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서 탈북민 결혼 브로커 60세 여성, 이례적 인터뷰
'장길수 가족 구명' 운동가 덕에 한국행…"탈북민 트라우마 치료 지원해야"
[탈북人](16) "중국서 팔려 간 딸 생각하며 탈북여성들 시집보내"
"19살에 중국인 남성에게 팔려 간 내 딸을 생각하며 시집보냈어요.

"
탈북여성을 중국 남성에게 시집 보내는 브로커를 하다가 공안에 잡혀 5년간 옥살이를 한 심경숙(가명·60)씨는 지난 26일 서울 마포구 극동방송 카페에서 진행한 인터뷰에서 이같이 말했다.

소위 브로커 출신이 인터뷰에 응한 것은 이례적으로, 심씨는 얼굴과 본명 공개를 꺼렸다.

그는 "탈북여성들을 배부르게 먹이고 북한 내 가족을 조금이라도 도와줄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며 "당시 한국을 제대로 알았다면 바로 데려왔을 것"이라고 했다.

심씨는 출소 후 북송 위기에 처했다가 2018년 7월 극적으로 구출됐다.

심씨 딸의 간곡한 요청을 받은 문국한 북한인권국제연대 대표가 1년간 정부와 함께 노력한 덕분이다.

앞서 문 대표는 2001년 한국 땅을 밟은 장길수씨 일가족 15명의 구명활동을 했다.

심씨는 이날 문 대표와 북한인권과 민주화 실천운동연합이 극동방송에서 개최한 장길수씨 가족 그림·사진 전시회를 관람했다.

심씨는 "그림에 나온 것 같은 공개 처형 장면을 3차례 봤다"며 "중국 감옥에서 북송과 처형이 두려워 매일 울다가 고문을 당했으며 지금도 후유증에 시달린다"고 했다.

그는 "배가 고파 중국에 왔다가 잡힌 탈북민 2천여명이 조만간 북송되면 정치범으로 몰려서 죽는다"며 정부의 구조 노력과 함께 탈북민들의 트라우마 치료 지원도 당부했다.

[탈북人](16) "중국서 팔려 간 딸 생각하며 탈북여성들 시집보내"


다음은 문답.
-- 전시회를 본 소감은.
▲ 죄다 사실이다.

공개 처형을 3번 봤는데 지금도 가슴이 떨린다.

'고난의 행군' 시기인 1995년 남편을 죽인 여성을 민족 반역자라며 이가 다 부서지도록 때린 뒤 가족 등이 보는 앞에서 총살했다.

비슷한 시기 직장이 있던 평안남도 안주시에서 여성들을 살해한 목욕탕 근무자가 공개 처형됐다.

1998년 여름 본가 근처 함경북도 길주군 장마당에서 인육 판매 의혹을 받은 노인이 공개 교수형에 처했다.

-- 고향은 어디인가.

▲ 1963년 함경북도 명천군에서 태어났다.

24살에 딸아이를 가졌는데 집안 반대로 결혼을 못 한 채 홀로 키웠다.

1996년 6월 회령시에 사는 언니에게 딸을 맡긴 채 처음 중국으로 갔다가 지린(吉林)성의 중국 남성에게 팔려 갔는데 딸이 보고 싶어 자꾸 도망치자 넉 달 만에 놔줬다.

중국 파출소에서 탈출을 눈감아주기도 했지만, 다시 돌아가려고 북송을 택했다.

청진시의 도 집결소로 이송됐는데 20일 만에 풀려났다.

이후로도 2000년까지 5차례 더 탈북을 시도했는데 매번 잡혔다.

[탈북人](16) "중국서 팔려 간 딸 생각하며 탈북여성들 시집보내"
-- 중국 생활은 어땠나.

▲ 2006년 딸을 데리고 양강도 혜산을 거쳐 중국에 왔는데 브로커들이 어리고 예쁜 딸을 서로 데려가려고 했다.

딸과 함께 살 수 있는 부잣집에 팔려 가지 못하는 신세여서 브로커들에게 딸이 잡혀서 북송되지 않도록 공안 친척을 둔 집안에 시집 보내달라고 당부했다.

