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NOW] '남북청년학생 공동선언문' 34주년…임수경 밀입북 사건
7일은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에 관한 남북청년학생 공동선언문 채택일 34주년이다.

선언문은 1989년 7월 평양에서 열린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에 한국외국어대학교 4학년에 재학 중이던 임수경이 '전대협'(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대표로 참가해 북한의 조선학생위원장 김창룡과 함께 발표했다.

남북 청년학생들은 선언문에서 '1995년까지 조국통일 위업을 달성하기 위한 공동투쟁' 등 8개 항목을 거론했다.

[평양NOW] '남북청년학생 공동선언문' 34주년…임수경 밀입북 사건
북측 설명에 따르면 자주·평화·민족 대단결의 원칙에 따라 조국을 통일할 데 대한 문제, 민족적 화해와 단합을 위하여 남북 청년학생들 사이에 접촉과 교류를 비롯해 다각적인 남북 교류와 협력을 활발히 진행할 데 대한 문제들을 선언문은 지적했다.

냉전 시대 말인 1989년은 동서 해빙무드 속 남북 관계에서도 거센 통일 열풍이 몰아치던 한해였다.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1월 23일 방북해 북측과 금강산 공동개발 협정서를 체결했다.

이어 3월 25일부터 4월 3일까지 문익환 목사가 밀입북했다.

문 목사는 김일성 당시 주석과 면담하고 남북화해의 메시지를 담은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애초 평양축전 참가를 허용할 것처럼 보이던 정부는 남북대화 창구의 당국 간 일원화 방침을 내세우며 나중에 귀환한 문 목사를 구속하는 등 공안정국으로 치달았다.

이에 전대협은 극비리에 임수경을 제3국을 통해 평양축전에 파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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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수경은 6월 21일 가족들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집을 나서 도쿄·베를린·베이징 등으로 비행기를 바꿔타며 열흘만인 6월 30일 평양에 도착했다.

평양에서는 수십만 인파가 모여 그를 열렬히 환영했다.

임수경은 "핵무기 없는 조국에서 살고 싶다.

외국 군대 없는 나라에서 살고 싶다"고 자신이 평양에 온 이유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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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주민들은 21살 '남조선 여대생'인 그의 거침없고 당당한 행보에 매료됐고 '하나된 조국'을 외치는 그를 '통일의 꽃'으로 불렀다.

가는 곳마다 구름같이 몰려든 환영 인파에 막혀 임수경을 태운 버스가 멈춰 서기도 했고 너무 많은 악수를 해 손에 붕대를 감을 정도였다고 한다.

또 축전 내내 북한에서 보기 힘든 청바지 차림의 임수경이 입고 다닌 티셔츠가 '임수경 패션'으로 대유행했다.

한 탈북민은 "당시 초등학생이었는데 학교에서 우리들끼리 TV로만 봐도 임수경이 멋있더라고 얘기할 정도였다"면서 "북한 사람들과 달리 공식행사에서 각본 없이 얘기하고 하늘 같은 김일성과 격의 없이 포옹하고 얘기를 나누는 장면에 다들 놀랐다"고 당시 분위기를 전했다.

평양 축전이 폐막한 이후에도 북한에 머물던 임수경은 백두산에서 판문점에 이르는 행진에 참여했다.

임수경은 그해 8월 15일 분단 이래 최초로 판문점을 걸어서 귀환한 역사적 인물이 됐다.

그러나 이 사건과 관련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5년형 등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중 1992년 특별 가석방되고 1999년 복권됐다.

그는 나중에 국회의원이 됐다.

임수경 밀입북은 국내 보수 월간지가 2018년 당시 건국 70년을 맞아 선정한 대한민국 70장면의 하나에 꼽히기도 했다.

1989년 민간인인 문익환 목사와 임수경 방북은 나중에 1, 2차 남북정상회담의 밑거름이 됐다는 평가도 받는다.

[평양NOW] '남북청년학생 공동선언문' 34주년…임수경 밀입북 사건
북한은 남북 청년학생 공동선언문 10주년인 1999년 대남라디오 매체인 평양방송을 통해 "통일운동에 새로운 토대를 마련했다"고 평가했다.

2016년에도 북한 선전매체 '통일의메아리'가 "문익환 목사와 임수경 학생의 평양방문을 계기로 우리 겨레의 가슴마다 조국 통일의 열망과 희망이 더욱 부풀어 오르게 됐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올해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