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러시아 루블화는 언제나 독재의 도구일 뿐이었다
돈과 정치는 서로 떼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 각국 통화는 국제 정세에서 위상을 드러내는 척도가 되기도 한다. 글로벌 금융위기, 코로나19 이후 인플레이션 등으로 기축통화로서 미국 달러화의 입지가 흔들리자 일각에선 중국 위안화나 러시아 루블화로 ‘달러를 우회하는 결제 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한 움직임이 일고 있다.

루블화에 대해 다양한 전망이 제기되는 가운데 최근 출간된 <루블>은 “루블이 러시아 독재 권력의 도구로 전락했다”고 주장한다. 저자 예카테리나 프라빌로바 미국 프린스턴대 교수는 18세기 러시아 제국부터 소련 붕괴까지 약 300년의 근현대사를 돌아본다. 그러면서 루블이 ‘모호한 가치를 지닌 불안정한 통화’로 변모하는 과정을 추적한다.

책은 러시아 최초의 지폐가 발행된 176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예카테리나 대제(재위 1762~1769년)는 전쟁 등 제국 확장에 필요한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돈을 찍어냈다. 귀족들이 담보로 맡긴 재산과 황제의 권위가 신용을 보증했지만 화폐 가치 폭락을 간신히 틀어막는 수준에 불과했다.

알렉산드르 1세(재위 1801년~1825년)에 이르러 명목주의 화폐론이 세를 불렸다. 이들은 “황제가 신성한 의무를 수행하는 데 필요한 자금을 찍어내는 걸 막아선 안 된다”고 주장했다. 상공업 발전에 투입해야 할 자원은 독재 권력을 강화하는 데 사용됐다. 저자는 “러시아 경제 발전이 유럽의 다른 국가들에 비해 뒤처진 것은 이때 발생한 비생산성 때문”이라고 꼬집는다.

루블화는 이른바 ‘독재 자본주의’ 체제로 넘어가며 약간의 안정을 찾았다. 알렉산드르 2세(재위 1855~1881년)는 외국 상인과 투자자에게 시장을 개방하고 자유무역을 채택했다. 증권, 채권, 주식 등 각종 거래 수단으로 루블이 활용되며 국제적인 가치 평가의 영향을 받는 듯했다.

러시아 제국의 루블은 제1차 세계대전과 뒤이은 러시아 혁명으로 무너졌다. 전쟁으로 물가가 천정부지로 솟자 ‘황제의 권위’를 상징하는 루블화 가치는 바닥을 쳤다. 이후 루블은 임시정부가 발행한 지폐, 혁명에서 승리한 볼셰비키가 발행한 지폐 등 수십 종류의 화폐가 뒤섞인 모호한 개념으로 바뀌었다. 권력을 잡은 공산당은 통화에 대한 국가 통제를 강화했다. 적어도 소련 내부에서 루블 가치는 중앙당의 명령에 따라 결정됐다. 저자는 “소련 루블은 ‘계획경제의 보조도구’이자 시민에게는 일종의 ‘배급 카드’로 전락했다”며 “통치자가 화폐를 쥐고 흔드는 권위주의적 전통은 오늘까지도 계속되고 있다”고 평가한다.

정리=안시욱 기자

이 글은 WSJ에 실린 ‘The Fourth Turning Is Here and End Times Review: Big Wheel’을 번역·편집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