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니스 인사이트] 공정이라는 허깨비와 싸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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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민 롯데벤처스 대표
모두의 꿈이지만 실현하는 것이 초고난도인 ‘허깨비’ 같은 개념이 있다. 공정한 평가, 충분한 보상, 존경받는 상사가 대표적이다. 옛사람들은 그런 형용사와 명사가 한 문장에 담기는 모양을 ‘어불성설(語不成說)’이라 했다. 아무리 퍼줘도 월급이란 게 만족스럽기 어렵고, 매일 뭔가를 시키며 잔소리나 시현하시는 분을 존경으로 표현하기도 그렇다. 자기 잘난 맛에 사는 인간을 어떻게 평가한들 공정하다는 느낌은 기대난망이다. 역사를 털어봐도 공정한 시절이 없었는데 ‘공정 세대’라고 불리는 MZ세대에겐 핵심 가치로 여겨지면서 리더들이 피곤해졌다. 살아온 경험과는 결이 너무 다르기 때문이다. 이게 다 SNS가 남들의 잘난 척을 실시간으로 보여주고, 내 감정을 모두에게 중계방송할 수 있게 되면서 생긴 현상이다.
한 연구원이 자기가 시킨 일을 잘 해낸 원숭이에게 오이를 줬다. 오이를 받으며 감읍한 표정을 짓던 그 원숭이, 어느 날 버럭 화를 내면서 오이를 학자의 눈퉁이로 던졌다. 같은 일을 한 원숭이가 포도를 받는 걸 목격한 뒤에 일어난 일이다. 결국 공정성은 원초적 본능이다. 다만 공정함이 매우 상대적이고 주관적인 느낌으로부터 영향을 받는다는 게 문제다. 그 느낌? 공식은 간명하다. ‘(내가 받는 보상÷나의 노력)=(상대방이 받는 보상÷상대방의 노력)’이라는 등식이 성립하면 공정하다는 느낌이 생긴다고 한다.
말이야 쉽지, 분자 쪽의 계산이 만만치 않다. ‘잘 되면 내 탓, 못 되면 조상 탓’의 학문적 확장판인 ‘귀인(歸因)이론’ 때문이다. 내가 한 노력은 내가 상세히 알지만, 다른 사람의 노력은 잘 알기 어렵다. 그런 기억이 한참 누적되면? ‘내가 가장 열심히 했다’는 오해의 덫에 걸리게 된다. 제 잘난 맛! 그렇게 내가 가장 수고했는데 공헌이 부족해 보이는 저 녀석이 포도를 받는다? 분노의 호르몬이 분출된다. 여기에다 핵심 인재 몰아주기가 유행하면서 다수의 불편함이 참을 수 없는 수준까지 커졌다. 그렇게 ‘공정’과 ‘평가’란 단어가 나란히 서기 더 힘들어졌다.
좀 더 확장하면 주변 사람의 노력은 잘 보이고, 멀리에서 애쓴 사람의 노력은 잘 안 보인다. 이게 누적되면 측근이 더 애쓴 것처럼 보이고, 그들에게 과다 보상하게 된다. 주는 입장에서야 공정하다고 생각하겠지만 ‘자기 새끼 챙기기’로 보일 수밖에 없다. 그게 어제오늘의 문제일까? 역사 속에 논공행상에 대한 불만으로 벌어진 반역이 한둘이 아니다. 선조도 전쟁 후에 공신을 선정하면서 전방에서 싸운 사람보다 자기와 함께 피란 갔던 사람을 네 배나 많이 넣었다. 자기 눈에 그들이 확실히 보였기 때문에 나름 공정하다고 생각했을 터다. 반란이 안 일어난 게 이상하다.
세상이 평평해지면서 공정성 관리가 조직의 명운을 가르는 중대사가 되고 있다. 그래서일까? 경제학자들은 ‘불완전한 정보’하에서 임직원들이 최선을 다하도록 만드는 제도를 수십 년 연구했지만, 두 손 들었다. 경영학자들이 구원투수로 등판했다. 긴 연구 끝에 내린 결론은 ‘모두가 공정하다고 느끼는 제도는 초고난도이니 불공정하다는 느낌으로 생기는 부작용 관리에 신경 쓰는 게 낫겠다’다.
허무하다! 그들은 제도를 만들고 운영하는 과정에 직원들을 참여시키고 그 과정을 투명하게 하라고 주문한다. 그게 말처럼 쉽나? 그러면 ‘왜 그렇게 결정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친절하게’ 설명만 해줘도 불만이 크게 줄어든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것도 귀찮다고 ‘내거 내가 알아서 나눠주는데 뭔 불만이냐!’라는 행동을 반복하면? 나눠줄 수 있는 ‘내거’가 빠른 속도로 사라질 수 있다. 배 아픈 걸 못 참는 인간에게 불공정이 누적되면 눈퉁이에 오이를 던지듯 시스템을 파투 내려 들기 때문이다.
