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세 때 미국 이주 후 억울한 옥살이…10년 복역 후 자유의 몸
미국 가서 이철수 면회하기도…"인상 좋고 자존심 강한 청년"
'살인누명 이철수 구명운동' 이문우 "외국인노동자 잘 대하자"
"철수가 (출소 후) 한국에 와서 살았으면 괜찮았을 것인데…. 한국으로 불러올 것을 그랬어요.

"
12세 때 미국으로 이주한 뒤 살인 누명을 쓰고 10년 넘게 구금됐다 풀려난 이철수(1952∼2014) 씨 구명 운동에 참여했던 이문우(86) 전 한국교회여성연합회 총무는 이 사건을 다룬 다큐멘터리 '프리 철수 리'를 미리 본 소감을 이렇게 말했다.

'프리 철수 리'는 9월 개봉 예정이며 최근 관계자를 초청한 시사회가 서울에서 열렸다.

'살인누명 이철수 구명운동' 이문우 "외국인노동자 잘 대하자"
이철수 씨는 각계의 노력으로 1983년 석방돼 자유의 몸이 됐고 한동안 주목받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이후 삶은 여전히 불운했다.

여러 사건에 휘말려 다시 감옥에 가기도 했고 화재로 심각한 화상을 입기도 했다.

건강이 좋지 않아 62세로 생을 마감했다.

이 전 총무는 만약 이철수 씨가 출소 후 한국으로 돌아왔다면 그의 삶이 달라졌을지도 모른다며 지난 25일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아쉬움을 표명했다.

이철수 구명운동은 새크라멘토 유니언지 기자였던 이경원 씨와 후일 국회의원을 지낸 유재건(1937∼2022) 변호사를 중심으로 미국에서 먼저 시작됐다.

1978년 무렵 소식을 전해 들은 한국교회여성연합회가 나서면서 한국에서도 구명 운동이 확산했다.

이 전 총무는 모금, 탄원서 보내기, 격려 편지 쓰기, 석방 기원 기도 등의 활동을 주도하며 이철수 석방을 위해 힘을 보탰다.

그는 1980년 6월 미국을 방문해 수감 중인 이철수 씨를 직접 면회하기도 했다.

이 전 총무는 이철수 씨의 인상이 정말 좋았고 동시에 자존심도 강해 보였다고 회고했다.

'살인누명 이철수 구명운동' 이문우 "외국인노동자 잘 대하자"
"'이렇게 좋은 아이가 여기 들어와서 있구나' 생각했어요.

키는 크지 않지만 제가 볼 때는 아주 똑똑하고 그랬어요.

밖에서 당신 구명 운동을 하고 있으니까 건강하게 잘 견뎌라. 그러면 꼭 출소할 것이라고 했더니 고맙다는 인사를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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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전 총무는 "40년도 더 된 이야기가 지금 영화로 나오는 것"이라며 "더 빨리 나왔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반응했다.

그는 이철수 구명운동을 열성적으로 해서 '이철수 엄마'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던 박순금(1996년 작고) 전 한국교회여성연합회장을 떠올리며 "이철수 엄마가 지금 살아 있었으면 이 영화를 보고 얼마나 많이 울었겠냐"고 말했다.

'살인누명 이철수 구명운동' 이문우 "외국인노동자 잘 대하자"
이철수는 12세 때 어머니를 따라 미국으로 이주했으나 빈민가에서 생활했고 영어도 서툴러 문제아 취급을 받으며 살았다.

그는 1973년 6월 3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차이나타운에서 발생한 중국 갱단 간부 살해 사건의 용의자로 지목돼 구속 기소됐다.

치우친 증언에 의지해 빠르게 진행된 재판에서 이철수는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복역 중이던 1977년 10월 8일 백인 갱단원이 자신에게 달려들자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갱단원의 흉기를 빼앗아 휘둘렀다.

갱단원이 숨지는 바람에 이철수는 일급 살인 혐의로 추가 기소돼 사형 판결을 받게 됐다.

이철수는 중국인 갱단 간부 사망 사건에서 무죄 판결을 받아야 할 뿐 아니라 두 번째 사건이 정당방위라는 것을 인정받아야 하는 설상가상의 처지에 놓였다.

이 전 총무는 '두 번 살인한 한국인이 사형 선고를 받게 된다'는 기사를 보고 이경원 씨가 법정에 찾아간 것이 이철수 씨 구명운동이 시작된 계기였다고 소개했다.

'살인누명 이철수 구명운동' 이문우 "외국인노동자 잘 대하자"
"(법정에서) 이철수가 '퉤'하고 침을 뱉더라는 거예요.

이경원 기자는 '한국 사람이 이런 행동을 한다는 것은 억울하다는 표시다.

이것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래서 6개월에 걸쳐서 재판 기록을 다 복사해서 몇천 페이지나 되는 것을 다 검토했는데 완전히 억울한 사건이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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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통과 통신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절 미국에서 벌어지는 재판을 놓고 한국에서 구명 운동을 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고 이 전 총무는 회고했다.

"한국이 아니고 미국에서 벌어진 사건인데 사람들한테 그냥 입으로만 전하려고 하니까 그게 좀 어려운 일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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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여성연합회는 긴밀한 관계에 있던 단체인 미국교회여성연합회에 이철수 사건을 알리고, 공정한 재판을 해달라는 탄원서를 판사에게 보내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살인누명 이철수 구명운동' 이문우 "외국인노동자 잘 대하자"
연합회에 소속된 7개 교단은 물론 여자기독교청년연합(YWCA) 등 관련 단체에 이철수 사건을 알리고 각종 홍보 자료를 만드는 등 대대적인 구명운동을 벌였다.

결국 각계가 힘을 모은 가운데 중국 갱단 간부 살해 사건에 대해 1983년 2월 이철수의 무죄 판결이 확정됐다.

같은 해 3월 유재건 변호사와 재미 일본인 3세 야마다 란코 씨의 부모가 보증금으로 각각의 집을 내건 끝에 이철수는 보석으로 풀려났다.

이후 변호인단은 옥중 살인에 대해서는 이철수가 앞서 억울하게 수감된 기간을 살인 사건에 대한 복역으로 인정하도록 검찰과 플리바게닝(유죄협상)을 해서 이철수의 법정 투쟁을 종결했다.

'살인누명 이철수 구명운동' 이문우 "외국인노동자 잘 대하자"
이철수 사건은 미국 사법제도가 한때나마 소수 민족에게 편파적이었다는 점을 보여주는 사건인 동시에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시절 더 나은 삶을 찾아 이주한 한국인들이 겪었던 애환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40년이 지난 오늘날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지위는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이 상승했다.

하지만 이 전 총무는 한국 사회에 새로운 구성원으로 자리 잡은 이주민을 대할 때 이철수 사건을 타산지석으로 삼을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한국에서 타국에 간) 이민자들이 큰 어려움을 당했다는 것을 확실하게 이해하고 이제부터 우리는 우리나라에 들어오는 외국인 노동자들을 잘 이해하고 잘 대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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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