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가 빚어낸 '악령 들린 화가'…겁에 질린 절규 쏟아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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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의 노예'로 불린 에드바르 뭉크
부친에 겪은 폭력·죽음의 공포 그려내
첫 개인전서 '악령 들린 그림' 지탄에도
평생 '불행' 소재로 작업하며 명작 남겨
부친에 겪은 폭력·죽음의 공포 그려내
첫 개인전서 '악령 들린 그림' 지탄에도
평생 '불행' 소재로 작업하며 명작 남겨
“마귀를 쫓으려면 더 무서운 이야기를 들려줘야 할 것 같다. 오늘 밤에는 너희 중 그 누구도 잠들지 말아라.”
1868년, 에드바르 뭉크는 어머니를 잃었다. 그의 나이 고작 다섯 살. 다섯 남매의 둘째인 뭉크는 폐결핵으로 피를 토하며 죽어가는 어머니의 모습을 지켜봤다. 어머니의 죽음 후, 의사인 그의 아버지는 정신이 빠진 듯 종교에 모든 것을 맡겼다.
환자를 수술한 후 피가 뚝뚝 떨어지는 수술복을 벗지도 않은 채 아버지는 뭉크와 누나 그리고 여동생들을 불러모으는 일이 잦았다. 그리곤 아무 이유 없이 소리를 지르며 그들을 마구잡이로 때렸다.
뭉크의 아버지는 밤마다 귀신, 죽음, 살인 등 공포스러운 내용이 가득한 책을 읽어준다며 남매들을 못 자게 했다. 이유는 한 가지. “너희들은 매번 신의 뜻을 어기는 악마이기 때문에 충격 요법을 줘야 천국에 갈 수 있다.”
뭉크는 그때마다 두려움에 떨었다. 한 손은 누나 소피에의 손을 잡고, 또 다른 손으로는 여동생 라우라의 손을 잡아줬다. 그렇게 죽음에 대한 두려움, 귀신에 대한 막연한 공포는 평생 뭉크를 따라다니는 망령이 된다.
어머니의 죽음보다 뭉크를 미치게 한 건 누나 소피에의 사망이었다. 사인은 폐결핵. 그즈음 아버지의 광기와 폭력을 이기지 못한 여동생 라우라는 완전히 미쳐버렸다. 혼자 웃다가 울고 침을 흘리며 바닥을 기어다녔다. 엄마와 누나, 가장 사랑하는 두 사람을 잃은 뭉크는 줄곧 ‘이제 내가 죽을 차례’라는 생각을 했다. 자다가 밤중에 일어나 내가 이미 죽어 지옥에 온 게 아닌가 생각하며 밤을 지새웠다. 1879년 오슬로의 기술대학에 입학한 뭉크는 병약한 몸 때문에 학업 진도를 따라갈 수 없었다. 자존감이 떨어질 대로 떨어진 뭉크는 수시로 자살과 지옥에 대해 생각했다. “낙서 하나는 봐줄 만한 놈”이라는 소리를 듣고 그는 낙서를 통해 죽음의 두려움을 밀어냈다. 그는 단 1년 만에 왕립 드로잉아카데미의 문턱을 넘으며 우울과 피폐함을 그리는 작가가 됐다. 그가 그린 ‘죽음과 아이’는 죽은 어머니 옆에서 덜덜 떨던 동생 라우라를 회상하며 작업했다.
1892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프랑스를 꺾은 독일은 이를 기념하기 위해 뭉크를 초청해 개인전을 열어줬다. 독일 미술협회가 고른 55점의 그림이 벽에 걸렸다. 하지만 전시회를 찾은 시민들은 ‘악령의 사주를 받은 그림’이라며 경악했다. 죽음과 폭력을 그리는 뭉크는 전쟁의 승리를 만끽하고 있는 독일 사람들에게 찬물을 끼얹었다.
뭉크의 첫 개인전은 8일 만에 ‘뭉크 스캔들’이라는 이름만을 남긴 채 끝났다. 뭉크는 이 전시회를 열었다는 이유만으로 ‘악마의 노예’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하지만 이 일로 “죽음을 그리는 해골 같은 화가가 베를린을 뒤집었다”는 소문이 퍼졌다. 그의 명성은 고향 노르웨이를 거쳐 프랑스로 퍼져나갔고, 팬클럽까지 생겨났다. 뭉크는 이때부터 “내가 바로 악마의 그림을 그리는 ‘지옥의 화가’다”라며 스스로를 홍보했다. 인생 처음으로 자신만만한 기분을 느낀 그는 이듬해 세기의 역작을 내놓는다. 누구나 아는 작품, ‘절규’다.
