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지휘자.' 지휘자 정명훈(70)을 두고 우리는 이렇게 말한다. 너무 당연해진, 머쓱할 정도로 교과서적인 표현이다. 그만큼 그를 둘러싼 여러 논란에도 불구하고, 한국 클래식계에서 차지하는 정명훈의 존재감은 단연 독보적이다. 이런 그의 존재감을 확연히 체감할 수 있는 무대들이 잇따르고 있다. 지난 1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KBS교향악단 정기연주회도 그랬다.

이날 정명훈에게는 '거장'보다는 '도인'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해 보였다. 단원과 무대를 장악하고 압도하려는 모습보다는 작품을 통달한 듯한 음악적 리더십을 선보였기 때문이다. 올해 고희(古稀)를 맞이한 그는 어느 지휘자보다도 최소한의 동작으로 최대한의 음악적 스펙트럼을 끌어냈다. KBS교향악단은 최근 선보인 공연 중 가장 응집력이 높고 다채로운 소리를 빚어냈다.
지난 1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첼리스트 한재민이 KBS교향악단과 함께 하이든 첼로 협주곡 제1번을 연주하고 있다. KBS교향악단 제공
지난 1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첼리스트 한재민이 KBS교향악단과 함께 하이든 첼로 협주곡 제1번을 연주하고 있다. KBS교향악단 제공
1부 곡은 첼로 신성 한재민의 하이든 첼로 협주곡 제1번. 이때 정명훈은 지휘봉 없이 손으로 지휘했다. 그는 10대 연주자가 자신의 음악을 최대한 발휘하도록 배려했고, 한재민은 그 안에서 대폭 성장한 모습을 보였다. 한재민 특유의 깊은 호흡에서 우러나는 묵직한 소리와 확신에 찬 보잉은 화려하면서도 유쾌한 이 곡을 빛냈다.

젊음의 확신과 에너지로 가득 찬 1부와 달리 2부에서는 초월적인 세계로 청중을 이끌었다. 2부에서 들려준 브루크너 교향곡 7번은 브루크너의 11개 교향곡 중에서도 유독 선율적이고, 서정성이 돋보인다. 대표적으로 말러 교향곡 5번과 같은 멜로딕한 레퍼토리에 특히나 강점을 보이는(물론 두루두루 다 잘 소화하지만) 정명훈에게는 브루크너 중에서 최적의 레퍼토리인 듯했다.

1악장에서는 고요한 현악 파트의 트레몰로가 배경으로 깔리는 가운데, 도약하는 음형의 선율로 시작됐다. 중간중간 애수 어린 선율과 함께 전체적으로 고조되며 클라이맥스에 도달했다.
지난 1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지휘자 정명훈이 KBS교향악단과 브루크너 교향곡 제7번을 연주하고 있다. KBS교향악단 제공
지난 1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지휘자 정명훈이 KBS교향악단과 브루크너 교향곡 제7번을 연주하고 있다. KBS교향악단 제공
이 곡의 시그니처라고 할 수 있는 2악장에는 바그너의 부음을 듣고 애도하는 취지로 작곡한 악구가 포함돼있다. 저음 현악 파트가 등장하며 목관 파트의 선율로 이어졌다. 종종 목관 악기의 존재감이 아쉽기도 했지만, 포근한 바그너 튜바의 사운드와 관현악이 어우러지며 묵직한 감동을 자아냈다.

추진하고 추동하는 3악장에서는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보다는 다소 차분하고 정돈된 모습을 보였다. 후반부에서 금관 파트의 힘이 빠지는 듯 하기도 했지만, 전반적으로 장대하게 상승하는 총주로 종교적이고 숭고한 아름다움을 표현했다.

클래식 애호가들에게 'BMW'라는 말이 있다. 브루크너·말러·바그너의 앞 글자를 딴말로, 심층 클래식 매니아들이 듣는 레퍼토리를 말한다. 후기 낭만주의의 절정에 달하는 이들의 작품은 길이가 길고 장대한데다, 음악적으로도 복잡하고 발전된 요소 때문에 이해가 쉽지 않다. 이중 브루크너는 종교적인 색채까지 강해, 연주하기도 감상하기도 어려운 작품에 속한다.

대작인만큼 세부적으로 조율하는 과정이 필요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았다는 후문이다. KBS교향악단 관계자에 따르면 "(정명훈은) 리허설할 때 설명이 거의 없다. 지휘로 모든 것을 다 보여주기 때문"이라고 했다. 실제로 그는 모든 곡을 암보했으며, 음악이 몸 안에 새겨진 DNA인 것처럼 자연스럽게 풀어냈다. 세계적인 지휘자에서 모든 것을 통달한 도인으로 향하는 길목에 들어선 것처럼. 최다은 기자 max@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