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근깨 빼빼 마른 빨간머리 앤~ 예쁘지는 않지만 사랑스러워~”

80년대에 어린 시절을 보낸 이들 중 이 노래 한번 안 불러본 사람이 있을까? 책을 좋아하던 아이였다면 소설로도 한번쯤 읽어봤을 빨간머리 앤. 그 앤을 어떻게 새롭게 해석했는지 ‘붉은머리 안’ 이라는 연극 광고를 봤을 때 설레는 마음과 호기심이 들었다. '왜 앤이 아닌 ‘안’ 이라고 했을까?'
빨간머리앤(일본애니)
빨간머리앤(일본애니)
‘빨간머리 앤’의 원제는 ‘그린게이블의 앤(Anne of Green Gables)’ 이다. 캐나다의 여성 작가 루시 모드 몽고메리는 1908년 꿈 많고 감성 풍부한 소녀 앤 셜리를 그린 소설이 엄청난 호응을 얻자 앤의 대학생 시절, 길버트와의 신혼, 그리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 기르는 이야기까지 총 열 권을 집필했다. 하지만 우리가 익히 알고 좋아하는 것은 역시 앤이 매슈와 마릴라와 만나게 되는 어린 시절의 이야기이다. 이 작품은 일본에서 1979년 다카하타 이사오 감독에 의해 ‘세계명작극장’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어 큰 인기를 끌었고 우리나라에 수입되어 TV로 방영되며 역시 많은 사랑을 받았다. ‘빨간머리 앤’ 이라는 제목도 이 애니매이션 ‘赤毛のアン’ 을 재번역한 것이다. 물론 나도 앤 셜리의 팬이었다. 출판사를 달리하며 새 책이 출간되어 나올 때마다 구해서 읽고, 애니메이션은 DVD 전집을 구매해 소장하고 있다.

