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망구는 힘이 세!" 늙은 여성, 범고래와 백호로 만든 제이디 차
▲제이디 차 '미래의 우리들'(2023)

파괴와 혁신은 주로 경계에서 탄생한다. 이쪽도 저쪽도 아닌 곳에 서야만 보이는 '어떤 것들'이 동력이다. 경계인의 시선으로 바라보면 아주 흔한 것들도 온통 새로워진다. 우리가 알고도 지나쳤던 것들은, 그렇게 강인한 생명력을 얻는다.
"할망구는 힘이 세!" 늙은 여성, 범고래와 백호로 만든 제이디 차
런던에서 활동 중인 한국계 캐나다 작가인 제이디 차(39·사진)는 '할머니'를 그렇게 봤다. 한국 신화 속 세상을 창조한 여신 '마고(麻姑)할미'로 몇 년 전부터 세계 미술계를 발칵 뒤집었다.

그의 그림 속 할머니는 여우의 모습과 결합하거나, 범고래가 되어 육지와 바다의 생물들을 품는다. 지혜 가득한 눈빛으로 미래의 여신이 되기도 한다. 나약하고 힘 없는 존재였던 우리들의 할머니를 강인하고 우아하고 힘이 센, 위풍당당한 지도자의 모습으로 그려낸다.
"할망구는 힘이 세!" 늙은 여성, 범고래와 백호로 만든 제이디 차
▲제이디 차 '집'(2023)


지난 13일 서울 마곡동 스페이스K에서 개막한 제이디 차의 개인전 '구미호 혹은 우리를 호리는 것들 이야기(Nine Tailed Tall Tales: Trickster, Mongrel, Beast)'는 한국 문화와 설화에서 영감받은 그의 작품 33점이 소개됐다. 한국계 캐나다인으로 겪었던 개인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혼종의 정체성과 타자성, 경계인의 이야기들을 풀어낸다. 한국 전통 설화의 구미호, 마고할미, 바리공주 등의 캐릭터와 여성이 주도해 온 한국 전통 샤머니즘에 관한 연구결과를 회화와 조각, 설치 등으로 선보인다.
"할망구는 힘이 세!" 늙은 여성, 범고래와 백호로 만든 제이디 차
▲제이디 차 '트릭스터, 잡종, 짐승'(2023)

늙은 여성은 쓸모 없다고?


전시장에 들어서면 해태를 탄 마고할미가 묘한 미소를 짓고 있는 '안내자와 짐승'(2023)이 눈에 들어온다. 거대한 호랑이를 작은 체구의 여성이 올라타 앞으로 가라며 지시하고 있는 모습으로 조각했다. 그 양옆으론 보자기에서 영감 받은 퀼트 작품인 '일곱개의 보름달'(2022)과 '밴쿠버의 일몰' (2022)이 걸려 있다. 한국에서 봤던 보름달에서 영감을 받은 작품과 밴쿠버에서 본 풍경을 서로 비슷한듯 다르게 작업해 한국인이면서 캐나다인으로 살았던 그의 인생을 투영했다. 다채로운 색으로 꾸며진 미로의 위엔 작은 꼭두 조각들이 곳곳에 배치되고 색색의 조명을 받아 전시장 벽면에 그림자가 투사되기도 한다.
"할망구는 힘이 세!" 늙은 여성, 범고래와 백호로 만든 제이디 차
▲제이디 차 '깊은 꿈에 빠지다'(2023)


미로 속을 헤매다 보면 깜짝 깜짝 놀라게 하는 초상화 형식의 회화들이 있다. 초현실주의 작품처럼 반인반수의 캐릭터가 등장하는데, 갈매기의 머리에 인간의 귀와 몸을 합친다거나(집, 2023), 백호와 머리칼이 긴 여성의 상반신을 합치는 (유령과 안내자, 2023) 신작들을 그렸다.
작가는 우리가 대체로 '귀찮아하는 것들'에 주목한다. 해안가 마을의 갈매기, 런던 도심의 여우 등이다. 제이디 차는 "이들은 오히려 인간에 의해 삶의 영역을 침범당했고, 지금의 상태는 인간 주변에서 살아가기 위해 적응한 결과다"며 "동물 속 반인반수는 서로 다른 종에 대한 존중과 연대의 의미다"고 말했다.
"할망구는 힘이 세!" 늙은 여성, 범고래와 백호로 만든 제이디 차
▲제이디 차 '자매'(2023)

설화 속 '한국 할머니'는 세계 최강

대구 출신의 어머니가 캐나다 밴쿠버로 이민을 간 뒤 태어난 제이디 차는 에밀리 카 예술대학교를 졸업하고 런던 왕립예술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밴쿠버, 마드리드, 런던 등으로 이주하며 활동한 작가는 "어디에서나 이방인이었다. 한국인도 현지인도 아닌 어떤 사람이었다"고 했다. 늘 존재하지만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여겨졌던 과거의 기억들은 그의 작품에도 영향을 미쳤다. 1995년 처음 한국을 방문한 뒤 작업을 위해 2017년 본격적으로 방한한 그는 어릴 적 엄마가 들려주던 전래동화와 설화, 한국적 모티프들을 직접 보고 작품에 반영하기 시작했다.