‘절규’는 뭉크가 친구와 함께 고향 시골 마을에서 산책하며 겪은 경험을 되살려 그린 작품이다. 길을 걷다 갑자기 패닉이 온 뭉크는 어머니, 누나 그리고 아버지의 형상을 한 귀신에 시달렸다. 악령들이 자신을 둘러싸던 악몽과도 같은 찰나를 캔버스 위에 쏟아냈다.
이 기괴한 작품은 세상에 충격을 줬다. 그가 지녀온 평생의 불행을 그린 작품이니 그럴 만도 했다. 그의 나이는 갓 서른이었다. 뭉크는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화가 중 한 명이 됐지만, 평생 신과 세상을 두려워했다. 사람도 무서워했다. 그는 수염을 길러 얼굴을 가리면 신이 자신을 알아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람을 만나야 할 땐 무조건 빛과 문이 없는 밀폐된 장소에서만 만났다. 뭉크는 죽을 때가 돼서야 죽음과 망령의 두려움에서 벗어났다. 모든 것을 탈피한 현자처럼 세상 만물을 대했다. 1주일에 두 번씩은 바닥에 쓰러져 거품을 물었던 뭉크는 아이러니하게도 80세까지 장수했다. “불행에 너무 익숙해지니 악마도 그를 사자의 명단에서 지웠다”는 이야기까지 돌았다. 1944년 그가 죽음을 맞이할 때 한 손에는 도스토옙스키의 책 <악령>을 꼭 쥐고 있었다. 마치 누나의 손을 잡고 공포를 버티던 다섯 살의 그 자신처럼.
그가 죽은 이후 그의 집에서는 유화, 실크스크린 등 2만여 점의 작품이 쏟아졌다. 가족 없이 홀로 산 그는 그림을 자신이 잉태해 낳은 자식처럼 여겼다. 하나가 없어지거나 팔려나가면 똑같은 작품을 또 만들었다. 그의 ‘악령 들린 작품들’은 그렇게 인류에게 남긴 커다란 선물이 됐다.
최지희 기자 mymasaki@hankyung.com
1868년, 에드바르 뭉크는 어머니를 잃었다. 그의 나이 고작 다섯 살. 다섯 남매의 둘째인 뭉크는 폐결핵으로 피를 토하며 죽어가는 어머니의 모습을 지켜봤다. 어머니의 죽음 후, 의사인 그의 아버지는 정신이 빠진 듯 종교에 모든 것을 맡겼다.
환자를 수술한 후 피가 뚝뚝 떨어지는 수술복을 벗지도 않은 채 아버지는 뭉크와 누나 그리고 여동생들을 불러모으는 일이 잦았다. 그리곤 아무 이유 없이 소리를 지르며 그들을 마구잡이로 때렸다.
뭉크의 아버지는 밤마다 귀신, 죽음, 살인 등 공포스러운 내용이 가득한 책을 읽어준다며 남매들을 못 자게 했다. 이유는 한 가지. “너희들은 매번 신의 뜻을 어기는 악마이기 때문에 충격 요법을 줘야 천국에 갈 수 있다.”
뭉크는 그때마다 두려움에 떨었다. 한 손은 누나 소피에의 손을 잡고, 또 다른 손으로는 여동생 라우라의 손을 잡아줬다. 그렇게 죽음에 대한 두려움, 귀신에 대한 막연한 공포는 평생 뭉크를 따라다니는 망령이 된다.
