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고개 넘어 반항의 시대로
시라가 가주오, 도전적인 진흙, 1955, 사진 아마가사키 문화 재단

반예술, 반 미술?

반동의 시절 미술도 혁명적인 변화를 겪었다. 전후 미술을 풍미했던 앙포르멜과 추상표현주의의 뜨거운 열기는 점차 식고 60년대 들어 네오다다(Neo Dada), 아상블라주 (Assemblage) 등 일상용품이나 폐품을 활용한 오브제들이 등장한다. 이후 관객들은 단순히 조립된 또는 모여 있는 오브제에 지나지 않는 형태를 만나 개념적인 이해가 아닌 감각적인 방식으로 작품에서 매스, 힘, 움직임이 이루는 긴장을 인식하도록 변화한다. 이후 예술에 남은 유일한 것은 작품의 배후에 있는 아이디어였다. 뒤샹이 1910년대에 가정했던 개념이 개념미술(Conceptual Art)과 행위예술(Performance)에서 나타나는 미술의 ‘비물질화(non materialization)로 부활한 셈이다. 이런 경향은 크게 둘로 나뉘는데 하나는 물질적 요소를 비물질적인 실체로 대치하는 것과 다른 하나는 정신성을 지향하며 물질을 거부하는 것이다.

1969년 정치적 예술가 그룹인 미술노동자연합(Art Workers’ Coalition, AWC)의 일원으로 활동했던 리파드(Lucy R. Lippard, 1937~ )는 현대미술의 비물질화 경향이 물질을 에너지와 시간, 움직임으로 대치하는 ‘움직임으로서의 미술’과 물질을 거부하고 관념으로 전도된 ‘관념으로서 미술’로 나타난다고 보았다.

새로운 미술은 모더니즘의 형식론을 부정하고자 빈곤한 재료와 단순한 과정을 예술의 영역으로 끌어들인다. 특히 나뭇가지와 바위, 시멘트, 밧줄, 철판 등 일상적인 재료를 사용해 물질의 본성을 탐구하고 물질이 가지는 자연 그대로의 특성을 예술로 옮겨 삶과 예술, 자연과 문명, 언어와 역사에 대한 사색과 성찰을 은유적으로 표현해 히피문화와도 통한다.

이런 현상은 하찮은 일상적 소재를 사용해 물질을 통해 구체적인 삶의 문맥에서 예술을 바라보게 했던 이탈리아의 <아르테 포베라(Arte Povera)>, 프랑스의 <신 사실주의(Nouveau Realisme)>, 1960년대 일본에서 등장한 사물을 즉자적, 상황적 존재로 다루면서, 사물의 물성에 주목했던 일본의 <모노하(もの派)> 로 나타났다. 이런 경향의 새로운 아방가르드는 요셉 보이스(Joseph Beuys), 브루스 나우만(Bruce Nauman), 에바 헤세(Eva Hesse), 로버트 모리스(Robert Morris)등의 과정미술(Process Art), 한스 하케(Hans Haacke), 칼 안드레(Carl Andre), 리처드 세라(Richard Serra)의 개념미술, 로버트 스미스슨(Robert Smithson)의 환경미술(Environment Art)과 함께 국제적인 운동으로 확산된다.
보리고개 넘어 반항의 시대로
무라카미 사부로, 통과, 1956, Performance view at the 2회 Gutai전 Art Exhibition, Ohara Kaikan, Tokyo

이와 함께 삶과 예술의 일체화를 꾀한 독일의 플럭서스(Fluxus)는 기존의 예술과 문화 및 그것을 만들어 낸 모든 제도와 경향을 부정하는 반예술적, 반문화적 전위운동으로 미술, 음악, 공연, 무용, 영화, 디자인, 출판, 건축, 과학 등 장르를 넘나드는 탈장르적이고 혁명적인 예술운동으로, 여러 분야의 다국적 예술가들이 함께 다양한 예술 형식을 융합한 통합적인 예술 개념을 탄생시켰다. 특히 백남준과 함께 플럭서스의 중심인 요셉 보이스는 조각, 설치, 행위예술은 물론 교육가, 정치가로도 활동하며 물질과 비물질의 경계를 넘어서는 ‘사회적 조각(Social Sculpture)’이란 확장된 예술 개념으로 사회의 치유와 변화를 시도했다.