나는 한족 남성에게 시집갔다가 도망 나와 딸이 사는 랴오닝(遼寧)성 마을의 조선족 남성과 재혼했다.

매일 딸에게 전화했고 연락이 되지 않으면 시댁에 찾아가기도 했다.

-- 브로커는 어떻게 하게 됐나.

▲ 2008년 여름 북한에 있는 언니가 굶어 죽을 처지라고 하소연했다.

남편이 돈을 보낼 수 없는 처지여서 브로커 친구가 데려온 탈북여성 4명 중 시집가지 않은 1명을 결혼시키고 수수료를 챙겨 언니에게 줬다.

2011년 가을부터는 북한에서 여성을 데려와 중국 남성에게 시집보내는 일을 했다.

중국인에게 탈북여성을 본처로 대하고 북한 가족에 돈을 지원하도록 당부했다.

-- 결혼한 여성들로부터 원망을 듣지는 않았나.

▲ 여러 쌍을 결혼시켰는데 원망 들은 경우는 거의 없었다.

탈북여성은 부모가 중국으로 보냈거나 자발적으로 온 경우로 분류된다.

부모가 보낸 여성은 정기적으로 친정에 돈을 부칠 형편이 되는 가정에 소개했다.

홀로 온 여성은 돈이 많지 않더라도 평생 가족처럼 보살펴 줄 수 있는 가정으로 보냈다.

잡힐 위험을 무릅쓰고 여성 집을 찾아가 중국인 가족과 소통에 도움을 주기도 했다.

한국에서 어떤 여성이 나를 보며 웃으면서 '엄마도 왔네. 날 잊어버렸나 보다'라며 지나가기도 했다.

-- 어쩌다 중국 공안에 체포됐나.

▲ 2013년 탈북여성을 중국 부잣집에 소개했다가 남자가 정상인이 아닌 것 같아 돈을 돌려주고 취소하려고 했는데 동업자가 반대했다.

할 수 없이 전화번호를 주고 문제가 생기면 언제든 연락하라고 했다.

그런데 결혼 두 달 후 시아버지가 사위들을 데려와 폭행한 뒤 성폭행까지 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 여성이 선양(瀋陽) 공안에 신고했는데 중국인들은 돈 주고 풀려났지만 도리어 여성은 체포돼 북송됐다.

브로커였던 나는 재판에서 5년형을 선고받고 2018년 3월까지 복역했다.

[탈북人](16) "중국서 팔려 간 딸 생각하며 탈북여성들 시집보내"
-- 옥살이는 어땠나.

▲ 2년 7개월간 구치소에 있었는데 하루 종일 책상다리로 앉아 있게 시켜 다리 연골이 닳고 뼈가 변형됐다.

1년 후 딸이 중국인 남편을 따라 이전에 '생지옥'으로만 알았던 남조선으로 간 것을 알고 불안해졌다.

나도 북송 후 처형될까 봐 걱정돼 매일 울었다.

선양교도소로 이송된 뒤 다른 수감자와 싸웠다가 공안에 끌려가 의자에 팔, 다리를 묶은 채 전기곤봉으로 머리를 구타당하거나 족쇄로 팔, 다리를 벌린 채 장시간 누워있는 고문을 당하기도 했다.

-- 한국에는 어떻게 왔나.

▲ 딸의 하소연을 들은 문국한 대표가 정부에 요청하고 항공권까지 지원해 준 덕분에 2018년 7월 7일 한국에 왔다.

그동안 고문과 설움 탓에 우울증에 걸려 집에서 두문불출하기도 했지만, 북한인권국제연대 분들의 전화나 방문 덕분에 조금씩 나아졌다.

탈북민의 트라우마 치유를 위한 지원이 필요하다.

나처럼 도움이 꼭 필요한 탈북민에게 정부 지원이 연결될 수 있도록 난립한 탈북민 지원단체가 한두 개 대형 단체로 통합되면 좋겠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