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바비'가 촉발한 남성성 논쟁…'진짜 남성'에 대한 정의는 [글로벌 핫이슈]
미국에서 성차별에 대한 논쟁이 다시 심화하고 있다. 내년 대선을 앞두고 전통적인 남성성을 강조하는 공화당 의원들이 영화 '바비'를 겨냥한 비판을 쏟아내고 있다. 영화 속 남자 주인공이 전통적인 '남성성(Masculinity)'을 비하하고 있다는 비판이다. 남성성에 대한 정의가 모호해지면서 성 역할을 재정립해야 한다는 주장도 확산하는 모습이다.

영화 '바비'가 촉발한 남성성 논쟁

최근 워싱턴포스트(WP), MSNBC, 비즈니스 인사이더, 폭스 뉴스 등 정파 가리지 않고 외신에서 영화 '바비'를 둔 분석 기사가 쏟아졌다. 영화 바비는 지난 21일 북미에서 개봉한 뒤 주말 동안 1억 5500만달러를 벌어들이며 역대 네 번째로 높은 수익을 올린 작품에 등극했다. 여성 감독이 연출한 영화로는 역대 최대 수익이다.

바비는 1959년 마텔사가 선보인 금발 인형 '바비'를 소재로 한 영화다. 바비 인형들이 사는 가상 세계인 '바비 랜드'를 배경으로 삼았다. 바비 인형이 주류인 세계에서 남성 주인공 '켄'은 그저 액세서리 역할에 그친다. 현실을 풍자하는 블랙 코미디다. 이전 작품들에서 다양한 여성의 삶을 그려온 그레타 거윅 감독이 연출을 맡았다. 남성 중심적 현실과 정반대 모습인 ‘거울 세계’를 스크린에 옮긴 것이다.

문제는 바비의 내용을 두고 거친 비판이 쏟아졌다. 지난 25일 MSNBC에 따르면 한 우파 비평가들은 바비를 두고 "남성 혐오를 부추기며 아이들에게 왜곡된 성 윤리를 가르치는 '핵폭탄급' 페미니즘 영화"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영화가 전통적인 남성성을 '유해한(Toxic)'한 것이라고 묘사했다는 지적이다.

평단뿐 아니라 정계에서도 바비에 대한 논쟁이 촉발됐다. 조시 홀리 주니어 상원의원(공화당)은 폭스뉴스를 통해 "남성성은 유해하지 않다"며 "성별 갈등을 심화해서 분열을 조장하는 좌파의 술수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브렌다 하페라 헤리티지재단 연구원은 "실제 남성들이 알코올 중독에 빠질 확률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며 "극단적 선택을 하는 남성도 크게 늘었다. 현재 교육체계에선 남성에 대한 관용성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라고 지적했다.

정치 성향에 따라 관점 크게 갈려

정치권이 되레 성 갈등을 조장해 유권자를 끌어모은다는 지적도 나온다. 홀리 의원은 지난 6월 전통적인 남성적인 미덕에 대해 다룬 책 '맨후드'를 선보였다. 대선 주자인 론 드섄티스 플로리다주지사는 지난달 '강한 남성'을 묘사하며 성소수자를 깎아내리는 동영상을 소셜미디어(SNS)에 올리기도 했다. 남성성의 회복을 내세워 젊은 보수층을 결집한다는 주장이다.

실제 정치적 성향에 따라 성 갈등을 인지하는 방식이 첨예하게 갈리고 있다. 지난 5월 리서치회사 입소스와 폴리티코가 미국 국민 1016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정치 성향에 따라 성을 인지하는 방식도 큰 차이를 보였다. 우선 제조업 일자리 감소로 인해 남성의 재정 상태가 악화했다는 질문에 민주당 지지자는 26%가 동의했고, 공화당은 68%가 동의했다.

"'미투(#me too)' 운동으로 인해 직장 내에서 자유롭게 발언하기 어렵다"는 제시문을 두고선 공화당 지지자는 65%가 동의했고, 민주당 지지자는 21%만 "그렇다"고 답했다. "여성 차별은 미국의 주요 안건이 아니다"라는 물음에 공화당 지지자는 36% 동의했고, 민주당은 4%에 그쳤다.
영화 '바비'가 촉발한 남성성 논쟁…'진짜 남성'에 대한 정의는 [글로벌 핫이슈]
영화 '바비'가 촉발한 남성성 논쟁…'진짜 남성'에 대한 정의는 [글로벌 핫이슈]
영화 '바비'가 촉발한 남성성 논쟁…'진짜 남성'에 대한 정의는 [글로벌 핫이슈]
또 "아버지가 회사에 다니고, 어머니가 주부 역할을 맡는 전통적인 가부장제가 자녀의 성공을 돕는 데 가장 적합한 가족 형태다"라는 제시문에는 공화당 지지자는 52%가 동의했고, 민주당 지지자는 16%로 집계됐다.

폴리티코는 미국 정치인들의 발언을 제시하고 이에 대한 반응도 살폈다. 홀리 의원이 "남성은 책임감을 키워야 한다. 놀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은 국가에 바람직하지 않다"라고 말한 것에 대해 공화당 지지자는 81%가 동의했고, 민주당 지지자는 59%만 동의했다.

