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천975㎞ 여정 끝내고 고향 가는 지광국사탑…"편안히 지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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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겹 포장하고 단단히 묶은 부재 31점, 무진동차에 실려 원주로 이동
보존 처리한 이태종 학예연구사 "'어르신'과의 만남, 내게도 성장 기회" "유물도, 사람도 다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그럼, 부재 하나하나 잘 포장해서 보낼 준비해 봅시다.
"
지난 27일 이태종 국립문화재연구원 문화재보존과학센터 학예연구사는 석조복원실 바닥에 놓여 있던 크고 작은 부재를 둘러보며 당부했다.
고려시대 탑 가운데 최고로 꼽히는 국보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탑'의 각 부분이었다.
2016년부터 약 5년간의 보존 처리를 마치고 올해로 8년째 석조복원실에 보관돼 있던 지광국사탑 부재들은 고향인 강원 원주로 갈 준비에 한창이었다.
원래 있던 원주를 떠나 서울 명동, 일본 오사카, 경복궁, 대전을 거쳐 다시 원주까지 돌아가기까지 112년, 직선거리로만 따져도 1천975km에 달하는 여정이다.
이 학예연구사는 "2015년 자료 조사부터 시작해 5년간 보존 처리를 끝내고 지속적인 점검이 필요한 옥개석(屋蓋石)과 탑신석(塔身石)을 제외한 31개 부재가 원주로 간다"고 말했다.
옥개석은 석탑의 위를 덮는 돌, 탑신석은 몸체를 이루는 돌을 각각 뜻한다.
이 학예연구사의 지휘 아래 연구원 관계자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각 부재에 맞게 제작한 나무 받침을 준비한 뒤, 조심스레 부재를 옮기고 유물 포장용 솜 포와 스티로폼으로 감싸 묶었다.
크기와 형태 모두 제각각이라 신경 쓸 부분도 많았다.
이 학예연구사는 "유물 포장만 하더라도 3겹으로 꼼꼼히 한다"며 "움직이지 않도록 단단히 결속하고 서로 부딪쳤을 때 문제가 없도록 다시금 확인하는 게 핵심"이라고 말했다.
오전부터 시작한 포장 작업은 탑 아래에 있었던 기단석(基壇石·건축물이나 비석의 기초로 쌓는 돌), 지대석(址臺石·건축물을 세우기 위해 잡은 터에 쌓은 돌)부터 이뤄졌다.
현장 관계자들은 혹여 작은 흠집이라도 날까 봐 작업 내내 조심스러운 모습이었다.
천장에 설치된 호이스트가 움직이자 현장에 있던 10여 명의 관계자들은 눈을 떼지 못했다.
길이가 3m에 이르는 석재를 들어 올려 내리기까지 약 5분, 마침내 '후'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 학예연구사는 그간의 작업을 돌아보며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며 웃었다.
연구원은 탑을 해체해 대전으로 가져온 뒤 조사와 보존 처리를 병행했다.
특히 부재 가운데 풍화 작용이나 외부 요인으로 결실된 부분은 주요 석재 산지를 조사한 뒤, 탑이 조성될 당시 쓴 석재와 가장 유사한 재질을 구해 채워 넣었다.
원래 탑이 있던 곳에서 약 10㎞ 떨어진 곳에서 나온 석재였다고 연구원 측은 귀띔했다.
특히 유리건판, 실측도면 등을 바탕으로 연구를 진행해 결실 부분의 형상을 복원하거나 1957년 수리 때 잘못 복원한 부분을 바로잡은 것은 의미 있는 성과다.
이 학예연구사는 "지광국사탑은 나에게 있어 오랜 기간 모신 어르신 같다"면서 "문화유산을 보존·복원하는 한 사람으로서 나 역시 한발짝 더 성장했다고 본다"고 소회를 밝혔다.
다만, 그는 "옥개석과 탑신석은 상태가 안 좋은 데다 과거 시멘트로 복원했던 부분까지 있어 쉽지 않았다"며 "'치료'를 해도 지금 기술로는 안 되는 부분은 아쉬웠다"고 말했다.
