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국진·정강자·정찬승, 한강변의 타살, 1968, 1968년 10월 17일 제2한강교(현재의 양화대교) 아래 강변에서 열린 퍼포먼스
강국진·정강자·정찬승, 한강변의 타살, 1968, 1968년 10월 17일 제2한강교(현재의 양화대교) 아래 강변에서 열린 퍼포먼스

반 미술

한국의 미술은 늦었지만 빨랐다. 1953년 6.25 전쟁의 휴전 이후 한국미술은 비로소 자리잡고 새로운 미술 즉 모더니즘을 경험하기 시작했다. 현대미술가협회(1957), 모던아트협회(1957), 창작미술협회(1957), 신조형파(1957)가 창립되어 서구의 추상미술과 모더니즘 미술을 도입 확산시켰다. 이후 조선일보사가 개최한 현대작가초대전(1957~69)이 작가들을 자극하며 새로운 미술로 갈 것을 독려했다. 하지만 당시의 새로운 미술운동의 대부분은 앵포르멜이나 추상표현주의에 경도된 평면회화(tableau)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 한 상태였다.

1960년대 들어서면서 많은 젊은 화가들은 서로 독자적인 그룹을 결성해 나름의 색채를 갖고 활동하기 시작했다. 1960년에는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졸업생 김봉태, 김종학, 손찬성, 박재곤, 윤명로, 최관도 등 6인과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졸업생 김기동, 김대우, 김응찬, 송대현, 이주영, 유영렬 등 6인으로 이루어진 ‘60년 미술협회’가 설립했다.

같은 해 ‘악뛰엘’(1962~64)이 결성되었다. 이 단체는 ‘현대미술가협회’(1957)와 ‘60년미술가협회’가 1961년 10월 국립미술관(경복궁미술관)에서 연합전을 가진 후 발전적 해체와 통합을 통해 ‘악뛰엘’을 결성했다.

전상수, 김용선, 김창열, 박서보, 이명의, 이양노, 장성순, 전상수, 정상화, 조동훈, 조용익, 하인두(이상 현대미술가협회)는 후배 세대인 서울대 출신의 김기동, 김대우, 김봉태, 김응찬, 김종학, 박재곤, 손친성, 송대현, 유영렬, 윤명로, 이주영, 최관도 등의 ‘60년미술가협회’와 통합하면 앵포르멜 풍의 평면 회화를 주창했지만 오브제를 도입하는 등의 새로운 시도 있었다.

장성순은 낡은 걸레와 헝겊을 본드로 화면에 붙인 뒤 칠을 했고, 정상화는 스티로폼을 부풀려 붙여 질감을, 김봉태의 경우 캔버스를 잘라 끈으로 묶는 등의 시도도 있었다. 김대우는 캔버스를 밧줄로 칭칭 동여매거나 흰 광목을 벽에 걸었다.

1962년 홍익대학교 60학번들을 중심으로 오리진이 결성되었다. 김택화, 권영우, 최명영, 이승조, 이상락, 서승원, 신기옥, 김수익, 최창홍 등은 앵포르멜에 대한 반발로 “이성적이고 논리 정연한 기하학적 형태와 구조의 조형언어”를 추구할 목적으로 탄생했다. 자아의 발견과 서구에서 도입된 현대미술의 한국적 정체성에 대한 질문과 반성 그리고 새로움을 향한 진취적 열정을 지니고 원색의 기하학적인 평면 회화를 추구했다. 이들은 70년 후반 단색조 회화의 중심을 이룬다.

1962년 결성된 ‘무동인(Zero Group, 無同人)’은 반예술을 표방한 새로운 미술을 추구했다. 홍익대학에 재학 중인 김영남, 김영자, 문복철, 석란희, 이태현, 최붕현, 황일지(이상 회화과)와 설영조(건축과), 김상영(서울대 회화과), 임단(외교관), 진익상(전자음악) 등이 결성한 이 단체는 1967년 2회 전을 끝으로 단명했다. 이들은 반전운동, 히피문화 같은 반사회운동의 확산을 실감하면서 평면 회화 위주의 기성 미술과 형식에서 벗어나 오브제와 설치미술, 행위미술과 같은 다양한 미술을 실험했다. 이들으 일체의 제약을 딛고 동양적인 ‘무’의 상태를 지향해 주목을 받았다.

1962년 홍익대학교 동문인 강국진, 김인환, 남영희, 양철모, 정찬승, 최태신, 한영섭은 ‘논꼴’이란 단체를 결성했다. 당시 이들의 목적은 ‘한국의 멋’을 찾는 것이었다. ‘논꼴’은 무악재 너머 홍제동 근처 공동 작업장이 있던 장소명을 차용한 것으로 1965년 2월 한국일보 후원으로 신문회관에서 첫 전시회를 개최 후 미술사상 최초의 동인지 ‘논꼴아트’(1965)를 발행했다. 이들은 한국미술의 현실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면서, 4.19 세대의 사회 참여 의식, 국전에 대한 비판적을 표출했다.