어머니의 죽음보다 뭉크를 미치게 한 건 누나 소피에의 사망이었다. 사인은 폐결핵. 그즈음 아버지의 광기와 폭력을 이기지 못한 여동생 라우라는 완전히 미쳐버렸다. 혼자 웃다가 울고 침을 흘리며 바닥을 기어다녔다. 엄마와 누나, 가장 사랑하는 두 사람을 잃은 뭉크는 줄곧 ‘이제 내가 죽을 차례’라는 생각을 했다. 자다가 밤중에 일어나 내가 이미 죽어 지옥에 온 게 아닌가 생각하며 밤을 지새웠다. 1879년 오슬로의 기술대학에 입학한 뭉크는 병약한 몸 때문에 학업 진도를 따라갈 수 없었다. 자존감이 떨어질 대로 떨어진 뭉크는 수시로 자살과 지옥에 대해 생각했다. “낙서 하나는 봐줄 만한 놈”이라는 소리를 듣고 그는 낙서를 통해 죽음의 두려움을 밀어냈다. 그는 단 1년 만에 왕립 드로잉아카데미의 문턱을 넘으며 우울과 피폐함을 그리는 작가가 됐다. 그가 그린 ‘죽음과 아이’는 죽은 어머니 옆에서 덜덜 떨던 동생 라우라를 회상하며 작업했다.
1892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프랑스를 꺾은 독일은 이를 기념하기 위해 뭉크를 초청해 개인전을 열어줬다. 독일 미술협회가 고른 55점의 그림이 벽에 걸렸다. 하지만 전시회를 찾은 시민들은 ‘악령의 사주를 받은 그림’이라며 경악했다. 죽음과 폭력을 그리는 뭉크는 전쟁의 승리를 만끽하고 있는 독일 사람들에게 찬물을 끼얹었다.
뭉크의 첫 개인전은 8일 만에 ‘뭉크 스캔들’이라는 이름만을 남긴 채 끝났다. 뭉크는 이 전시회를 열었다는 이유만으로 ‘악마의 노예’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하지만 이 일로 “죽음을 그리는 해골 같은 화가가 베를린을 뒤집었다”는 소문이 퍼졌다. 그의 명성은 고향 노르웨이를 거쳐 프랑스로 퍼져나갔고, 팬클럽까지 생겨났다. 뭉크는 이때부터 “내가 바로 악마의 그림을 그리는 ‘지옥의 화가’다”라며 스스로를 홍보했다. 인생 처음으로 자신만만한 기분을 느낀 그는 이듬해 세기의 역작을 내놓는다. 누구나 아는 작품, ‘절규’다.
‘절규’는 뭉크가 친구와 함께 고향 시골 마을에서 산책하며 겪은 경험을 되살려 그린 작품이다. 길을 걷다 갑자기 패닉이 온 뭉크는 어머니, 누나 그리고 아버지의 형상을 한 귀신에 시달렸다. 악령들이 자신을 둘러싸던 악몽과도 같은 찰나를 캔버스 위에 쏟아냈다.
이 기괴한 작품은 세상에 충격을 줬다. 그가 지녀온 평생의 불행을 그린 작품이니 그럴 만도 했다. 그의 나이는 갓 서른이었다. 뭉크는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화가 중 한 명이 됐지만, 평생 신과 세상을 두려워했다. 사람도 무서워했다. 그는 수염을 길러 얼굴을 가리면 신이 자신을 알아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람을 만나야 할 땐 무조건 빛과 문이 없는 밀폐된 장소에서만 만났다. 뭉크는 죽을 때가 돼서야 죽음과 망령의 두려움에서 벗어났다. 모든 것을 탈피한 현자처럼 세상 만물을 대했다. 1주일에 두 번씩은 바닥에 쓰러져 거품을 물었던 뭉크는 아이러니하게도 80세까지 장수했다. “불행에 너무 익숙해지니 악마도 그를 사자의 명단에서 지웠다”는 이야기까지 돌았다. 1944년 그가 죽음을 맞이할 때 한 손에는 도스토옙스키의 책 <악령>을 꼭 쥐고 있었다. 마치 누나의 손을 잡고 공포를 버티던 다섯 살의 그 자신처럼.
그가 죽은 이후 그의 집에서는 유화, 실크스크린 등 2만여 점의 작품이 쏟아졌다. 가족 없이 홀로 산 그는 그림을 자신이 잉태해 낳은 자식처럼 여겼다. 하나가 없어지거나 팔려나가면 똑같은 작품을 또 만들었다. 그의 ‘악령 들린 작품들’은 그렇게 인류에게 남긴 커다란 선물이 됐다.
최지희 기자 mymasak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