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필리핀 이모님
국민배우 안성기(71)가 아역으로 출연한 김기영 감독의 ‘하녀’(1960)는 1950년대 한 중산층 가정에 들어온 식모(食母)가 주인 남자에게 집착하며 불륜관계를 맺고 가정을 파괴하는 이야기를 담은 스릴러다. 이 영화가 22만 관객을 동원하며 최고의 흥행작이 된 것은 1959년 경북 김천에서 일어난 실화를 모티브로 했다는 점 외에도 6·25전쟁 이후 도시 가정에 식모가 급속도로 확산한 것과 무관치 않다. 전후 가난한 농촌 가정에서는 ‘입’을 하나 덜기 위해 어린 딸을 숙식이 해결되는 도시의 식모로 보내는 경우가 많았다. 1960~1970년대 서울에선 두 집에 한 집꼴로 식모가 있었을 정도다.

처우는 열악했다. 월급이 없는 경우도 많았다. 학대와 폭력, 심지어 성범죄에 노출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식모는 경제 개발과 함께 여성 일자리가 늘어나면서 1970년대 중반부터 급감했다. 여성 인권 의식 향상과 함께 ‘식모’라는 명칭도 사라져갔다. 가정부·파출부를 거쳐 가사도우미로 명칭이 달라지면서 임금도, 직업에 대한 인식도 높아졌다. 달라지지 않은 건 가사노동의 고단함이다. 빨래, 식사 준비, 청소, 아이 돌봄까지 쉬운 게 없다. 내국인 도우미가 갈수록 줄고 고령화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전폭적 신뢰가 없으면 맡기기도 어렵다. ‘이모님’(가사도우미)을 잘 만나려면 3대가 덕을 쌓아야 한다는 말까지 있다고 한다.

정부가 필리핀 등 외국인 가사도우미 100여 명이 서울 가정에서 육아와 가사를 돕도록 시범사업을 벌이기로 했다. 가정 내 입주 서비스는 허용되지 않고, 내국인과 마찬가지로 최저임금이 적용돼 서비스 이용 대상인 20~40대 맞벌이 부부, 한부모 가정, 임산부 등이 얼마나 호응할지 미지수다. 기존의 내국인·중국동포 도우미 임금보다는 싸지만 싱가포르와 홍콩처럼 100만원 도우미를 기대한 이들에겐 실망스러울 수 있어서다.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할 것으로 보이는 필리핀 도우미는 대체로 젊고 교육 수준이 높은 데다 자녀들의 영어 교육에도 도움이 돼 특히 인기라고 한다. 외국인 도우미가 자리를 잡으려면 이들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부터 달라져야 할 것 같다. 상호 존중과 배려가 그 첫걸음이다.

서화동 논설위원 fire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