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패션 브랜드 톰 브라운
2023 오트 쿠튀르 패션쇼
"다시 없을 기회" 한 편의 연극처럼
탄생 20년밖에 안된 美 브랜드
콧대 높은 佛 '오트 쿠튀르' 데뷔
기차역으로 꾸민 파리 오페라극장
자유롭게 드나드는 비둘기룩 모델들
종이 군중 뒤 진짜 관객은 300명뿐
1980년 나온 영국 밴드 비지지의 곡 ‘페이드 투 그레이’와 함께 등장한 이 방랑자의 이름은 알렉 웩. 밀레니얼 세대를 대표하는 모델이다. 프랑스 오페라 극장에서 40분간 연출된 이 쇼는 연극도, 뮤지컬도 아니었다. 바로 미국 패션 브랜드 톰 브라운의 2023년 가을·겨울 컬렉션 패션쇼다.
패션 배운 적 없는 판매사원의 반전
톰 브라운은 1965년 미국 펜실베이니아에서 태어나 노트르담대에서 경제학을 공부하다 중퇴한 인물. 영화배우를 꿈꾸다 1997년 뉴욕으로 건너와 조르지오 아르마니 매장에서 판매 사원으로 일을 시작했다. 클럽모나코 디자이너로 스카우트된 뒤 크리에이티브팀을 이끌면서 패션 디자인을 모두 현장에서 익힌 ‘실전파’다.
2001년 클럽모나코를 나와 뉴욕 트라이베카에 자신의 이름을 건 ‘톰 브라운’ 매장을 연 그는 오직 그레이 슈트만 제작했다. 하지만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던 톰 브라운은 브룩스브러더스, 몽클레어 등과 협업하며 사세를 키웠다. 클래식하면서도 자연스러운 디자인의 톰 브라운은 레드, 네이비, 화이트의 ‘삼선’ 시그니처를 만들어냈다.
2000명의 가짜 ‘골판지 군중’
공허한 나그네 웩이 자리에 앉아 먼 산을 응시하는 동안 뒤로 모델들이 톰 브라운의 새로운 컬렉션을 입고 차례차례 등장했는데, 모든 옷은 ‘비둘기’였다. 평화의 상징에서 어느샌가 혐오의 대상이 된 비둘기가 명품 브랜드 런웨이의 메인 콘셉트가 됐다.
프랑스 기차역을 자유롭게 드나드는 손님인 비둘기처럼 모델들의 손과 발에는 깃털을 떠올리게 하는 여러 디테일이 달려 있다. 한껏 꾸민 이들의 머리 위엔 비둘기 모자가 씌워졌고, 런웨이의 핵심과도 같은 구두도 비둘기의 발을 본떠 만들었다. 이른바 ‘비둘기 룩’을 선보이는 모델들은 워킹을 하며 비둘기가 날개를 퍼덕이는 듯한 제스처도 취한다.
더 화제를 모은 건 객석이었다. 좌석을 가득 채운 2000명의 사람은 모두 골판지 모형이다. 극장의 가장 노른자 자리를 가짜 사람으로 채운 것도 그만의 위트가 돋보이는 연출이었다. 이 사람들 또한 쇼 기획팀이 하나하나 손으로 만들었다고.
58점의 ‘비둘기룩’…“美패션의 새 역사”
단조롭고 단정한 회색 슈트는 쇼가 계속될수록 점점 화려한 색과 무늬를 입었다. 금색과 은색 스팽글이 한가득 덮이기도 하고, 시골 마을 풍경이 그려진 조각보를 이어 붙이기도 했다. 이날 브라운은 총 58벌의 옷을 선보였다. 모두 손으로 한땀한땀 만들었다고 생각하면, 그 노동의 시간은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다.
쇼의 대미는 올해 새롭게 선보이는 브라이덜 컬렉션이 차지했다. 컬렉션을 입은 모델들이 모두 나오며 브라운의 약 40분간 데뷔 드라마가 끝났다.
이날 무대에 오른 톰 브라운은 “프랑스 정통 명품이 아닌 미국 패션의 전통을 쿠튀르 무대에 세웠다는 건 정말 특별한 일”이라며 “이번 쇼는 단순히 우리 브랜드를 넘어 미국 패션을 대표할 만한 사건”이라고 말했다.
최지희 기자 mymasak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