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많던 상인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성문 밖 첫 동네, 중림동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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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경닷컴 더 라이프이스트
13. 중림시장
13. 중림시장

인근 은행 지점에서는 은행원들이 손수레를 밀며 상인들에게 지폐와 거스름용 잔돈을 바꾸어 주었고, 바빠서 은행에 오지 못하는 상인들의 돈을 예치해 가기도 했다. 아침마다 상인들의 악다구니 소리는 살아있음을 느끼게 하는 효과음처럼 들렸다.
새벽 3시에 열어 오전 10시에 닫는 시장. 겨울에는 생선을 담은 궤짝으로 모닥불을 피우고 삼삼오오 모여 불을 쬤다. 인근 식당에서 배달해 온, 김이 모락모락 나는 음식을 좌판에서 먹는 것은 생의 고달픔을 달래주는 위로였다. 그들 사이를 오가며 믹스커피를 파는 아주머니들, 싱싱한 식재료를 구하기 위해 물건 값을 흥정하는 사람들, 큰소리로 호객하는 사람들로 시장은 북새통을 이뤘다. 장사가 일찌감치 파하면 악다구니는 사라지고 웃고 농담하며 새벽의 피로를 풀었다. 바삐 출근하느라 아침을 못 챙긴 나도 상인들 틈에 끼여 라면이나 국수를 사 먹었다. 값은 모두 천원이었다. 토스트는 계란에 야채를 버무려 철판에 꾹꾹 눌러 속을 만든 뒤, 마가린이 스며 노랗게 된 식빵을 반 접어 그 안에 넣었다. 기호에 따라 설탕이나 케찹을 쳐 주었다. 오전 10시쯤 외근을 위해 회사에서 나오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좌판의 상인들은 모두 사라졌다. 상점이 있는 주인들만 가게를 지켰다. 중림시장은 새벽에만 장사를 하는 도깨비시장이다.
중림 시장의 연원은 조선시대까지 올라간다. 성문 밖 최대의 난전인 칠패시장은 어물이 유통되는 시장이다. 전국 각지에서 마포나루로 올라온 새우젓과 싱싱한 어류들이 성문 밖, 지금의 염천교 근처인 칠패시장으로 모여 들었다. 동대문 밖에도 이현(梨峴), 배오개 시장이 개설되었다. 새벽, 마포에서 새우젓 항아리를 지게에 지고 만리동 고개를 넘어오는 상인들은 동쪽의 해를 받아야 했으므로 이마가 검게 그을렸다. 동대문 밖, 이현에 야채를 공급하는 상인들은 해를 등지고 시장에 오는 바람에 목덜미가 새까맣게 탔다고 한다. 그래서 이 사람이 칠패시장의 상인인지, 이현시장, 배오개의 상인인지 구별이 가능했다.

중림시장은 1975년 노량진에 수산시장이 개설 할 때 따라가지 않고 남은 상인들에 의해 형성된 시장이다. 그러고 보니 중림시장은 조선시대부터 일제 강점기를 지나 해방 이후까지 오랜 기간동안 한 자리를 지킨 고마운 시장이다.
지금은 상황이 어떨까? 차를 몰아 새벽에 시장에 도착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시장은 서부역 맞은편에서 한국경제신문사를 지나 충정로역까지 이어지는 큰 시장이었다. 좌판 사이사이로 냉동 창고며 점포들이 점점히 박혀 있었다. 지금은 그 자리에 커피숍, 맛집들이 들어서 있다. 장안의 3대 설렁탕집이라는 중림장, 외국인들이 소문 듣고 찾아오는 '원조 닭 한 마리'집, 젊은 사람들이 초저녁부터 길게 줄서는 '호수집'이 어시장을 대신해 이곳에 활기를 불어넣고 있다. 호객하는 소리, 상인의 등에 업힌 아기 울음 소리, 왁짜지껄 웃는 소리는 없어진지 오래다. 이곳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은 이 시장이 언제까지 유지될까 걱정하고 있었다. 시인 박인환은 ‘사랑은 가도 옛날은 남는 것’이라고 했다. 그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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