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회 EBS국제다큐영화제에서 한국 작품 최초로 대상을 받은 영화 ‘버블 패밀리’를 책으로 쓴 에세이. ‘K장녀’ 시선으로 약 30년에 걸쳐 가족이 겪어온 흥망성쇠를 1980년대 한국 도시개발사와 함께 엮어 신랄하고 흥미롭게 풀어냈다. (클, 260쪽, 1만7000원)
“나에게 절실히 필요한 문장이 있는데 그게 무엇인지는 모른다. 어느 날 어떤 문장을 읽고 내가 기다려온 문장이 바로 이것임을 깨닫는다.”미문(美文)을 구사하는 신형철 문학평론가는 독서의 희열을 이렇게 표현한 적이 있다. 책은 문장으로 지어 올린 집, 문장의 숲이다. 어쩌면 우리가 책을 읽는 건 마음을 울릴 단 하나의 문장을 찾기 위해서인지도 모른다.김응교 문학평론가가 최근 출간한 <첫 문장은 마지막 문장이다>는 책을 구성하는 수많은 문장 중에서도 첫 문장에 주목한다. 소설과 산문집 37편의 탁월한 첫 문장을 선정해 그 문장이 책 전체를 어떻게 끌고 나가는지 분석했다. 독서 안내서이자 글쓰기 교본이다. 두 번째 문장, 그리고 그 이후까지 읽도록 독자를 끌어들이는 첫 문장은 책의 관문이자 1번 타자이기 때문이다.첫 문장은 독자에겐 시작일지 몰라도 저자에겐 마지막 문장이다. “탁월한 첫 문장이 안 나오면 생각날 때까지 기다리며, 아니 아예 기다리지 않고 첫 문장을 멀리 밀어둡니다. (…) 결국 첫 문장과 제목은 가장 나중에 다가오곤 하지요.”이토록 첫 문장을 강조한 책의 첫 장을 차지한 건 어떤 작품일까. 바로 “거기 누구냐”고 물으며 시작하는 셰익스피어의 <햄릿> 첫 장면이다. 김 평론가는 “이 질문은 무대 위에서 펼쳐질 비극을 예감하게 하는 질문”이라며 “무대를 보는 청중에게도 묻는 말”이라고 말한다. 결국 첫 장면의 첫 대사, 첫 문장이 ‘실존’을 고민하는 작품의 주제를 함축한다는 것이다.책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인간 실격> <노인과 바다>와 같은 고전뿐 아니라 김호연의 베스트셀러 소설 <불편한 편의점> 등 최근 작품도 두루 살피며 적확한 첫 문장을 탐색한다.비슷한 시기에 국내 출간된 <문장의 맛>은 작가이자 언론인, 편집인인 마크 포사이스가 독자의 마음에 콕 박힐 문장을 쓰는 방법을 알려준다. 부제는 ‘셰익스피어처럼 쓰고 오스카 와일드처럼 말하는 39개의 수사학’이다. 의인법, 대조법, 반복법 등 인상적 문장을 쓰기 위한 39개의 수사적 기법을 정리했다.탁월한 작품이나 작가를 만드는 건 우연한 천재성이 아니라 잘 닦인 기교라고 저자는 말한다. 심지어 대문호 셰익스피어조차 ‘사랑의 헛수고’ 같은 초창기 희곡은 형편없다는 것이다. “모든 직종의 사람은 시간이 갈수록, 나이가 들수록 기량이 더욱 나아진다. 당연하다. 더 배우고 더 연습하기 때문이다. 글을 쓰는 작가라고 이들과 딱히 달라야 할 이유가 있을까.”39개의 수사법 용어를 기억할 필요는 없다. 전문적으로 글 쓰는 사람만 읽어야 하는 책은 아니다. 회의 시간에 상사를 성공적으로 설득하고 싶은 직장인, 상품의 장점을 머릿속에 콕 박히게끔 설명하고 싶은 영업맨도 ‘문장의 맛’ ‘말의 근육’을 키우기 위해 읽어볼 만한 책이다.다만 영국 작가가 쓴 책이라 영미권 문학의 원문, 영어의 말맛을 예시로 사용하는 것은 한국 독자로서 아쉬운 점이다. 영미문학에 관심이 있거나 친숙한 독자라면 더욱 흥미롭게 읽을 수 있다.구은서 기자 koo@hankyung.com
“당신의 약점을 말해보세요.” 면접장에 단골로 등장하는 이 질문의 모범답안은 무엇일까. “지나치게 완벽주의적인 성향이 제 약점입니다” 정도면 꽤 괜찮은 답변이다. 성과에 대한 집념으로 자기를 채찍질하고 개인의 희생을 기꺼이 감내하는 인재(人才)라는 인상을 준다.<완벽주의의 함정>은 어느덧 약점이 아니라 시대적 덕목이 된 완벽주의의 위험성을 경고한 책이다. 책은 과열된 경쟁이 직장인을 번아웃으로 내몰고 소셜미디어가 비추는 남들의 일상이 열등감과 우울감을 유발한다고 주장한다. 저자 토머스 커런 영국 런던정치경제대 부교수는 “현대 사회는 게으름을 피우거나 속도를 늦추는 것은 물론 이 모든 노력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 생각할 틈조차 주지 않는다”고 말한다.