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홀과 바스키아의 뜻밖의 결합, 새로운 해석을 갈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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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김미경의 파리통신
앤디 워홀은 1928년 펜실베이니아의 피츠버그에서 태어났다. 1949년 그래픽 아트를 공부한 후 미국의 가장 인정받는 그래픽 디자이너, 일러스트레이터가 되었다. 그는 1960년대 미국의 대중문화 아이콘이자, 대중문화의 거울처럼 자신 앞에 보이는 것들을 흡입하여 자기 작품에 반영했다.
1962년 워홀은 실크스크린 기법을 이용한, 팝 아트 작품으로 미국을 비롯해 유럽에 알려지기 시작했고, 브로드웨이 47번가에 그의 작업실 Factory를 마련해 유명 스타의 이미지를 대량 생산했다. 특정 모티프를 사용하여 자신의 주제를 선택적으로 추출한 다음, 복잡한 회화적 공간에 투사했다. 대량 소비되는 제품들, 알려진 인물들을 실크스크린으로 대량 생산하였다. 이것은 미국의 경제 부흥에 힘입은 대중문화에 대한 도발이자 비판이었다. 그의 이미지의 나열, 대량 제작 방식이 바로 그 당시 문화 현상에 대한 이해이자 해석이었다.
그의 재능은 역사를 예술에 결합하는 능력이었다. 아프리카 디아스포라로서, 그의 뿌리인 카리브해의 문화유산과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투쟁을 형상화했다. 음악 분야, 특히 당시 막 등장한 재즈와 힙합, 복싱과 야구 등 스포츠를 그가 창안한 아이콘으로 그의 그림에 투사하였다.
1968년 바스키아는 자동차 사고를 당했는데 병원에 한 달 정도 입원을 했다. 퇴원 후 어머니는 그에게 해부학 책,그레이 아나토미를 선물했는데 도상들이 그에게 예술적 영감을 주었다. 해골이나 뼈, 등의 모티프들이 그의 그림 속에 자주 등장한다. 흑인 디아스포라로서 겪는 인종 차별, 불공정, 물질주의 비판의 목소리가 담겨있다. 또한 르네상스 미술을 새롭게 조명한다. 여러 예술 장르를 종합적으로 분석 이해하는 능력 또한 탁월하다. 1977년 알 디아즈와 함께 SAMOⒸ 라는 이름으로 뉴욕 그라피티에서 시작되었다. 그후 그의 예술 세계는 데생, 콜라주, 그래픽, 텍스트등 다양한 방식을 통해 한 단계 발전하는 계기를 맞는다.
그해 가을 워홀은 자신의 일기장에 “ 장-미셸이 그림을 새롭게 그리게 했다. 그것은 좋은 일이다“라고 적고 있다. 바스키아는 또한 스승을 얻게 되었다. 둘은 서로의 방식을 존중하면서 작업을 했고, 서로 많은 것을 공유하면서 깊은 대화를 나눴다. 그들의 공동 작업은 각각의 작업에 큰 영향을 미쳤다. 두 예술가의 친구인 키이스 헤링은 네 손으로 그려진 그림들에 대해서 “그것들은 정말로 발명품이다. 윌리엄 버로스William Burroughs의 발명품이고, 제 3의 정신이다. 즉 두 영혼의 결합은 새로운 제 3의 새로운 것, 즉 정말 독특하고 완전히 탁월한 것을 만들어냈다.“ 라고 평했다.
획일화된 해석이 낳은 폐해, 그것은 예술가들의 낯을 부끄럽게 하는 일이며, 예술의 잠재력을 제한하는 일이다. 현대문명을 각자의 방식으로 새롭게 이해하고 해석하여 자기의 예술 세계를 구축한 두 예술가, 두 세대를 뛰어넘는 뜻밖의 결합이 새로운 이해와 해석을 갈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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