이들은 1967년 부산에서 3회전을 끝으로 해체하고 강국진, 김인환, 정찬승 등 일부 회원은 다시 1967년 ‘신전동인’을 창립했다. 이들은 점차 소강상태에 이른 평면회화를 탈피해 전위적인 활동을 전제한 젊은 미술학도의 모임이었다. 이들은 탈회화적 미술 양식에 관심을 가지고, 날 것 그대로의 오브제와 행위미술에 관심을 가졌다.

1965년에는 하인두, 손찬성, 박재곤, 이종학, 김상대, 최관도, 신영헌, 이민희, 김구림(본명 김종배) 등이 참여한 <신작가협회>가 출범했다. 이들은 점차 아카데미즘 화하는 추상미술을 지양하고 작품 제일주의를 지향했지만, 여전히 평면을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오브제와 해프닝등 새로운 미술에 경도된 젊은 세대 미술가들은 1967년 <청년작가연립전>(12월 11일~16일, 중앙공보관화랑)을 열었다. 이는 무동인, 오리진, 신전 등 세 그룹의 합동전이었다. 출품작은 팝아트에서 전자음악까지 망라해 “현실의 무위와 관례적인 고정관념에 도전하고 공동 참여를 통해 오늘의 가치를 모색한다” 고 주장했다. 제1 실에는 오리진의 기하학적인 추상과 팝아트, 옵아트가 주를 이루었고, 2실에는 무동인의 오브제 위주의 전위적인 작품이 전시되었다.

최붕현은 <색연통>은 연통에 빨강, 파랑, 노랑, 은색 은박지를 사용해 색동 연통을 선보였고, 김영자는 실물을 확대한 대형 연탄과 성냥통을, 문복철은 박을 오브제로 써서 화면에 붙이고, 이태현은 방독면을 벽에 걸고 변기에 고무장갑을 잔뜩 쑤셔 박았다. 전자음악을 전공한 진익상의 구체음악 작품인 <율동하는 잡음>이 시끄럽게 소음을 발산했고 인담은 빈 캔버스에 구부러진 철사가 매달렸다.

3실에는 강국진, 양덕수, 정강자, 심선희, 김인환, 정찬승 등 신전동인들이 차지했다. 정강자의 커다란 입술, 심선희의 확대된 오브제는, 정찬승은 태극과 엽전, 강국진은 병조각과 플라스틱을 이용한 작품과 등이 출품되었다. 이들은 전시홍보를 위해 첫날 16명의 회원이 피켓을 들고 시청에서 세종로, 종로2가를 거쳐 소공동까지 가두 행진을 벌이다 일부 화원이 종로경찰서에 연행되는 해프닝도 있었다.
1985년 브루클린 그린포인트 스튜디오의 정찬승, 사진 임영균
1985년 브루클린 그린포인트 스튜디오의 정찬승, 사진 임영균

전시 중인 12월 14일에는 무동인 추축이 되어 <비닐우산과 촛불이 있는 해프닝>이 열렸다. 오광수가 대본을 쓴 이 해프닝은 여자 2명과 남자 8명 그리고 비닐우산 1개, 새끼줄, 촛불 10개, 성냥통, 휴지 등으로 이루어진 우리나라 최초의 해프닝이었다.

전시장 가운데 의자 위에 비닐우산을 쓴 여성이 앉아있고, 사람들은 “새야새야 파랑새야”를 부르면서 여성의 주변을 돌다 촛불을 들고 다시 노래를 부르며 돌다 누군가가 비닐우산을 촛불로 녹여 구멍을 내고 초를 꽂는다. 초가 꽂힌 우산을 들고 행진하다 비닐우산을 의자에 잡아맨 후 촛불을 불어끈 뒤 비닐우산을 찢어낸다. 그후 한 사람이 우산을 내동댕이친 후 소리를 지르며 모두 우산을 짓 밟는 것으로 해프닝은 끝이 난다.

1968년 5월 30일에는 종로구 서린동의 세시봉에서 강국진, 정찬승, 정강자등의 한국청년작가연합회가 중심이 되어 <투명풍선과 누드>라는 해프닝이 벌어졌다. 러닝셔츠와 반바지 차림으로 등장한 정강자의 옷을 남자들이 칼로 찢고, 상반신에 투명한 풍선을 붙이고 다시 풍선을 터뜨려 여성의 상반신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이후 이들은 <색 비닐의 향연>(1968), <화투놀이>(1968, 세시봉), <한강 변의 타살>(1968, 제2한강교 밑, 서울)에서 해프닝을 시연했다. 이들의 해프닝은 한편에서는 이미 유럽이나 미국에서는 한물간 행위미술의 치기어린 모방으로 폄훼하기도 했으나 한국미술도 당시 세계 미술의 동시대적 흐름에 점차 함께 발을 맞추어 가는 시도였다.