미국 사이클 선수인 랜스 암스트롱은 완벽주의의 함정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그는 세계 최고 대회인 ‘투르 드 프랑스’ 7회 우승이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웠지만 훗날 도핑 사실이 드러나며 기록이 말소됐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자신의 선택이 공정한 경쟁의 장을 만들기 위한 행위였다고 해명했다. “당시 문화가 그랬습니다. 선수는 각자의 선택을 따랐을 뿐이죠.”암스트롱도 뛰어든 당시의 ‘무제한 경쟁’은 사이클리스트들의 건강을 위험에 빠뜨렸다. 암스트롱 자신은 성과를 거뒀을지 몰라도 모두가 그처럼 운이 따라준 것은 아니었다. 일부 선수는 약물 부작용에 시달리거나 심한 경우 목숨을 잃었다.저자는 오늘날 “사회 곳곳에서 파괴적인 경쟁이 벌어지고 있다”고 강조한다. 시작은 광고와 소셜미디어 확산이었다. 광범위하게 뻗어나간 인터넷은 소비자가 자신의 부족한 점을 상기하게끔 유도했다. 신형 차와 고급 주택, 세련된 옷과 액세서리 수요는 끊이지 않았다.완벽을 향한 인간의 갈증은 광고와 소셜미디어의 동력이 됐다. 매일 약 20억 명의 이용자가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을 통해 포토샵으로 꾸며진 ‘상위 0.1%’와 자신을 비교한다.문제는 10대 이용자로 갈수록 심각해진다. 저자가 입수한 페이스북 내부 문건에 따르면 미국 청소년의 6%, 영국 청소년의 13%가 ‘인스타그램을 이용하며 자살 충동을 느꼈다’고 답했다. 10대 여성 이용자의 3분의 1은 신체 이미지(자기 신체에 갖는 주관적인 인상) 악화를 호소했다.<완벽주의의 함정>은 ‘완벽한 책’은 아니다. 책에서 제시한 자료와 도표는 정교하지 않다. ‘자신의 불완전한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원론적인 해결책을 제시한다는 인상도 준다. 완벽주의에 대한 환상이 생기는 심리적 배경을 분석한 대목과 이를 부추기는 경제 시스템을 비판한 지점은 주목할 만하다.정리=안시욱 기자이 글은 WSJ에 실린 빌 히비의 서평(2023년 8월 10일) ‘The Perfection Trap Review: The Enemy of the Good’를 번역·편집한 것입니다.
최근 출간된 <조선이 만난 아인슈타인>은 ‘조선은 과학 불모지였다’는 통념을 정면 반박한다. 책은 변화의 물결이 꿈틀대던 구한말, 한국 과학자들과 관련 논의를 다룬다. 이 과정에서 일제강점기 조선의 독립운동과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 간 관계를 짚는 등 우리의 숨은 과학사를 보여준다.저자는 아인슈타인이 주요 국가에서 주목받던 1920년대 바로 그 시점에 한국에도 상대성이론이 전해졌다는 것을 알게 됐다. 단순히 소개된 정도가 아니다. 전국 방방곡곡에서 순회 강연이 열렸고 주요 일간지와 잡지가 양자역학을 다뤘다. 100년 전에 말이다.저자 민태기 씨는 서울대 기계공학과에서 학사부터 박사 과정까지 끝내고 미국 UCLA 연구원, 삼성전자 수석연구원으로 재직했다. 현재는 ㈜에스엔에이치 연구소장으로 누리호 및 차세대 발사체 엔진 개발에 참여하고 있다.“왜 과학을 알리려던 이들은 잘 알려지지 않았을까.” 저자는 1895년 서재필의 귀국부터 6·25전쟁 직후까지 한국사와 한국과학사의 주요 장면을 짚어나가며 이 질문의 답을 찾아 나간다. 일제강점기, 해방 이후 이념 갈등과 혼란이 이 땅의 과학자들을 지워버렸다.구한말 과학자들은 당대 지식인이었고 일부는 독립운동가이기도 했다. 그들은 나라 잃은 민족인 유대인이 과학기술을 토대로 나라를 되찾았다고 봤고 그 중심에 있던 과학자 아인슈타인에게 주목했다. “우리 선조들은 무기력하지 않았다.” 책은 어쩌면 에필로그 속 이 한 문장을 말하기 위해 쓰인 것처럼 보인다. 한국 과학자들의 업적과 분투를 끊임없이 강조하는 책의 서술 방식이 다소 강박적으로 느껴지기도 하지만 저자의 사명감이 전해진다.구은서 기자 k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