일반적으로 해프닝(happening)은 행위예술, 이벤트와 함께 몸이 전면에 나선 예술이다. 1950년대 알란 카프로(Allan Kaprow)가 처음 사용한 이후 장르에 따라 각기 다른 의미로 상용되었다. 다만 해프닝은 예술과 환경 사이의 유기적인 연결을 중시하며 행위하는 동안은 신선하지만 재현 될 수는 없는 것이다. 1963년 <플럭서스>에서 부상하고 있던 실험적인 현장 음악을 위한 공개 포럼으로 시작된 <뉴욕 아방가르드 페스티벌>은 해프닝에 가까운 연주로 이루어졌다. 이들은 삶의 영역에 속하는 ‘몸’을 매개로 세속적 행위를 실천함으로써 예술을 자본주의 체제의 상업주의로부터 구하고자 했다. 또 몸을 통해 당대 사회의 규범에 도전했다. 또한 독일의 제로 그룹(Gruppe Zero)은 새로운 재료를 탐구하며 특히 빛과 광선에 관심을 가져 네온사인의 빛을 사용하는 등 키네틱 아트와 라이트 아트 등을 시도했다.
이런 성난 젊은 세대의 새로운 미술은 1951년 일본 간도(関東) 지방에서 활동한 미술, 음악, 문학, 사진, 무용 등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들이 일본의 실험공방(實驗工房, Jikken Kobo, Experimental Workshop)을 시작으로 오사카에서 요시하라 지로(吉原 治良,1905~72)와 시마모토 쇼조(嶋本 昭三,1928~2013) 등 15명의 작가에 의해 결성된 구타이(Gutai Art Association, 具体美術協会, 1954~72)는 1955년, 56년 전시에서 해프닝과 행위예술, 개념미술 작품을 발표했다. 카즈오 시라가(白髪 一雄, Kazuo Shiraga,1924~2008)의 <진흙에 대한 도전>(1955)는 진흙더미에 들어가 몸을 굴리는 작업과 캔버스위에 몸을 매달고 올라가 발로 그리는 그림, 무라카미(村上三郎, Murakami Saburō, 1925~96)의 <통과하다>는 종이의 찢고 튀어나가는 행위와 공에 물감을 묻혀 던지는 등 파격적인 작품을 선보였다. 이들은 서구의 행위예술을 모방했다는 지적도 있지만 방법론적 앞서갔다는 평가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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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하라 지로, 1956, Work Colored Chickens, 구타이전

1960년 작곡과 연주를 결합한 소음음악 (Noise Art)를 시도한 온가쿠 그룹(Group Ongaku, グループ音楽) 그리고 아카세가와 겐페이(赤瀬川原平, 1937!2014), 다카마스 지로(高松次郎, 1936~88), 나카니시 나쓰유키(中西夏之, 1935~ ) 등 세 사람이 결성한 하이레드센터(High Red Center, 高赤中)는 1963년 5월부터 1964년 10월까지 예술을 빙자해 도쿄 시내 곳곳을 청소하고 다니는 작품을 실행했다. 거리와 공공장소에서 퍼포먼스를 펼친 제로차원(ゼロ次元, Zero Jigen) 그리고 전국적인 대학의 분쟁이 한창이던 1969년 다마미술대학에서 결성되어 반체체운동을 전개한 미공투(美共闘, Bikyoto)는 오프 뮤지움을 주장하면서 모노하(物派, Mono ha)를 옹호한 이우환의 <세계-구조>이론을 비판하는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1960년대 말에서 70년대 초반 일본의 모노하는 전후 일본 미술사의 매우 중요한 미술사조의 하나다. 주로 나무나 돌 등의 자연, 종이나 유리, 철 등 중립적인 소재를 날 것 그대로 제시해 작품과 보는 이가 아닌 관객이 자유롭게 ‘사물’과의 관계를 찾아내도록 한다. 작품은 사물로서 작품을 둘러싼 공간까지 포함한다는 점에서 ‘환경’ 또는 ‘장소’를 의식한다는 점에서 설치미술 (Installation)의 시작으로 보기도 한다. 이들은 ‘만들지 않는’다는 점에서 60년대 반예술의 연장으로 읽기도 한다. 이우환은 현상학을 원용 “있는 그대로의 세계와의 만남”을, 세키네 노부오(關根伸夫,1942~2019)의 노장사상에 바탕을 둔 “개념성과 명사성의 먼지를 걷어내고 사물을 본다”점에서 철학적인 면모를 지닌다. 이후 ‘사물(物)’은 ‘물건-물질-물체’를 넘어 ‘사물’과 ‘상황’을 포함하는 모호한 개념이기도 하다. 특히 ‘보는 것’을 중시하고 ‘만드는 것’에 소극적이란 점에서 아르테 포베라, 쉬포르 쉬르파스(Support Surfaces, 안티폼(Anti Form) 등의 경향과 통한다.