얼마 전에는 넷플릭스에서 캐나다에서 제작한 드라마를 찾아보기도 했다. 제목은 ‘Anne with an ’E’. 지난 2017년 시즌1을 시작으로 2020년 시즌3까지 제작된 시리즈이다. 일본 애니메이션의 영향이 역으로 캐나다까지 미친 것인지 앤은 물론 매슈, 마릴라, 스펜서 부인 등을 마치 애니메이션의캐릭터를 기준으로 캐스팅한 것 같았다. 그런데 보다 보니 내용이 좀 이상했다. 원작에 충실하기 보다 재창작한 에피소드가 많았다. 이를테면 없어진 브로치 때문에 앤을 의심한 마릴라가 원작에서는 소풍을 가지 못하게 하는 정도의 벌을 주지만, 드라마에서는 아예 고아원으로 돌려보낸다. 고아원에 가기가 죽기보다 싫었던 앤은 기차역에서 사람들을 상대로 돈을 받고 구연동화를 하고, 오해가 풀리자 매슈가 앤을 다시 데리러 간다. 그 밖에도 친구 루비의 집에 불이 나자 앤이 뛰어들어가 방문들을 닫으며 불이 진화되도록 한다든지 원작에 없는 이 에피소드들이 나는 썩 마음에 들진 않았다.
빨간머리앤(드라마)
빨간머리앤(드라마)
앤이 당차고 씩씩한 것은 맞지만 저렇게 모르는 사람들 앞에서 반 구걸을 하고 불이 난 집에 뛰어들어가는 것은 내가 생각하는 앤하고는 약간 달랐다. 좀 거칠다고 해야 할까. 듣자하니 시즌2,3에서는 아예 원작에 없는 새로운 인물들이 등장하고 내용도 판이하게 다르다 하여 나는 더 이상의 시청을 포기했다. 개인적으로 내가 상상하고 있던 앤의 이미지를 바꾸고 싶지 않았다. 나는 문학에 관한 한 비교적 보수주의 쪽이라고 해야겠다. 더불어 궁금한 점이 생겨났다. 문학작품의 원작을 드라마나 영화로 만들 때 재창작은 어디까지 가능한 것일까. 수많은 플랫폼에서 셀 수 없을 정도의 콘텐츠가 유통되는 이 시대에 작품에 대한 2차 창작의 허용 범위는 어디까지인가. 이 질문에 대해 좀더 알아본 결과 문학작품의 경우 저작권은 저작자의 사망 후 50년까지라는 것을 확인했다. 즉, 루시 모드 몽고메리는 1942년 사망했으니 캐나다의 CBC에서 ‘빨간머리 앤’을 각색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빨간머리 앤에 컬투쇼? 붉은머리 안, 길 잃은 '각색의 자유'
나는 대학로에서 연극 ‘붉은머리 안’을 보며 좀 놀랐다. 극에서 다룬 에피소드가 원작 소설이 아니라 바로 저 넷플릭스 드라마 버젼이었기 때문이다. 이 연극에서도 앤, 아니 안은 기차역에서 구연동화를 하고, 그녀를 다시 찾으러 간 매슈와 재회하며, 불이 난 루비의 집에 뛰어들어간다. 여기에서 또 궁금한 점. 방송국에서 원작을 2차로 각색했을 때 저작권은 새롭게 발생하는가. 역시 알아보니 루시 모드 몽고메리의 저작권은 소멸했지만 원작을 각색할 경우 그 2차 저작물에 대한 저작권은 각색자에게 있다고 했다. 즉, 드라마를 제작하고 다시 50년이 지나지 않는 이상 그 에피소드들의 저작권은 CBC에 있는 것이다. 나는 극단 측이 CBC에게 저작권 사용에 대한 허락을 받았는지 궁금해서 연극이 끝나고 팜플렛 등을 찾아봤으나 그에 대한 아무런 언급은 없었다. 뿐만 아니라 연극에서는 뜬금 없이 컬투쇼에 소개되었던 웃기는 사연을 내용에 포함시켰다. 나는 결정적으로 그 장면에서 실망감이 들어 자리를 뜨고 싶었다. 국내 창작 희곡이 귀하고 새로운 작품을 쓰는 것이 어려운 것은 알겠지만 이렇게 여기저기에서 다른 창작물을 그대로 가져오는 것은 무대에 대한 도리가 아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윈드차임, 에그셰이커, 젬배, 트라이앵글 정도를 활용한 것으로 음악극이라고 홍보하는 것이 적당한지도 모르겠다. 물론 이날의 배우들은 혼신의 힘을 다했고 다행인지 모르겠지만 객석을 가득 채운 젊은 관객들은 작품을 즐기고 만족해하는 듯 했다. 그 중에는 ‘빨간머리 앤’의 내용을 이 작품으로 처음 접하는 관객도 있을 것이다.

어려운 연극계를 애정하는 마음에서 가끔 기대에 못 미치는 작품을 만나더라도 쓴 소리는 잘 하지 않는 편이다. 되도록 좋았던 부분만 칭찬을 하려 하는데 이번은 예외가 되고 말았다. 하지만 문학 작품, 특히 해외 작품을 재창작하려면 그야말로 우리의 정서를 기반으로 고민과 연구를 거듭하여 오히려 원작보다 더 큰 감흥을 느낄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자람이 브레히트의 작품(‘사천의 선인’, ‘억척어멈과 자식들’)과 ‘노인과 바다’를 작창까지 해가며 재창작 했듯 원작의 창작 못지 않은 각고의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앤을 안으로 그저 이름만 바꾸는 것에 그치지 않고 차라리 '안'이 우리 사회 안에서 공부에 치이고 갖은 폭력 등으로 세상과 불화하는 요즘 십대 소녀를 대변했다면 더 좋았을 것 같다. 제대로 된 패러디가 아니라면 최소한 원작에 충실한 그린게이블의 빨간머리 앤을 무대에서 만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