그는 주요 석재 산지를 확인했으나, 그 범위를 넓히지 못한 점에도 아쉬움을 드러냈다.
이 학예연구사는 "조선왕릉 중 하나인 화성 융릉과 건릉 관련 기록을 보면 강화, 해주, 수원 등에서 돌을 캐냈다.
이 중 북한 황해도의 해주는 지금도 유명한 채석 산지"라고 말했다.
지광국사탑의 부재들은 당분간 부재 형태로 있을 예정이다.
지난 2019년 원주로 돌려보낸다는 큰 그림은 결정됐으나, 어디에 둘지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탑이 원래 있었던 야외에 둘지, 법천사지 유적전시관에 둘지 보존 환경 및 조건 등을 놓고 논의 중이다.
원위치에 두면 옛 모습을 찾고 본연의 의미를 더할 수 있으나 우려되는 점도 많다.
최근 발생한 집중호우처럼 비바람에 꾸준히 노출됐을 때 피해 역시 걱정되는 부분이다.
이 학예연구사는 "탑의 복원 위치와 관련한 연구 용역을 진행했고, 올해 10월께 문화재위원회에 관련 안건을 올릴 예정"이라며 10∼11월께 최종 위치가 결정되리라 내다봤다.
그러면서 "어디가 되었든 탑과 탑비가 어울릴 수 있는 공간이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채비를 마친 부재들은 무진동 차량 6대로 원주로 이동한다.
당분간 전시관에서 상설 전시할 계획이며, 최종 위치가 결정되면 탑을 완성할 방침이다.
지광국사탑은 고려시대 승려에게 내려지는 최고 법계인 '국사'(國師)를 받은 지광국사 해린(984∼1067) 사리를 모신 탑이다.
탑비와 함께 1962년 국보로 지정됐다.
원래 탑은 원주 법천사 터에 있었으나, 일제강점기인 1911년 일본인에 의해 서울로 옮겨졌다가 이듬해 오사카로 반출되는 등 10여 차례 각지를 전전했다.
/연합뉴스
보존 처리한 이태종 학예연구사 "'어르신'과의 만남, 내게도 성장 기회" "유물도, 사람도 다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그럼, 부재 하나하나 잘 포장해서 보낼 준비해 봅시다.
"
지난 27일 이태종 국립문화재연구원 문화재보존과학센터 학예연구사는 석조복원실 바닥에 놓여 있던 크고 작은 부재를 둘러보며 당부했다.
고려시대 탑 가운데 최고로 꼽히는 국보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탑'의 각 부분이었다.
2016년부터 약 5년간의 보존 처리를 마치고 올해로 8년째 석조복원실에 보관돼 있던 지광국사탑 부재들은 고향인 강원 원주로 갈 준비에 한창이었다.
원래 있던 원주를 떠나 서울 명동, 일본 오사카, 경복궁, 대전을 거쳐 다시 원주까지 돌아가기까지 112년, 직선거리로만 따져도 1천975km에 달하는 여정이다.
이 학예연구사는 "2015년 자료 조사부터 시작해 5년간 보존 처리를 끝내고 지속적인 점검이 필요한 옥개석(屋蓋石)과 탑신석(塔身石)을 제외한 31개 부재가 원주로 간다"고 말했다.
옥개석은 석탑의 위를 덮는 돌, 탑신석은 몸체를 이루는 돌을 각각 뜻한다.
이 학예연구사의 지휘 아래 연구원 관계자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각 부재에 맞게 제작한 나무 받침을 준비한 뒤, 조심스레 부재를 옮기고 유물 포장용 솜 포와 스티로폼으로 감싸 묶었다.
크기와 형태 모두 제각각이라 신경 쓸 부분도 많았다.
이 학예연구사는 "유물 포장만 하더라도 3겹으로 꼼꼼히 한다"며 "움직이지 않도록 단단히 결속하고 서로 부딪쳤을 때 문제가 없도록 다시금 확인하는 게 핵심"이라고 말했다.
