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양어선 타고 '깡'으로 버텼다…자본시장 바다 항해하는 '금융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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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계열사 키우겠다” … 한국투자證 인수 ‘신의 한수’
매출 20배로 키우며 국내 첫 초대형 IB로 성장
“인사가 만사” 직원채용 직접 챙기는 독서광
지난해 10월 서울 여의도 한국투자증권 본사의 신입사원을 뽑는 면접장. 지원자들에게 질문은 거의 하지 않는데 노트북에 부지런하게 무언가를 적고 있는 한 명이 눈에 띄었다. 인사부 직원은 아니다. 노트북을 보니 최종면접까지 올라온 신입 사원 후보자의 인적사항, 장단점, 특징 등이 빼곡하게 적혀 있다.
한국금융지주 계열사 직원들은 입사 후 신입사원 채용 과정에서 만난 사람이 누군지 알게 되면 ‘깜짝’ 놀란다. 회사 오너인 김남구 한국투자금융지주 회장이기 때문이다. 김 회장은 신입뿐 아니라 경력직 직원들의 최종면접도 한 명 한 명 챙긴다. ‘인사가 만사다’라고 하는 경영인은 많지만 직원 채용에 이렇게 깊숙이 참여하는 오너는 찾기 힘들다.
김 회장은 매주 화요일 스케줄을 일부러 비워놓는다. 정기 신입사원 공채, 경력직 채용, 전역장교 전형, 해외대학 전형 등 계열사 채용 최종면접에 빠지지 않고 참석하기 위해서다. 화요일 하루는 향후 미래 인재를 위해 아예 비워놓는 셈이다. 대학 채용설명회 현장을 직접 찾는 것도 김 회장이 세운 원칙이다. 2003년부터 20년간 매년 국내 주요 대학교 채용설명회에 빠지지 않고 참석하고 있다. 김 회장의 이런 행보는 외부 행사에 잘 나오지 않아 ‘은둔의 경영자’라는 그의 세평과 맞물리면서 더욱 부각되고 있다.
원양어선 선원으로 사회생활 시작
김 회장의 학창 시절은 다른 오너 가문과 크게 달랐다. 20대 참치잡이 원양어선을 타면서 동원그룹을 일군 김 명예회장은 자신의 아들도 우선 인생을 배우기를 바랐다. 김 회장이 대학교 4학년이던 1986년 겨울 북태평양행 명태잡이 원양어선에 선원으로 승선한 것도 아버지의 이런 가르침 때문이다. 김 회장은 “제대로 사회생활 한 번 해보자”는 각오로 원양어선을 탔다고 한다. 배 위에서 하루 18시간 넘는 중노동을 약 4개월간 버텼다.“나는 학창시절 한량이었다. 4년 동안 잘 놀다가 졸업을 앞둔 시기에 아무래도 이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에 원양어선을 탔다. 하루 18시간씩, 6시간만 자고 꼬박 일했다. 당시 목표는 명란 450톤(t)이었는데 두 마리를 잡아도 명란은 고작 60그램(g)이 나왔다. 처음엔 말이 안 되는 목표라고 생각했지만 선원들은 결국 그 목표를 달성했다. 선원들의 학력은 초등학교, 중학교 졸업자들이었다. 충격을 받고 그때 처음으로 나 자신을 되돌아보게 됐다.”(2019년 서울대 채용설명회 )
김 회장은 2010년 한국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당시 상황을 이렇게 묘사했다. “1991년 일본 게이오대학원을 마치고 두 회사 사이에 어떤 선택을 할까 고민을 많이 했다. 당시 동원산업은 원양어선업계에서 이미 정상에 올라 있었고 증권은 그렇지 않았다. 그런 증권의 입지가 오히려 그만큼 성장할 수 있는 가능성이 크다는 말이고, 고객과 함께 커갈 수 있는 사업 구조도 마음에 들었다. 지금은 선택을 잘했다고 생각하고 있다”
김 회장은 증권사에서 채권, IT, 기획, 뉴욕사무소 등 여러 분야를 거치며 실무를 익힌다. 2003년엔 동원금융지주를 세우고 대표이사직에 올랐다.