이번 전시는 이민 2세대 작가의 눈으로 바라본 우리 전통 설화의 캐릭터에 집중해 소외된 존재들을 탐구한다. 작가는 도시의 천덕꾸러기 신세인 동물들을 인간이 되고자 하는 구미호에 비유하며 사회구성원으로 동화시키고자 한다. 전시의 하이라이트이자 세 번째 섹션엔 사당, 혹은 제단처럼 지어진 구조물과 세 폭의 대형 회화 '사기꾼, 잡종, 짐승(600X240cm, 2023)'이 눈을 사로잡는다. 여기엔 구미호가 전면에 등장한다. 작가는 "구미호는 주로 아름다운 여성으로 변장해 사람을 꾀어내는 '사기꾼'처럼 은유되지만 이를 수호자, 지혜가 넘치는 할머니의 모습으로 재해석하고 싶었다"고 했다. 갈매기, 까마귀, 여우 등 부정적인 이미지로 각인되어온 존재들에 신화적 상상력을 더해 신비롭고 지혜롭고, 존중받는 존재로 바꾼다. 동물들은 사자와 독수리의 혼종인 전설의 새 그리핀처럼 갈매기와 여우를 합치는 등의 시도를 했다. 혼종 캐릭터로 사회적 약자의 위치에 있는 존재를 더 가치있게 만들려는 작업이다.
"할망구는 힘이 세!" 늙은 여성, 범고래와 백호로 만든 제이디 차
▲제이디 차 '야간조'(2023)

이 관에는 한국의 샤머니즘을 연상시키는 작품들로 가득 차있다. 조각보의 프레임 안에 신선처럼 앉아 호랑이를 품은 '할머니 산', 여러 마리의 여우가 커다란 보름달 안에서 포효하는 '깊은 꿈에 빠지다' 등이 그렇다. 무당이 입던 옷 같은 거대한 두루마기가 허공에 걸린 '바리공주'는 뒷면에 '김치 의식, 부엌의례'와 합쳐져 하찮게 여겨졌으나 가장 위대한 한국의 식문화이자 정신이 된 김장문화를 위트있게 해석한다.
"할망구는 힘이 세!" 늙은 여성, 범고래와 백호로 만든 제이디 차
▲'김치의식, 부엌 의례' 중 일부 (2022)

경계인의 삶, 예술이 되다

평생 경계인의 삶을 살았던 궤적 때문일까. 제이디 차는 '약하고, 악하고, 부정적이던 것들'에 대한 편견을 뒤집는다. 그가 여러 전통적인 모티프에서 남성성을 상징하는 것들(예를 들어 용의 문양)을 배제하고 여성적인 것들을 강조한 것도 그렇다. 작가는 여러 문화에서 여성들은 가임기가 지나면 경제 성장에 기여할 수 없는 무력한 존재로 그려졌고, 마녀나 노파같이 부정적 존재로 묘사되었던 것에 집중했다. 그는 "다른 문화권과 달리 한국 설화에서 할머니는 지혜와 통찰을 겸비한 신으로 우주 만물을 지어낸 창조신(마고할미)이자 인간의 탄생(삼신할미)에도 관여하는 존재"라며 "외할머니를 만난 적은 없지만 전통 설화는 나에게 한국 할머니들이 권력과 지혜의 주체였다는 사실을 알려줬다"고 했다.

자전적 서사와 모티브도 작업 세계에 적극 활용한다. 그의 반려견은 그림에서 자주 등장하는 소재다. 복실거리는 털이 특징인 페키니즈 '피지'는 '구름 수호자'라는 이름으로 관람객들을 바라본다. '미래의 우리들' 할머니는 깊은 주름이 사실적으로 묘사되며 뚜렷한 눈매와 자신감 있는 모습으로 당당하게 그려진다. 작가 스스로가 원하는 자신의 이상적인 모습이라고 밝힌 '미래 할미'는 포근하고 정겨운 분위기마저 느껴진다.
전시장 전체에 조각보에서 영감 받은 부드러운 카펫이 깔려 있고, 조명은 전반적으로 어둡지만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따뜻하고 부드러운 붓터치와 즐거운 상상력이 흘러 넘친다.

"할망구는 힘이 세!" 늙은 여성, 범고래와 백호로 만든 제이디 차
▲ '유령과 안내자' (2023)


작가는 2022년 런던 화이트채플 갤러리, 2020년 캐나다 사스카툰의 리마이 모던 등에서 개인전을 가졌고, 2019년에는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퍼포먼스를 선보인 바 있다. 영국 내셔널갤러리와 상하이비엔날레, 뉴욕현대미술관에서도 퍼포먼스와 전시회를 열었다.
"할망구는 힘이 세!" 늙은 여성, 범고래와 백호로 만든 제이디 차
▲런던 내셔널갤러리에서 열린 제이디 차의 마고할미 퍼포먼스.



여성 무용수들이 '마고할미' 분장을 하고 미술관과 베니스 거리를 활보하며 우리가 하찮게 여겼던 한국의 무속신앙을 세련된 구성으로 세계 무대에 알리고 있다.

제이디 차는 "이번 전시를 통해 예술가를 꿈꾸는 한국의 청년들에게 '우리가 갖고 있는 사소하지만 위대한 것들'을 유심히 바라보게 하고 싶었다"고 했다.
한국의 정신과 상징을 세계에 알리는 것이 단지 K팝과 K드라마에만 한정되지 않는다고, 우리만의 정체성을 알리기에 '옛날 것들'만큼 좋은 것이 없다고 말이다.

김보라 기자 destinyb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