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함을 뒤집어 쓴' 악(惡)에는 답이 없다… 아직까지도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2008)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작가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동명 원작 소설을 영화한 이 작품은 배우 케이트 윈슬렛에게 아카데미 여우주연상까지 안겨주었는데요. 2차 세계대전이라는 혼돈의 시기에 글을 읽을 줄 모르는, 다시 말해 문맹인 한 여인의 기구한 삶과 죽음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아니 어쩌면 유년에 시작된 어느 소년의 순수하고 지고지순한 사랑이야기일 수도 있겠네요. 하지만 저는 문맹의 한 여인에 집중에 보려고 합니다.

전차 검표원으로 일하는 한나는 어느 날 우연히 몸이 아픈 소년을 돌봐주게 됩니다. 낯선 이의 세심한 도움을 받은 소년은 고맙다는 인사를 하러 다시 찾아오고, 십대의 어린 학생이란 사실을 알면서도 글을 모르는 한나에게 학생인 소년 마이클은 호기심의 대상이 되고, 이렇게 두 사람은 함께 만나 사랑을 나누고 함께 책을 읽는 사이가 됩니다. 정확히는 마이클이 책을 한나에게 읽어주고 한나는 마이클의 목소리를 통해 책을 읽습니다.

그렇게 글을 읽을 줄 모르는 여인 한나에 대한 마이클의 마음이 사랑으로 무르익듯, 한나는 소년이 읽어주는 책이야기에 빠져듭니다. 소년은 일찌감치 어른의 사랑에 눈을 뜨고, 한나는 다양한 책을 통해 글자 너머 이야기의 세계에 눈을 뜨게 되죠.

그러던 어느 날 ‘성실’한 한나는 직장에서 사무직으로 승진을 하지만, 문맹이란 사실을 숨기고 있던 한나에게 승진은 곧 해고와 같습니다. 글을 모르는 사람도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떠날 시간이 지금이라고 알려주는 셈이니까요. 한나는 마이클과의 잠시 행복했던 시간을 종료하고 갑작스레 직장에서, 그리고 소년에게서 인사도 없이 떠나갑니다.
'평범함을 뒤집어 쓴' 악(惡)에는 답이 없다… 아직까지도
한참의 세월이 흘러, 한나와 소년은 법정에서 재회하게 되는데요. 한나는 전범죄의 피고인이 되어있었고, 소년은 법대생이 되어 재판을 참관하던 참이었습니다. 그때까지도 한나는 자신의 문맹사실을 용케 숨기고 살았지만 그 덕분에 자신이 책임지지 않아도 될 죄목까지 모두 뒤집어씁니다. 재판에 함께 회부된 무리들이 한나의 사정을 눈치 채고 한 짓이죠. 물론 한나도 알고 있었지만 상황을 변화시킬 생각은 없습니다. 한나를 도와주려던 소년의 도움을 거절하면서까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이 글을 읽을 줄 모른다는 사실을 밝히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한나의 죄는 무엇이었을까요? 한나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가스실로 보내질 유대인을 선별하는 일을 했습니다. 그것이 그녀의 직업이었고, 글을 모르는 한나는 주어진 임무를 마치 매뉴얼처럼 따르며 ‘성실’히 자신의 ‘일’을 했던가 봅니다. 물론 동료들에게 이상해 보이는 행동도 했었는데, 언제 가스실로 끌려갈지 모르는 사람들을 극진히 돌보는가 하면, 하나씩 불러다가 책을 읽어달라고 했다고 하죠.

이런 기이한 행동까지도 또 다른 범죄행위로 인정 됩니다. 하지만 문맹의 한나는 자신의 죄를 경감시키는 것보다 자신이 문맹이란 사실이 알려지는 것이 더욱 두려워, 마치 아무런 죄책감도 없다는 듯 행동하며 모든 잘못을 뒤집어씁니다. 이 장면을 안타깝게 지켜보던 마이클은 그녀를 도와주려고 하지만 결국은 포기하게 됩니다.

또 한참의 세월이 흘러, 우연히 과거 한나에게 읽어주었던 책들을 발견한 마이클은 그때까지도 감옥에 있는 한나를 위해, 그리고 그녀의 진심어린 참회를 이끌어내기 위해 자신이 직접 읽고 녹음한 테이프를 한나에게 보내줍니다. 하지만 마이클의 의도는 엉뚱한 방향으로 전개되며 한나는 이 테이프를 통해 참회 대신 문맹탈출의 동기부여를 얻게 되고 마이클에게 감사편지를 보내지만 끝내 그렇게 많은 독서를 통해서는 참회에 이르진 못합니다.
'평범함을 뒤집어 쓴' 악(惡)에는 답이 없다… 아직까지도
우리 영화 <소리도 없이>의 주인공 태인과 그 영화의 주변 인물들 또한 한나와 비슷한 사람들입니다. 밑도 끝도 없이 그저 ‘성실’하게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하며 사는 사람들이죠. 그 ‘일’이라는 게 불법으로 죽인 사람의 시신을 처리하는 ‘일’, 어린 아이들의 장기밀매를 돕는 ‘일’, 돈을 목적으로 유괴를 돕는 ‘일’일 지라도 말입니다. 그야말로 묵묵히, 그리고 성실히 일한다는 ‘선량한 시민’에게서의 소름끼치는 경험을 이 영화를 보는 내내 하게 되지요.