한국투자증권 합병으로 ‘퀀텀점프’
금융인으로서 첫 성과를 낸 것은 2005년 한국투자증권 인수다. 김 회장은 당시 경영난에 휘청이며 공적자금으로 버티고 있던 한국투자증권 인수전을 진두지휘했다. 지분 100%를 사는 데 5462억원을 썼다. 한국 금융사에서 ‘가장 성공적인 M&A’로 꼽힌다. 인수 가격도 김 회장이 직접 결정했다.
2013년 종합금융투자사업자에 선정된 한국투자증권은 2016년 유상증자를 통해 자기자본을 4조원 이상으로 확충하며 초대형 투자은행(초대형IB) 요건을 갖췄다. 2017년 국내 첫 초대형IB로 선정됐다. 현재 한국투자증권의 자기자본은 8조원. 국내를 대표하는 초대형 투자은행이 됐다. 증권사뿐 아니라 자산운용사, 저축은행, 벤처캐피털, 헤지펀드, PEF(사모펀드) 운용사 등 다양한 사업부문에서 업계를 선도하고 있다.
업계에선 김 회장을 향해 “금융업을 가장 잘 이해하는 오너 경영인”이라는 평가를 내린다. 밑바닥부터 쌓아온 실전 업무 경험 때문이다. 경영 실적도 착실히 성장했다. 한국투자금융지주의 총매출은 2005년 1조2778억원에서 지난해 기준 25조281억원으로 17년 사이 약 20배 불어났다. 업종이 달라 직접 비교하기가 쉽지 않지만 국내 경제에 미치는 영향으로 따지면 한국투자금융은 그룹 모태인 동원그룹을 뛰어넘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임직원 매달 독후감 … “처음엔 고통, 나중엔 얻는게 많아”
김 회장은 ‘독서파’ 기업인이다. 월평균 10권 이상의 책을 읽는다. 180㎝가 넘는 건장한 체구의 김 회장이 독서삼매경에 빠진 모습은 기묘하다. 김 회장은 일요일엔 여의도 본사로 출근하는데, 오로지 책에 집중하는 시간이다. 그는 “일요일에는 전화가 걸려오지 않기 때문에 내 시간을 온전히 다 쓸 수 있어 독서에 전념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한국투자금융그룹 주요 임직원은 주기적으로 책을 읽고 독후감을 쓴다. 대표도 예외로 빼주지 않는다. 부서장은 홀수달마다, 본부장급 이상 임원은 매달 책을 읽고 독후감을 써야 한다. 독서가 인재를 키우는 최선의 방법이라는 게 김 회장의 철학이다. 계열사 한 대표는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할 정도로 바쁜 와중에 독후감을 써야 할 땐 회의감도 들지만 나중에 돌이켜보면 독서로 얻게 되는 게 더 많았다”고 말했다.
해외 진출 사활 … “금융중심 미국에서 승부보자”
김 회장의 최근 가장 큰 관심사는 ‘해외 진출’이다. 김 회장은 전 세계 금융 시장의 중심인 미국에서 승부를 보겠다는 의지를 드러내고 있다. 지난해 9월에는 글로벌 IB(투자은행) 스티펄과 합작사 설립 계약을 체결했고, 올 1월에는 스티펄파이낸셜과 함께 미국 뉴욕에 조인트벤처(JV)인 SF크레딧을 설립했다. 우선적으로 인수금융 및 사모대출 시장 진출을 노리고 있다. 한국투자증권은 2028년까지 SF크레딧의 자본금을 2억달러 규모로 늘릴 계획이다.
“베트남, 인도네시아 비즈니스 확대는 물론, 스티펄과의 합작을 통한 미국 인수금융 시장 진출 등 선진국 시장 진출을 본격화하겠다. 싱가포르, 홍콩, 뉴욕 등 핵심 거점을 비롯한 글로벌 네트워크 전략을 정비하고 보완해서 그룹의 글로벌 비즈니스 확대가 효과적으로 지원될 수 있게 하겠다.”
김 회장이 지난 3월 정기 주주총회에서 밝힌 해외 진출 전략과 각오다.
성상훈 기자 uphoo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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