오전부터 시작한 포장 작업은 탑 아래에 있었던 기단석(基壇石·건축물이나 비석의 기초로 쌓는 돌), 지대석(址臺石·건축물을 세우기 위해 잡은 터에 쌓은 돌)부터 이뤄졌다.
현장 관계자들은 혹여 작은 흠집이라도 날까 봐 작업 내내 조심스러운 모습이었다.
천장에 설치된 호이스트가 움직이자 현장에 있던 10여 명의 관계자들은 눈을 떼지 못했다.
길이가 3m에 이르는 석재를 들어 올려 내리기까지 약 5분, 마침내 '후'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 학예연구사는 그간의 작업을 돌아보며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며 웃었다.
연구원은 탑을 해체해 대전으로 가져온 뒤 조사와 보존 처리를 병행했다.
특히 부재 가운데 풍화 작용이나 외부 요인으로 결실된 부분은 주요 석재 산지를 조사한 뒤, 탑이 조성될 당시 쓴 석재와 가장 유사한 재질을 구해 채워 넣었다.
원래 탑이 있던 곳에서 약 10㎞ 떨어진 곳에서 나온 석재였다고 연구원 측은 귀띔했다.
특히 유리건판, 실측도면 등을 바탕으로 연구를 진행해 결실 부분의 형상을 복원하거나 1957년 수리 때 잘못 복원한 부분을 바로잡은 것은 의미 있는 성과다.
이 학예연구사는 "지광국사탑은 나에게 있어 오랜 기간 모신 어르신 같다"면서 "문화유산을 보존·복원하는 한 사람으로서 나 역시 한발짝 더 성장했다고 본다"고 소회를 밝혔다.
다만, 그는 "옥개석과 탑신석은 상태가 안 좋은 데다 과거 시멘트로 복원했던 부분까지 있어 쉽지 않았다"며 "'치료'를 해도 지금 기술로는 안 되는 부분은 아쉬웠다"고 말했다.
그는 주요 석재 산지를 확인했으나, 그 범위를 넓히지 못한 점에도 아쉬움을 드러냈다.
이 학예연구사는 "조선왕릉 중 하나인 화성 융릉과 건릉 관련 기록을 보면 강화, 해주, 수원 등에서 돌을 캐냈다.
이 중 북한 황해도의 해주는 지금도 유명한 채석 산지"라고 말했다.
지광국사탑의 부재들은 당분간 부재 형태로 있을 예정이다.
지난 2019년 원주로 돌려보낸다는 큰 그림은 결정됐으나, 어디에 둘지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탑이 원래 있었던 야외에 둘지, 법천사지 유적전시관에 둘지 보존 환경 및 조건 등을 놓고 논의 중이다.
원위치에 두면 옛 모습을 찾고 본연의 의미를 더할 수 있으나 우려되는 점도 많다.
최근 발생한 집중호우처럼 비바람에 꾸준히 노출됐을 때 피해 역시 걱정되는 부분이다.
이 학예연구사는 "탑의 복원 위치와 관련한 연구 용역을 진행했고, 올해 10월께 문화재위원회에 관련 안건을 올릴 예정"이라며 10∼11월께 최종 위치가 결정되리라 내다봤다.
그러면서 "어디가 되었든 탑과 탑비가 어울릴 수 있는 공간이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채비를 마친 부재들은 무진동 차량 6대로 원주로 이동한다.
당분간 전시관에서 상설 전시할 계획이며, 최종 위치가 결정되면 탑을 완성할 방침이다.
지광국사탑은 고려시대 승려에게 내려지는 최고 법계인 '국사'(國師)를 받은 지광국사 해린(984∼1067) 사리를 모신 탑이다.
탑비와 함께 1962년 국보로 지정됐다.
원래 탑은 원주 법천사 터에 있었으나, 일제강점기인 1911년 일본인에 의해 서울로 옮겨졌다가 이듬해 오사카로 반출되는 등 10여 차례 각지를 전전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