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미·이선균이 안겨준 '잠'의 공포…참신한 미스터리 스릴러
연극 무대에 익숙한 관객이라면 정유미·이선균 주연의 영화 ‘잠’을 보면서 ‘갈매기', '세 자매', '바냐 아저씨’, '벚꽃 동산’ 등 러시아 대문호 체호프가 쓴 장막극(長幕劇)을 떠올릴 수도 있겠다.

영화는 연극의 막(幕)과 비슷한 개념의 장(場)으로 나뉜다. 이 영화의 ‘장’은 연극에서 막의 하위 단위인 장이 아니다. 연극에선 막과 막 사이에 세트 전환 등을 위한 시간이 있는 것처럼 이 영화에선 친절하게도 ‘제1장’‘제2장’이란 자막이 뜨면서 장의 시작과 끝을 알려준다.
정유미·이선균이 안겨준 '잠'의 공포…참신한 미스터리 스릴러
체호프의 장막극이 대부분 동일한 일상의 생활공간을 배경으로 하되 막과 막 사이 시간이 흐르고 그 시간 동안 극적 상황이 달라졌음을 역시 동일하지만 캐릭터가 조금은 변한 주요 등장 인물들의 대사를 통해 추정할 수 있는 것처럼 ‘잠’도 그렇다. 영화의 시작부터 끝까지 주요 극적 무대는 신혼부부인 수진(정유미)과 현수(이선균)가 살고 있는 아파트 집이다. 비중의 차이는 있지만 각 장마다 수진과 현수의 ‘이상 행동’이 드라마를 이끈다.

다만 체호프의 장막극이 대부분 네 개의 막으로 구성된 반면, 영화 ’잠‘은 세 개의 장으로 끝난다. 지난 18일 첫 언론 시사회 직후 열린 간담회에서 ‘잠‘을 연출하고, 시나리오까지 직접 쓴 유재선 감독은 “수진과 현수의 상황이 극적으로 변화하는 시기를 3장으로 나누면 좋을 것 같았다”며 ”각 장 사이마다 시간이 많이 지나는 데 그 시간동안 큼직한 일도 많이 발생한 것에 대해 추측하는 재미도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정유미·이선균이 안겨준 '잠'의 공포…참신한 미스터리 스릴러
다음달 6일 개봉하는 ’잠‘은 체호프의 장막극과 ‘절망적인 상황을 인내로 이겨 나가면서, 계속 살아가야 하는 희망을 발견한다’는 주제의식에선 일맥상통하는 점도 있지만, 구체적으로 구현하는 극적 세계와 재미는 전혀 다르다. 미스터리 공포(호러)물에 스릴러적인 요소를 가미한 장르 영화다. ‘잠’이 장편영화 데뷔작인 유 감독은 “시나리오를 쓰고, 영화를 준비하고 촬영하는 과정 내내 제1의 철칙은 재밌는 장르 영화를 만들자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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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들어왔어.” 제1장 초반. 어느 날 잠이 덜 깬 남편 ‘현수’가 중얼거린 혼잣말과 이후 본격적으로 나타난 몽유병 같은 ‘수면 중 이상행동’은 행복했던 신혼부부의 일상을 180도 바꿔 놓는다. 1장에서 극중 공포의 근원이 이상행동의 강도가 점점 높아지는 현수라면 2장과 3장에선 거실 벽에 붙어있는 ‘둘이 함께하면 극복 못 할 일이 없다'는 가훈에 과도하게 집착하는 수진으로 옮겨간다. 수진은 수면 전문 병원의 치료와 처방이 별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자 어머니(이경진)의 무속신앙적 해석에 경도되고, 3장의 파국을 이끌어낸다.

2장에 어머니가 데려온 무속인의 말과 행동에 반응하는 수진의 눈빛에서 어느 정도 예상된 결말은 호불호가 가장 크게 갈릴 대목이다. 소재와 연출의 참신성에 비해 샤머니즘에 기댄 결론이 진부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
정유미·이선균이 안겨준 '잠'의 공포…참신한 미스터리 스릴러


연극이 배우의 예술인 것처럼 극영화도 본질적으로는 마찬가지다. 한정된 공간에서 한정된 등장 인물이 극을 이끌고 가는 이 영화는 더욱 그렇다. 부부로 나오는 정유미와 이선균은 베테랑 배우들답게 멋진 호흡을 보여주며 각자의 배역을 극중 설정에 딱 맞으면서도 개성 있게 소화한다. 특히 각 장마다 캐릭터 변화가 심한 수진 역의 정유미는 변화무쌍한 표정과 내면 연기로 작품에 깊이감을 더한다.

송태형 문화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