다만 공화당 지지자들은 민주당 의원이 제시하는 남성성에도 동의했다. 루카스 쿤스 상원의원(민주당)의 "남성성은 지역 사회, 가족, 이웃을 비롯한 타인을 돌보고 신념을 갖는 것을 뜻한다"라는 발언에 대해 응답자의 68%가 이를 지지한다고 밝혔다. 바람직한 인간에 대한 설명도 남성적인 특성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실제 민주당과 공화당 의원 모두 '알파 메일(우두머리 수컷)'을 지향하는 캠페인을 벌인 바 있다. 민주당 대선후보인 로버트 F. 케네디 주니어 의원은 팔굽혀 펴기를 하는 모습을 유세 영상에 담았고, 드섄티스 주지사는 보디빌더와 함께 운동하는 영상을 퍼트렸다.

폴리티코는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와 마크 주커버그 메타 CEO가 갈등을 해소하는 방식도 몸싸움으로 귀결됐다"며 "전통적인 남성성에 대한 동경을 보여주는 사례다"라고 설명했다.

남성성의 실종

워싱턴포스트(WP)는 이 현상을 '남성성의 실종'이라고 진단했다. 지난 10일 "남성들이 길을 잃었다"라는 칼럼을 통해 현대 남성들이 지향해야 하는 이상적인 남성상이 사라졌다고 지적했다.

가장 큰 원인은 산업구조의 변화가 꼽힌다. 육체 노동을 중시했던 과거와 달리 소통 능력과 이성이 더 중요한 역량으로 평가받고 있다. 여성 인권을 보장하는 법안도 점차 확대되면서 여성의 경제활동참가율도 크게 늘었다. 지난달 핵심노동인구(25~54세) 중 여성의 경제활동 참가율이 77.8%로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전통적인 남성성을 떠받치던 '부양자' 역할은 제거됐다. 전미경제연구소(NBER)에 따르면 1999~2018년 사이 25~34세 남성의 고용 감소 폭이 모든 계층에서 가장 컸다. 공장 자동화가 확산되면서 생산직 일자리가 줄어든 탓이다.

학력 격차도 역전됐다. WP에 따르면 지난해 여성이 대학교 학부 학위를 100개 취득하는 동안 남성은 74개만 받았다. 고졸 성인의 74%는 남성인 것으로 나타났다. 남성보다 여성의 학습 기회가 늘고 있다는 분석이다. TD에머리트레이트가 2020년 설문조사한 결과 남편보다 임금이 많은 여성의 비율은 50%로 집계됐다. 1960년 4%대에서 큰 폭으로 늘었다.

젊은 남성 끌어모으는 우파

여성권이 확대되면서 남성의 입지가 줄었다는 불만이 제기된다. 학벌과 임금 측면세어 더 나은 조건을 갖춰야 한다는 설명이다. 미국의 대중심리학 매체인 사이콜로지 투데이는 지난해 "연애에 대한 기준이 높아지면서 이성애자 남성의 데이트 기회가 줄고 있다"고 진단한 바 있다. 이 같은 현상 때문에 '비자발적 독신 남성(INCEL·인셀)'이란 용어도 대중화하는 모습이다.

남성성이 위축된 틈을 우파 지식인이 파고들었다. 조던 피터슨 토론토대 심리학과 교수와 홀리 의원 등이 대표적이다. 전통적인 남성성과 가부장제를 옹호하며 젊은 남성들에게 인기를 끌었다. 전직 킥복싱 선수인 앤드류 테이트는 '대안 우파'를 자칭하며 여성혐오 발언을 쏟아냈다. 순식간에 수백만 명의 구독자를 지닌 인플루언서로 떠올랐다. 테이트는 지난해 성폭행·인신매매 혐의로 루마니아서 체포됐다.

문제는 이들 역시 '바람직한 남성'을 지칭할 수 없다는 점이다. 강한 남성을 좇기 위해선 과거로 회귀하는 수밖에 없다. 남성을 부양자로 정립하고, 여성을 양육자로 정의하는 식이다. 시대를 역행한다는 비판을 받을 여지가 있다.

실제 2018년 미국 심리학회는 '소년과 남성을 위한 심리학적 실천을 위한 가이드라인'을 통해 "전통적인 남성성은 금욕, 경쟁, 우월, 공격으로 특정되며 전반적으로 해롭다"라며 "폭력을 숭배하고 약점을 가리는 등 특정 기준이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 해를 끼칠 것"이라고 정의한 바 있다.

한 민주당 관계자는 WP에 "'무해한 남성성'이 여성스럽다고 받아들이는 선입견부터 깨트려야 한다"며 "실제 남성들을 위한 정책을 구상할 때도 도움받는 행위를 '여성스럽다'며 거부하는 남성들로 인해 번번이 좌절된 적이 있다"고 토로했다.

크리스틴 엠바 칼럼니스트는 "성별의 특수성은 인정하고 서로를 협력자로 인정하는 성 담론이 필요한 시점이다"라며 "새로운 남성성과 남성의 규범에 대한 정립이 없다면 사회적 혼란이 더 커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오현우 기자 oh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