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가 경제위기국가 맞나" 의구심…위기와 소비붐, 두얼굴의 아르헨
고물가로 인한 저축력 상실·미래 불확실성이 소비조장에 방아쇠 당겨
[르포] 114% 인플레에도 공연장·식당 문전성시인 '경제 위기' 아르헨
아르헨티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코리엔테스대로는 '아르헨티나의 브로드웨이'라고 불리는 곳이다.

'불이 꺼지지 않는 거리'로 유명한 이 거리는 대규모·소규모 극장, 책방, 식당, 호텔이 밀집된 곳으로 유명하며, 특히 주말에는 건물과 거리의 화려한 조명과 이 지역을 찾는 인파로 인해 여기가 아르헨티나가 아닌 미국 뉴욕 브로드웨이인가 하는 착각마저 잠시 들게 하는 곳이다.

지난 2001년 말, 아르헨티나 역사상 최악의 경제 위기 때 코리엔테스 거리엔 불이 꺼지고 적막함만 돌 뿐이었다.

그런데 현재 연 물가상승률 114.2%, 보유 외환 고갈, 100년만의 최악의 가뭄으로 인한 농작물 수출 급감 등 경제 위기에 신음하는 아르헨티나의 코리엔테스 거리는 휘황찬란한 조명 밑에 극장과 고급 식당에 입장하려는 수많은 사람으로 걷기조차 힘들 정도였다.

'여기가 경제위기로 신음하는 아르헨티나의 수도인가?'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였다.

24일(현지시간) 오후 코리엔테스 대로에 위치한 한 피자 식장에 갔다.

아르헨티나에서 저녁 식사를 하기에는 매우 이른 시간인 오후 6시부터 식당에 들어가려는 사람들로 긴 줄이 형성됐다.

외국인 관광객이 대부분일 거라는 예상은 빗나갔다.

대부분이 부에노스아이레스 시민들이었다.

[르포] 114% 인플레에도 공연장·식당 문전성시인 '경제 위기' 아르헨
해외에서 온 지인을 기다리는 동안 옆 테이블의 한 커플을 인터뷰했다.

마티아스(35세) 씨는 "물가는 계속 오르고, 어차피 집을 사거나 차를 새로 바꾸는 건 현재로서 어려울 것 같기 때문에 요즘은 친구들하고 모여서 맥줏집을 가거나 여자친구랑 인플루언서들이 추천하는 식당 탐방을 하고 있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그러면서 "연휴에는 남쪽으로 여행을 갈 예정이다.

어차피 돈은 안 쓰면 가치가 매일 떨어지는데 여행이라도 하는 게 이익이 아닌가 한다"라고 말했다.

여러 번 아르헨티나를 찾았고 현지에서 직장생활도 했던 지인은 "아르헨티나 경제 위기에 대한 기사는 많이 접했지만, 특별히 그런 걸 잘 못느끼겠다"면서 "유명한 신발 브랜드가 현지에선 반값이라는 것과 코리엔테스 거리에 이렇게 사람들이 많다는 게 놀랍기만 하다"고 했다.

연휴 땐 국내 관광지에 사람들이 넘쳐나고, 주말에는 공연장·식당·나이트클럽 등에 자리가 없어 거리에 긴 줄을 형성하는 아르헨티나의 이 '현상'은 이미 작년부터 시작됐다.

지난 해 영국 콜드플레이의 아르헨티나 공연은 전석 매진에 매진을 거듭해 총 10회 공연이 이뤄졌다.

올해 11월로 예정된 미국 가수 테일러 스위프트의 공연도 전석 매진됐고, 주최 측은 현지 팬들의 뜨거운 수요에 호응하려고 공연을 추가했다.

[르포] 114% 인플레에도 공연장·식당 문전성시인 '경제 위기' 아르헨
급격한 물가상승으로 인한 경제 위기에 신음하는 아르헨티나에서 어떻게 이런 현상이 지속해서 발생하고 있는 것일까?
아르헨티나 사회·경제 전문가들은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 3가지를 꼽았다.

첫째, 소득의 양극화 현상이다.