1969년 들어 화가, 조각가, 평론가등 12인은 <한국아방가르드협회>를 조직하고 협회지인 『AG』를 발간했다. 3호까지 잡지를 발간한 1970년 중앙공보관 화랑에서 창립전(5월 1일~7일)을 열었다. 창립회원은 김구림, 김인환, 김차섭, 김한, 박석원, 박종배, 서승원, 신학철, 심문섭, 오광수, 이승조, 이승택, 이일, 이태현, 최명영, 최붕현, 하종현, (곽훈) 등으로 김인환, 오광수, 이일 등 평론가가 <70년·AG전>을 ‘확장과 환원의 역학’이라는 부제 아래 “이즘이나 미학적인 의미가 아닌 메카니즘 속에 상충하는 현대미술의 특성”(이일)을 탐구했다.

이들은 타블로와 함께 다양한 재료를 매체로 사용하면서 새로운 오브제로서의 미술, 공간을 포함하는 장소특정적 예술을 시도했다. 1971년의 주제는 ‘현실과 실현’으로 “그림보다는 바람, 벽돌, 흙, 나무” 등을 소재로 “오브제를 통해 도시와 대중사회를 유추”한 ‘최첨단’의 것들이 주를 이루었다. 당시 ‘퇴폐풍조 추방운동’으로 이들은 “전위적인 냄새가 나지만 순수미술”임을 주장해야 했다.

1972년 3회전은 ‘탈관념의 세계’라는 주제로 열렸다. 이후 1974년 아방가르드협회는 격년제 형식의 제1회 서울비엔날레(12월 12일~19일)를 개최했다. 운영위원은 한국아방가르드협회원 모두, 초대작가는 강국진, 김수익, 김진석, 노재승, 신성희, 이반, 권영우 등 63명, 100여점의 작품이 출품되었으나 서울비엔날레를 계기로 협회는 발전적으로 해체를 한다.

특히 새로운 해외미술의 동향에 민감했던 김구림은 <1/24초의 의미>(1969)라는 실험영화를 제작하고 김구림, 김차섭은 함께 <매스미디어의 유물>(1969)이라는 메일아트(Mail Art)를 시도한다. 두 사람의 지문이 찍힌 종이를 우편으로 발송해 관객의 참여를 시도하면서, 편지를 오브제 삼아 그 용도를 뒤집은 개념미술이기도 했다.

한국의 60~70년대 새로운 미술은 아방가르드협회가 결성되면서 체계를 이루는 것처럼 보이면서 하나의 규범이 되어갔다. 하지만 여전히 전위에 목말랐던 미술은 물론 연극, 음악, 영화, 패션 등 여러 분야의 작가들이 모여 <제 4집단>을 결성한다.

이들은 행위예술을 위주로 범 장르적 성격을 지닌 공동 행위를 통한 ‘총체예술’을 시도했다. 구성원은 미술의 김구림과 정찬승, 정강자, 고호, 연극의 방태수, 패션디자이너 손일광 등도 함께했다. 특히 판토마임을 전문으로 했던 에저또와 마임이스트 유진규는 제 4집단의 행위예술에 연극의 형식을 가미했다.

제4집단은 관객에게 특별한 지시나 소도구를 주어 특정 장소를 연극무대처럼 설정해 관객이 행위예술에 자연스럽게 참여하는 관객참여형, 양방향의 작품으로 내용보다 몸에, 행위자체를 중시하는 마임과 맥을 같이했다. 이들은 육교 위에서 행인들에게 찢어진 콘돔을 나누어 주는 <콘돔과 카바마인>(1970), 1970년 광복절에는 사직공원에서 제 4집단 창립대회 열고 상징적으로 <기성문화예술의 장례식>을 치르고 그 관을 한강에 띄우려 계획했다. 하지만 경찰의 제제로실패하고 말았다. 이후 정부는 이들의 행위를 ‘퇴폐’로 규정하고 단속을 강화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성난(?) 젊은이들의 해프닝과 데카당한 행위는 “우리 문화를 오염시키는 외래문화를 선택적으로 받아들여 택할 것은 택하고 퇴폐적이고 백해무익한 것은 과감하게 버리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며 “전위 예술인이니 하면서 대담하게 하는 것이 머리가 앞선 사람인 것처럼 아는 풍조가 있는데 이는 위험하다”는 대통령의 지시로 수면 하로, 원래의 자리인 언더그라운드로 되돌아간다.

