 알프레도와의 이중창 장면에서 그의 섬세한 연기가 극의 밀도를 높였다.

현대적 연출로 돋보인 음악의 여백…오페라 '라 트라비아타'
조역 가수들도 모두 적역이었고, 메트오페라합창단과 코드공일아트랩 무용수들은 흥미로운 안무를 소화하며 적극적인 연기를 펼쳐 연출 콘셉트를 충분히 살렸다.

적절하게 사용된 배경의 회화적인 영상 역시 음악과 조화를 이루며 관객의 감정선을 끌어올렸다.

2막의 펜트하우스 창밖 풍경, 3막의 구름 영상 배경은 비올레타의 비극적인 죽음을 아름답게 승화시켰다.

공연은 더블 캐스트로 24일까지 계속된다.

현대적 연출로 돋보인 음악의 여백…오페라 '라 트라비아타'
rosina@chol.com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