부에노스아이레스대학의 기도 라파 교수는 국립통계청(INDEC)의 자료를 분석하면, 갈수록 소득의 양극화 현상이 뚜렷해지기 때문에 국민의 40%가 빈민이라는 통계에도 이런 높은 소비 현상이 발생한다고 설명했다.

둘째, 높은 인플레로 인한 저축 능력 상실이다.

보유외환 고갈 문제로 정부는 1인당 월 200달러를 구매할 수 있도록 제한했으며, 이조차도 조건에 충족해야 가능하기 때문에 많은 국민이 저축보다는 소비에 치중한다는 것이다.

컨설팅회사 에키스(Equis)의 아르테미오 로페스 이사는 현지 매체 암비토의 분석 기사에서 "현재 겪고 있는 경제 위기도, 소비 붐도 동시에 일어나는 현상으로, 둘 중 하나가 거짓이 아닌 둘 다 엄연한 사실"이라면서 "저축 능력이 없다는 것은 주어진 사회경제적 한계 내에서 소비로 향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뜻하며, 그러므로 이러한 소비 거품 현상이 존재하게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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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팬데믹 기간 중 억눌렸던 소비심리 충족 및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다.

컨설팅회사 포커스마켓의 다미안 디빠체 이사는 "대형 콘서트의 경우는 포스트 팬데믹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2020년∼2021년 2년간 이런 대형 이벤트가 없었고 팬데믹으로 인해 집에 거의 감금되면서 답답함이 축적되었다"면서 "밖으로 나가 현재를 즐기고 경험을 쌓고 사회화하는 것이 필요했기 때문에 이는 단순 경제 현상이라기보다는 사회 현상이라고도 볼 수 있다"고 말했다.

또 그는 "경제위기로 요즘 젊은 세대에겐 '잘 살 수 있다는 것'은 보장되지 않으며, 높은 물가로 구매력 자체가 너무 낮아서 저축 수준이 낮을 수밖에 없다"면서 "그래서 젊은이들은 미래를 기대하기보다는 '현재의 즐거움'을 누리는 데 치중한다"고 분석했다.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 현재 소비의 방아쇠를 당겼다는 것이다.

[르포] 114% 인플레에도 공연장·식당 문전성시인 '경제 위기' 아르헨
한인 매장에서 옷을 구매 중이던 미국 관광객 카르멘(39) 씨는 "여기가 물가상승률 100%를 상회하는 경제 위기의 나라가 맞나요?"라고 물었다.

여동생과 아르헨티나에 관광왔다는 그는 오기 전에 아르헨티나 경제가 어렵고 국민의 40%가 빈민이라는 통계도 봤으며, 치안도 문제가 있다고 들었지만 달러로 환산했을 때 물가가 싸다는 것 외에는 이 나라가 경제 위기의 나라가 맞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그는 "거리의 카페마다 사람들이 꽉 차 있고, 식당이나 공연장에도 많은 사람이 보여, 특별히 사람들이 경제 위기 속에 신음한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며 "올해 말에 가족들과 같이 다시 방문할 계획이다"라고 말했다.

'디지털 노매드'로, 현재 세계 여행 중인 유튜버 정용현(29) 씨는 "한국 매체 기사에서 본 '거지의 나라', '몰락한 아르헨티나'라는 표현은 많이 과장됐다고 본다"고 말했다.

그는 다만 "마트에 갈 때마다 가격이 오르는 걸 보면, 현지화로 생활하는 아르헨티나 국민은 살기가 힘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면서도 "달러로 환산한 현지 물가, 인프라 및 문화생활 등 여러 요소를 고려해 봤을 때, 또다시 한 달 살기를 하고 싶은 나라가 아르헨티나"라며 곧 다시 방문할 것이라고 했다.

아르헨티나 중앙은행이 매달 초에 자문단의 통계를 취합하여 발표하는 시장기대조사보고서(REM)에 따르면 12개월 후 아르헨티나 물가상승률은 171%를 기록할 것으로 전망된다.

지난 5월 물가상승률이 소폭 둔화하면서 이 전망치 숫자는 조금 달라질 수 있으나 단기간 내 아르헨티나의 고물가가 진정되리라는 희망은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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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