하지만 젊은이들의 전복적인 미술은 오랫동안 닫혀있던 인습과 분별없는 외래 사조의 격랑에서 제 자리를 찾지 못한 것이라는 비판과 화가마다 세대마다 새로운 것을 들고나와야 한다는 강박관념의 결과물이라는 지적도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또 한국의 추상회화가 그 자체에 대한 정당한 자기 내용도 갖기 전에 팝아트며 옵아트, 해프닝에 경도되는 것은 우려할 일이라는 주장도 있었다.
1985년 조각가 존배의 브루클린 집에 모인 정찬승(검정 옷을 입고 서 있는)와 김구림 백남준 등, 사진 임영균
1985년 조각가 존배의 브루클린 집에 모인 정찬승(검정 옷을 입고 서 있는)와 김구림 백남준 등, 사진 임영균
이렇게 반미술, 비예술적인 작업 즉 우리의 새로운 미술이 이론이 빈약하고 논리가 결여되었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사실 경제는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문화예술의 ‘압축성장’은 불가할 뿐만 아니라 약점이 된다. 이런 상황을 극복해보려고 모인 것이 ST미술학회(Space and Times· 공간과 시간, 1970)이다. 처음에는 현대미술의 바탕을 이루는 이론 공부를 위해 출발한 스터디 그룹으로 이건용, 김문자, 여운 등 20대 후반의 젊은 작가와 미술평론가 김복영이 함께했다. 그후 김용민, 성능경, 남상균, 김홍주, 최효주, 장석원, 강창렬, 김장섭, 김선, 강용대, 정혜란, 윤진섭등 당시 2O대 후반에서 30대 작가들이 회원이 되었다.

이들은 정기적으로 최신 해외자료의 입수와 공유, 공동 토론 등 학술발표를 위주로 하는 학술모임에 가까웠지만 1971년부터 <세계를 여는 예술가들>, <정물과 사건>등의 ‘주제’를 정해 함께 전시해 왔다.

이들은 6, 70년대의 한국미술이 하나의 미술사조를 받아들여 그것을 깊이 연구하고 또 다른 새로운 것을 모색하는 것이 아니라 남의 것을 답습만 한 채 그것이 유일한 대안인 것처럼 안주하려고 한다고 지적하면서, 자신들을 구별하고자 자신의 행위예술을 무계획적이며 비논리적인 해프닝과 구별하기 위해 ‘이벤트’라 명명해 지나치게 미술을 이론화했다는 지적도 받는다.

그들의 작업은 논리적이고 명확했으나 내용은 모호하고 추상적이었다. 하지만 행위 자체는 관객의 흥미를 끌 정도로 단순하고 정교했고 행동의 순수성 또는 무상성을 드러냈다. 특히 이건용의 이벤트는 매우 짧고 아이러니했지만 자신의 몸을 세계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했다. ST 멤버들의 행사는 70년대의 독특한 퍼포먼스 예술이었다.

1969년 이강소 등 서울대 출신 작가들이 결성한 <신체제> 그룹도 새로운 현대미술의 논리적 탐구를 위해 S.T학회처럼 공동 스터디를 통해 이론을 토대로 전위 의식을 강화해 나갔던 모임이다.

이후 1973년 이건용의 파리비엔날레 출품작 나무의 밑동과 흙을 통째로 옮겨놓은 높이 2.5미터의 <신체항>으로 “예술은 무엇이고 예술작품은 무엇인가”를 물었다. 이어 1975년 이강소의 파리비엔날레 출품작 <살아있는 닭> 퍼포먼스는 한국의 미술을 세계미술의 대열에 함께 세웠고 이후 현대미술에 대한 이해와 수용도 시작되었다.

또 1974년 대구의 김기동, 김영진, 김재윤, 김종호, 이강소, 이명미, 이묘춘, 이향미, 이현재, 최병소, 황태갑, 황현욱 등 젊은 작가 12명이 기획한 대구현대미술제가 전국의 작가 70여명을 모아 강정과 냉천 강변에서 열렸다. 이후 전국의 젊은 작가를 결집시키는 구심점이 되어 전위적이며 실험적인 작업을 펼쳤다.

출품작은 구상과 추상은 물론 입체와 설치, 이벤트와 해프닝, 영상매체를 이용한 설치미술과 새로운 개념미술의 형식도 포함하는 전방위 전람회였다. 대구현대미술제는 현대미술의 새로운 비전과 방향을 제시하는 자극제로 작용해 이후 1975년 서울, 부산, 1976년 광주, 1977년 춘천, 청주, 1978년 전주 등 전국 각지에서 현대미술제가 열리면서 현대미술이 한국사회에 뿌리내리는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