보리고개 넘어 반항의 시대로

1960~70년대 한국은 미국이나 유럽과 마찬가지로 동서냉전과 남침으로 인한 6.25 전쟁 이후 반공정책은 강화되고, 남북 간의 경쟁으로 분단이 더욱 고착화된 시기이자 경제적 발전을 이루는 시기였다. 1960년 이승만 정권은 3.15 부정선거로 4.19혁명이 일어나 민주당 정부에 정권을 내 주었다. 하지만 혁명 세력의 준비되지 않은 혁명은 완성되지 못한 채 1961년 5.16 군사 정변으로 이어졌다. 1963년 국민투표로 박정희는 제5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이후 1969년 3선개헌과 1968년 북한 공작원 31명이 청와대를 기습한 1.21사태, 미국의 프에블로 호 피랍과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은 주민등록제와 향토예비군 창설, 국민교육헌장 선포로 이어졌다. 1969년 3선개헌 이후 1972년 유신 체제가 들어서면서 전국에 위수령과 긴급조치가 선포되었고, 야당과 재야 운동권은 반유신 민주화 운동을 전개했다, 베트남 전쟁 이후 미국과 중국의 관계가 완화(Détente)되면서 남북은 위기를 맞으며 1969년 9월 3선 개헌안통과 1971년 12월 국가 ‘비상사태’ 선언,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과 ‘10월 유신’이 기다리고 있었다.

박정희 정부는 민족주의를 근대화, 즉 경제 성장, 생산력 증진을 위한 국민 동원 수단으로 활용했다. 통일문제와 민주주의는 산업화와 근대화론 이후의 문제로 반면 대학생들은 4.19혁명 이후 통일운동 과정에서 확산된 반봉건, 반외세, 반매판이란 강령에 입각해 민족혁명론을 지향하면서 비민주적이고 불평등적이며, 외세의존적이고 반통일적이며 예속적이고 매판적인 현실에 저항하면서 민족통일운동을 전개해 정권과 대립했던 시기다.

경제발전 5개년 계획과 새마을운동은 국가 경제를 발전시키고 산업화를 이루었다. 1970년 경부고속도로개통과 1974년 서울의 지하철 1호선 개통은 물론 식량 증산, 중화학공업 육성 등 경제·산업 분야 전반에 걸쳐 정부 주도로 고속 성장을 이루었지만 국가가 경제를 통제하는 한편 개인의 일상과 자유도 제한을 받았다. 아무튼 한국의 “대외지향적 무역체제”는 경제발전을 성공으로 이끌었고 그 바탕에는 “자립경제 수립을 위한 민족주의적 사상”이 있어 가능했다. 1963년 독일로 광부와 간호사등 인력을 파견 외화를 획득한 이후, 베트남 전쟁과 중동 붐은 한국 경제 성장의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절미운동과 무미일, 혼·분식 장려운동은 1977년 풍년이 들 때까지 계속되었다. 외화유출을 막고자 해외여행도 제한되었다. 1965년에는 제주도와 해안이 없는 충북에 야간통행금지가 해제되고 1966년부터는 생활 필수품과 대외 수출품 등의 화물 운반 차량의 통행금지가 해제되었다.