하지만 이 영화의 주인공 태인은 어느날 문득 깨닫습니다. 시신을 처리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그렇게 세상을 떠난 사람을 위해 기도를 빼먹지 않았던 것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우연히 떠맡게 된 유괴된 여자 아이를 매뉴얼에 따라 장기밀매에 넘기려다 이른바 현타, 즉 현실자각타임을 갖게 된 것이죠. 그 깨달음이 어떤 것인지 조차 분명하지 않음에도 태인은 여자 아이를 다니던 학교까지 데려다줍니다.

그런데 학교로 돌아간 여자 아이가 때마침 선생님을 만나 안도하며, ‘저 사람이 유괴범!’이라고 자신을 지목하자 태인은 도망치면서 자신의 깨달음의 실체를 인식합니다. 자신이 ‘나쁜 놈이란 사실’을 말입니다. 마치 누구도 불러주기 전에는 아무것도 아니었다가 누군가 꽃이라 부르는 순간 비로소 꽃이 되는 것 처럼요.

<더 리더>의 한나 역시, 끝내 자신의 잘못을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한나의 모습에 마이클이 질책하고 절망하자 뒤늦게 죽음으로 참회합니다.

주인공과 이름이 같은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전범재판장에서 자신은 시키는 일만 ‘성실’히 했을 뿐이라며 뻔뻔하게 말하는 아이히만, 수많은 사람들을 수용소에서 죽게 만든 아이히만을 지켜보며 ‘악의 평범성’을 말합니다. 마치 나쁜 의도가 전혀 없는데도 상대방에게 상처 주는 말을 하는 사람들처럼, 바로 무사유, 즉 생각 없이 말하고 행동하는 폭력 말입니다.

‘악의 평범성’을 말할 때, 아렌트가 놀랐던 사실은 인류 역사에서 가장 잔인무도한 폭력의 주범이었던 아이히만이 그저 평범한 시골의 풍평 좋은 할아버지였다는 것입니다. 그의 잘못은 군인으로서 ‘명령’을 수행해야 하는 임무를 성실하게 수행한 것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생각하지 않음으로써 군인 이전에 ‘인간이 갖추어야 할 조건’을 위배한 것이죠. 문맹의 한나도 지적장애가 있던 태인 역시도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순간순간 ‘이건 아니지’라는 내적 갈등이 있었음에도 매번 눈을 감고 스스로를 합리화했을 테니까요.

철학자 미셸 푸코는 통치성이라는 개념으로 우리 스스로를 사회적 환경에 무비판적으로 종속시키고, 스스로를 그런 외부적 조건에 순치시키는 것을 비판한 적이 있습니다. 신자유주의가 지배하는 시장경제의 원칙에 따라 ‘경쟁이야말로 최고의 효율성’이라는 생각을 스스로 내면화하듯이 말입니다.

하지만 스스로 생각하지 않고 받아들인 사회적 규범은 자율성을 파괴할 수도 있습니다. 최고의 사회적 시스템이라면 무지한 사람들까지도 지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성장할 것이라는 계몽주의의 신념은 나치와 히틀러라는 괴물을 탄생시키면서 처참하게 무너졌습니다. 그래서 절대적으로 옳은 것은 없고, 그저 모두가 각자의 신념에 따라 비판적으로 사유하고 바르게 판단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세련된 포스트모더니즘은, 하지만 ‘진리’ 혹은 ‘옳음’이라는 절대가치를 다 상대화하였지요. 지금 유튜브 등 미디어를 통해 서로 다른 진실을 주장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렇다면 2023년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전 지구적 기후위기에 우리는 어떻게 대응해야할까요? ESG라는 용어에서 환경(E)과 사회(S)는 모두 거버넌스(G)를 가리킵니다. 즉 환경문제와 사회문제를 해결해야할 이상적인 거버넌스의 중요성을 강조하죠. 기업이든 국가든, 지구전체든 말이죠.

하지만 인류를 멸종시킬 수도 있는 기후위기에 대해 각자도생과 ‘선량한’ 개인의 도덕적 판단으로만 대응할 수 없습니다. 1회용품을 줄이고, 메일함을 자주 비우고, 소고기를 안 먹는다고 갑작스레 동시다발로 일어나는 산불과 폭우를 막을 수는 없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전지구적으로 기업과 시민의 모든 행위를 통제하는 강력한 리더십을 내세울 수도 없을 겁니다. 그런 전체주의적인 거버넌스는 수많은 한나와 태인을 낳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 그저 시스템의 매뉴얼에 묵묵히 복종하는 사람들….

자, 그래서 이제 우리 스스로 물어야 합니다. 우리의 자율성을 지키면서도, 경험해 보지 못한 위기를 다함께 헤쳐 나갈 수 있는 리더십, 혹은 거버넌스는 무엇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