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방미인 오텐자머, '1950년대 뉴욕'을 소환하다
지난 20일 오후 안드레아스 오텐자머가 경기필하모닉을 이끌고 지휘하고 있다. 롯데콘서트홀 제공


올여름 ‘클래식 레볼루션’의 피날레 공연은 팔방미인이었던 레너드 번스타인에 대한 강력한 오마주였다.

지난 8월 20일 롯데콘서트홀의 여름 음악축제인 ‘클래식 레볼루션 2023년' 음악감독 안드레아스 오텐잠머의 주도하에 경기필의 ‘번스타인 심포닉 댄스’ 공연이 열렸다. 베를린 필의 클라리넷 수석인 오텐잠머는 지휘봉과 클라리넷을 번갈아 잡으며 분주하게 악단을 리드했고 번스타인 <심포닉 댄스>에서는 휘슬을 불거나 관객석을 향해 ‘맘보’를 외치도록 호응을 이끌기도 했다. 작곡만 빼고는 번스타인, 애칭으로는 레니가 했던 지휘, 연주, 멘트 등 모든 것을 한 무대에 구현한 것이다. 오텐잠머는 어느새 무대에서 클라리넷을 부는 레니가 되려 했고 하늘이 한 인간에게 재능을 과도하게 부여한 ‘실수’를 구현하고자 하였다.

첫 곡으로 연주된 브람스의 <비극적 서곡>은 캐주얼한 공연에 최소한의 무게중심을 부여하는 동시에 번스타인 <심포닉 댄스>의 비극적 결말과 연결시키려는 의도였던 것으로 파악된다. 경기필은 오텐잠머의 바톤에 민감하게 반응했고 중후한 팀파니의 사운드에 힘입어 독일적인 사운드를 뿜어냈다. 현악의 응집력은 탁월했고 공연 중 연주되었던 모든 레퍼터리를 통틀어 가장 빼어난 조형감각을 드러냈다. 다만 호른 파트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고자 했던 지휘자의 의도와는 달리 호른에서 약간의 난조를 보였다.

이어서 브람스의 헝가리 무곡과 왈츠가 흘렀다. 오케스트라의 앙코르 피스로 유명한 헝가리 무곡 1번을 시작으로 귀에 익숙한 춤곡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브람스의 왈츠에서 오텐잠머는 자신의 본령이라 할 수 있는 클라리넷을 잡았고 헝가리의 ‘향신료’가 지배했던 분위기는 잠시나마 빈의 고즈넉한 카페로 전환되었다.

이어지는 헝가리 무곡 7번에서도 오텐잠머는 클라리넷 솔로와 지휘를 모두 담당했고 중간에는 과거 재즈 뮤지션 베니 굿맨이 연주했을 법한 알코올향이 가득한 고음을 뽐냈다. 헝가리 무곡 5번을 연주하기 전에는 객석을 향해 돌아서며 ‘다들 이 곡을 알 것’이라는 취지의 멘트를 띄우기도 했다. 헝가리 무곡의 특성상 템포의 ‘밀고 당기기’가 번잡할 수밖에 없는 레퍼토리임에도 불구하고 경기필은 지휘자의 바톤에 빈틈없이 밀착해 뛰어난 기본기와 기량을 갖춘 악단임을 충분히 입증했다.

2부에서 지휘자는 버건디 컬러의 더블 수트에 스니커즈를 매칭하여 의상으로도 캐주얼한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번스타인의 <심포닉 댄스>는 예전 구스타보 두다멜이 이끄는 시몬 볼리바르 유스 오케스트라 내한 공연 때의 ‘현상’을 되살릴 정도로 야성적인 호연이었다.
팔방미인 오텐자머, '1950년대 뉴욕'을 소환하다
롯데콘서트홀 제공

셰익스피어 ‘로미오와 줄리엣’을 미국 뉴욕의 이민자 문제로 치환시킨 뮤지컬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의 히트 넘버와 중요 장면을 메들리로 엮은 <심포닉 댄스>는 1부에 연주되었던 브람스 <비극적 서곡>의 맨허튼 슬럼 버전이라 할 수 있었다. 비록 ‘프롤로그’가 다소 느슨하게 시작된 느낌을 지울 수 없었으나 점점 열기가 고조되어 ‘맘보’에 이르러서는 가히 폭발적인 사운드가 펼쳐졌다. 관악기는 현악기와의 밸런스를 전혀 눈치보지 않고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처럼 원시적 야수성을 뿜어냈다.

트럼펫도 ‘연미복’을 벗어 던지는 느낌으로 재즈 특유의 되바라진 소리를 구현해냈다. 폭력적인 ‘럼블’에서 아드레날린은 최고조에 달했고 바그너 <신들의 황혼>의 구원의 모티프를 패러디한 피날레에서는 죽음으로 완성된 평화를 구현하듯 숨죽이는 장면이 연출되었다.

번스타인이 동경했던 재즈를 일찍이 클래식과 접목시켰던 거슈인의 전주곡 1번, <포기와 베스> 중 ‘서머 타임’ 그리고 ‘아이 갓 리듬’은 미국적 열기를 더욱 가속화시켰다. 마지막으로 연주된 번스타인의 <전주곡, 푸가와 리프>는 더블베이스 1명을 제외하고는 현악기가 하나도 없이 오롯이 클라리넷 독주와 재즈 앙상블을 위한 곡이었다. 오텐잠머는 여기에서도 지휘와 클라리넷 연주를 동시에 했는데 어떤 면에서는 과로하는 최고 경영자를 보는 것 같아 조금은 안쓰러운 느낌도 없지 않았다. 오텐잠머가 지휘자로 더 좋은 성과를 보이기 위해서는 재능의 ‘낭비벽’을 조금 줄일 필요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김문경 음악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