산업화, 근대화론의 바탕에는 ‘양질의 저렴하고 풍부한 노동력’이 있었다.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은 당시 임금노동의 특징이었다. 따라서 노동운동과 투쟁도 활발해져 전태일분신자살사건(1970), 동일방직사건(1978), YH무역농성사건(1979) 등이 일어났다.

1970년대에 들어 장발과 미니스커트로 대표되는 ‘퇴폐풍조(頹廢風潮)’에 대한 단속이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다. 1960년대 말에 소개된 미니스커트는 젊은 여성들에게 인기가 많았고, 미국의 팝과 함께 들어온 히피문화와 장발도 크게 유행하자 정부는 1973년 ‘경범죄처벌법’을 개정 퇴폐풍조로 간주해 대대적으로 단속했다. 이는 ‘국민의 주체의식을 확립하여 건전한 사회 기풍을 정착’하기 위해서라는 취지로 지속해 단속했다. 1960년대 이후 문화와 예술 영역에 대한 금기와 통제가 강화되면서, 건전가요, 합창대회, 건전 출판물, 우수영화 상영과 같은 관 주도의 행사가 나타났고, 1975년에는 ‘퇴폐적인 대중예술이 국가의 안전 수호와 공공질서의 확립, 국력 배양과 건전한 국민경제발전을 해할 수 있다’는 이유로 ‘공연활동의 정화대책’이 나와 방송금지곡이 나왔다.

1960년대 말 과잉 생산된 소비재의 수요 창출을 위한 광고가 성행하면서 신문과 잡지의 역할은 커졌고 TV, 라디오 등 전파매체의 등장에도 불구하고 6~70년 대의 중심 매체는 신문과 잡지였다. 급속한 산업화로 농촌해체와 도시화는 대중매체의 소비시장인 대도시를 형성해 신문의 독자가 급격히 늘어났다. 1950년대 상업지를 표방한 한국일보, 1965년 신아일보와 삼성의 중앙일보가 등장해 신문 산업은 확장되었다. 경쟁이 심해진 신문산업은 경영다각화를 위해 주간지 창간에 나섰다. 1964년 ‘주간 한국’, 1968년 ‘주간 중앙’, ‘선데이 서울’, ‘주간 조선’, ‘주간 경향’이 창간했다. 주간지는 모 신문의 발행 부수를 넘었고, 특히 서울신문의 선데이 서울은 선정적인 대중 주간 잡지로 황색 저널리즘을 드러내며 높은 인기를 누려 회독율이 가장 높은 잡지로, 서울신문에 직접적인 재정적 도움을 주었다.

선데이 서울의 성공은 압축성장과 급격한 도시화, 소비문화의 변화와 여가생활, 문맹률 감소와 독서 시장의 팽창, 초등학교 의무교육과 문맹률 감소 등 1960년대 후반, 한국 사회의 복합적인 현상을 반영한 대중문화의 총합이었다. 선데이 서울은 관음증과 호기심을 자극하며 특히 금기시했던 ‘성’ 관련 기사가 본격 성인 오락지란 잡지 성격을 분명하게 해 주었다. 여기에 다양한 성격의 르포(reportage) 기사나 수기는 독자들을 유혹했다.

1960~70년대 여러 분야의 창조적인 예술가, 작가와 지식인들은 반문화 운동에 빠졌다. 패션과 머리 스타일은 자유로워져 장발이 유행했고 미니스커트가 젊은이들을 유혹했다. 청바지는 청년의 유니폼이 되었다. 당시 젊은이들은 전 세계적으로 불온한 B급 문화를 표방하면서 대항하는 것이 일반적이었고 한국의 도시 특히 서울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젊은이들의 치기 어린 반항처럼 보이는 일련의 행동을 정부는 단속했다. 1971년 강화된 장발과 미니 단속은 보디페인팅과 비밀댄스 홀에서 춤춘 사람까지 단속했다. 장발족은 대부분 삭발 뒤 훈방했지만 입건 또는 즉심에 넘기기도 했다. 다만 ’40세 이상의 예술인들이 인습에 따라 기르는 머리카락“은 단속에서 제외했지만 대부분 40세 미만의 예술가나 미술대학생들의 경우 장발을 용인해주었다. 한국의 산업화와 맞바꾼 억압당한 개인의 자유를 상징하는 장발 단속은 1973년 3월 ‘경범죄 처벌법’ 제정이후 1978년 점차 단속이 느슨해져 1980년까지 유지되었다.

