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외국어대 프랑스어학부 교수, 등단 21년 만에 첫 시집
올해 정년 앞둬…"읽는 이가 꿈꾸게 하는 시 쓰고 싶어"
유기환 시인 "시는 모놀로그가 아닌, 다이얼로그여야 하죠"
한국외국어대 프랑스어학부 교수인 유기환(64) 시인이 젊은 날 프랑스 파리8대학에서 불문학 박사학위를 받았을 즈음이다.

학업을 마치고 지인들과 프로방스로 여행을 떠난 그는 중세 느낌의 한 마을에서 동양인 소녀를 만났다.

한국 출신 입양인 마리안으로 그는 자신과 비슷한 모습의 일행과 얘기를 나누고 싶어 했다.

한국어를 못하는 소녀의 눈빛은 간절해 보였다.

짧은 대화 끝에 떠나던 유 시인은 그 눈빛이 내내 밟혔다.

그때의 기억은 그의 노트에 남았다.

불문학자이자 교육자, 번역가로 활동한 유 시인이 오랜 시간 메모하며 완성한 시 70편을 한 권에 담았다.

등단 21년 만에 펴낸 첫 시집 '당신이 꽃 옆에 서기 전에는'(미행)이다.

마리안을 만난 잔상은 '물고기가 되고픈 소녀'란 시로 담겼다.

'쓸쓸하지 않도록, 엄마, 살아 팔딱이는 내 몸뚱어리/ 비누 같은 내 뭄뚱어리/ 트게 해줘요/ 예쁜 지느러미 한 개'.
최근 서울 종로구 연합뉴스 사옥에서 만난 시인은 "마리안이 물고기가 되어서라도 한국으로 가고 싶을지 모른단 생각을 했다"며 "알베르 카뮈의 '작가수첩'이 있듯이 시집은 오랜 시간 습관처럼 써 내려간 결과물이다.

10년 전과 엊그제가 만나 시가 되기도 했다"고 소개했다.

유기환 시인 "시는 모놀로그가 아닌, 다이얼로그여야 하죠"
그는 교수로 재직하던 2002년 '문학과의식'에 시를 발표하며 등단했다.

'알베르 카뮈'와 '조르주 바타유', '에밀 졸라' 등의 저서를 내고 카뮈의 '이방인'과 '반항인', 바타유의 '에로스의 눈물', 에밀 졸라의 '나는 고발한다'와 '목로주점', '패주' 등을 번역했다.

부인인 싱어송라이터 권진원의 대표곡 '나무'와 '어느 소년 병사의 죽음', '해피버스데이 투 유'(Happy Birthday To You) 등 다수 노랫말도 썼지만 시집은 내지 않았다.

유 시인은 "30여년간 학생들과 함께하는 게 좋았고 번역서와 연구서, 논문 등 글은 계속 써왔다"며 "하지만 등단하고서 자꾸 시인처럼 생각하는 것 같았고, 교수로서 시를 쓰는 게 훈장이 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내가 쓰는 게 진정성 있는 시인지 고민하는 시간이 길었다"고 떠올렸다.

순도 높은 시에 대한 기다림 끝에 펴낸 시집은 삶과 맞닿은 시어로 공통적 사유의 접촉면을 넓힌다.

가족을 비롯해 사람과 세상을 향한 살뜰한 시선, 일상 속 가치의 세밀한 탐색, 작가이자 교육자로서의 철학까지 아울렀다.

시인은 가난한 유학생 시절 어린 딸과의 통화에 목이 메고('공중전화'), '마룻바닥이 좋다고 우기시던 어머니'가 지키는 고향집을 그리고('고향집'), 강남역 지하도를 누비는 수많은 다리 사이에서 자본주의의 민낯('다리')을 발견한다.

그의 시는 한국적 정서에 발붙이고 불문학적 토양으로 뻗어나가며 이국적 색채도 띤다.

'처형장에서'는 에밀 졸라의 소설 '제르미날'에 나오는 러시아 혁명가 수바린의 사랑 이야기에서 모티브를 얻었다.

프랑스 철학자 자크 라캉의 수수께끼 같은 언어를 풍자('코기토와 토마토')하기도 한다.

"시는 문학의 악보"란 그의 말처럼 각운(脚韻)을 살리거나, 운율 배열에 변주를 준 시에선 감각적인 리듬감도 느껴진다.

유기환 시인 "시는 모놀로그가 아닌, 다이얼로그여야 하죠"
유 시인은 "시를 비롯한 문학은 혼자 쓰는 것이지만 모놀로그(독백)가 아니라 다이얼로그(대화)여야 한다"며 "간절하게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야 하고, 세상이 쉽게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그는 "사람을 감동시키기 보다 읽은 이가 스스로 꿈꾸게 하는 시를 쓰고 싶다"며 "(프랑스 문학 평론가) 롤랑 바르트가 '독자는 작가'라고 했듯이 독자는 각자의 시공간에서 읽고 전혀 다른 의미를 찾아낼 수 있다.

문학 텍스트의 무궁한 창의력"이라고 했다.

정년까지 한 학기를 남겨 둔 그는 "교육자로 열심히 일했으니 자유롭게 창작하며 작가 생활에도 충실하고 싶다"며 "주위에 이제 '유 교수는 잊어달라'로 말한다"고 웃음지었다.

그에게 바람이 있다면 '시인 같은 사람이 아니라/ 시인다운 시인', '사람 같은 사람이 아니라/ 사람다운 사람'('아름다운 사람')이 되는 것이다.

추천사를 쓴 손석희 전 앵커는 시인에 대해 "작은 몸짓에도 두고두고 마음을 써주는 사람"이라며 "그가 쓰는 시들도 그런 애틋함의 소산일 것"이라고 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