시대 또는 세상의 거울

이런 1960~70년대 민주와 반민주, 자유와 저항, 성장과 빈곤 등 이율배반적인 시대상은 당시 한국 미술에 고스란히 자연스럽게 투영되었다. 미술에 ‘근대’라는 수식어가 붙으면서 미술은 더 이상 종교나 자연에 귀속되거나 아름다움이나 경배 또는 기록을 위한 것이 아니라 ‘미술을 위한 미술’로서 기능하면서 시대를 반영하고 그 시대 정신을 담아내는 그릇으로 동시대 와 관계맺고 이를 반영하고 담아내는 ‘실천’이 되었다. 따라서 모든 미술작품은 시대의 현실과 상당성(Correspondence)의 관계를 갖고, 시대의 지적 흐름과 일관성(Coherence)의 원리가 적용된다. 모든 사상은 시대의 현실을 반영하며 이전 시대의 사상을 이어받아 형성된다. 아무리 독특하고 창의적인 사상과 이론이라 해도 그 두 가지 맥락으로부터 자유스러울 수는 없다.

따라서 마이클 아처(Michael Archer)에 의하면 “1960년대 중반부터 1970년대 중반에 걸쳐 그동안 장르를 구분 짓던 경계가 사라지고 학문 사이의 벽이 허물어지면서” 미술의 새로운 시도는 분화해 무리를 이룬 ‘류’보다 다양한 종류를 뜻하는 ‘종’의 개념으로 분화했다. 이렇게 예술과 사회적 담론의 관계가 새롭게 생성되면서 “작품의 의미는 필연적으로 작품 내부적 요인보다는 그것이 존재하는 맥락으로부터 생겨나는 것이라는 인식”이 1960년대에서 1970년대에 걸쳐 형성되기 시작했다. 또 “예술은 작품이 완성되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지속해서 그 의미를 새롭게 탐구할 수 있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생겨났다.

한국미술은 60년대 중반이 되어 급격한 변화를 맞는다. 이는 국제적인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변화와 미술 환경의 급격한 변화와 유입 그리고 한국 사회가 변화한 결과였다. 여기에 젊은 2~30대 작가들의 새로운 시대적 변화에 대한 능동적 수용과 미술을 통한 자기완성의 남다른 욕구가 낳은 산물이다.

당시 한국 사회 특히 문화예술계를 상징하는 유행어는 데카당스(Décadence)였다. 19세기 말 유럽에서 등장한 데카당스가 한국의 6~70년대를 상징하는 단어가 된 것은 저항의 상징인 히피문화의 유입과 관련이 있다. 기성의 전통과 사회통념, 제도, 가치관을 부정하고 인간성 회복, 자연으로의 귀의 등을 주장하며 탈 사회를 꿈꾸었던 젊은이들의 생각과 행동을 지칭했기 때문이다. 원래 쇠퇴 또는 방종의 의미를 지닌 데카당스는 과거에 호의적이며 미래를 부정적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사회가 쇠퇴하고 있다는 문명의 쇠퇴론 또는 추락론을 의미하는 데카당스는 장밋빛 회고와 같은 인지적 편향으로 인해 과거를 더 호의적으로, 미래를 더 부정적으로 보는 성향을 지닌 것으로 “마음의 속임수”와 “현재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암울해 보일 때 위로가 되는 정서적 전략”이다.

당시 정치적으로 통제와 억압, 민족주의를 바탕으로 한 엄숙한 유교 도덕주의, 개발도상국가의 한정적 풍요와 정서적 빈곤을 겪던 한국 사회의 예술가들이 미군 부대나 명동 외국 서점 골목에서 구해 보았던 타임(Time), 라이프(Life), 보그(Vogue), 아트 인 아메리카(Art in America), 아트 뉴스(Art News), 일본의 미술수첩(美術手帖) 등에서 접하는 세상의 변화와 자유와 저항의 물결 그리고 새로운 미술에 대한 정보는 그들을 충분히 문명의 쇠퇴 또는 후진을 실감하게 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