예의 때문에 보이는 감읍한 눈빛만 보고 ‘내가 공정한 평가를 기반으로 충분한 보상을 해서 무려 존경까지 받는다’는 어마어마한 착각에 푹 빠져 사는 상사들이 지천이다. 내 눈에 보이는 게 결코 진실은 아니다. 지속적으로 제도를 개선하고 더 친절하게 설명하고 이해를 구하는 겸손이 절실히 필요하다. 피곤하다는 생각이 드는가? 어쩔 수 없다. 이건 MZ세대의 별난 특성이 아니라 시대가 이미 바뀌었고 다시 돌아가기 어렵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원숭이도 못 참는데 불공정을 꾹 참고 버텨낸 올드보이들이 오히려 이상한 것 아니겠나.
한 연구원이 자기가 시킨 일을 잘 해낸 원숭이에게 오이를 줬다. 오이를 받으며 감읍한 표정을 짓던 그 원숭이, 어느 날 버럭 화를 내면서 오이를 학자의 눈퉁이로 던졌다. 같은 일을 한 원숭이가 포도를 받는 걸 목격한 뒤에 일어난 일이다. 결국 공정성은 원초적 본능이다. 다만 공정함이 매우 상대적이고 주관적인 느낌으로부터 영향을 받는다는 게 문제다. 그 느낌? 공식은 간명하다. ‘(내가 받는 보상÷나의 노력)=(상대방이 받는 보상÷상대방의 노력)’이라는 등식이 성립하면 공정하다는 느낌이 생긴다고 한다.
말이야 쉽지, 분자 쪽의 계산이 만만치 않다. ‘잘 되면 내 탓, 못 되면 조상 탓’의 학문적 확장판인 ‘귀인(歸因)이론’ 때문이다. 내가 한 노력은 내가 상세히 알지만, 다른 사람의 노력은 잘 알기 어렵다. 그런 기억이 한참 누적되면? ‘내가 가장 열심히 했다’는 오해의 덫에 걸리게 된다. 제 잘난 맛! 그렇게 내가 가장 수고했는데 공헌이 부족해 보이는 저 녀석이 포도를 받는다? 분노의 호르몬이 분출된다. 여기에다 핵심 인재 몰아주기가 유행하면서 다수의 불편함이 참을 수 없는 수준까지 커졌다. 그렇게 ‘공정’과 ‘평가’란 단어가 나란히 서기 더 힘들어졌다.
좀 더 확장하면 주변 사람의 노력은 잘 보이고, 멀리에서 애쓴 사람의 노력은 잘 안 보인다. 이게 누적되면 측근이 더 애쓴 것처럼 보이고, 그들에게 과다 보상하게 된다. 주는 입장에서야 공정하다고 생각하겠지만 ‘자기 새끼 챙기기’로 보일 수밖에 없다. 그게 어제오늘의 문제일까? 역사 속에 논공행상에 대한 불만으로 벌어진 반역이 한둘이 아니다. 선조도 전쟁 후에 공신을 선정하면서 전방에서 싸운 사람보다 자기와 함께 피란 갔던 사람을 네 배나 많이 넣었다. 자기 눈에 그들이 확실히 보였기 때문에 나름 공정하다고 생각했을 터다. 반란이 안 일어난 게 이상하다.
세상이 평평해지면서 공정성 관리가 조직의 명운을 가르는 중대사가 되고 있다. 그래서일까? 경제학자들은 ‘불완전한 정보’하에서 임직원들이 최선을 다하도록 만드는 제도를 수십 년 연구했지만, 두 손 들었다. 경영학자들이 구원투수로 등판했다. 긴 연구 끝에 내린 결론은 ‘모두가 공정하다고 느끼는 제도는 초고난도이니 불공정하다는 느낌으로 생기는 부작용 관리에 신경 쓰는 게 낫겠다’다.
허무하다! 그들은 제도를 만들고 운영하는 과정에 직원들을 참여시키고 그 과정을 투명하게 하라고 주문한다. 그게 말처럼 쉽나? 그러면 ‘왜 그렇게 결정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친절하게’ 설명만 해줘도 불만이 크게 줄어든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것도 귀찮다고 ‘내거 내가 알아서 나눠주는데 뭔 불만이냐!’라는 행동을 반복하면? 나눠줄 수 있는 ‘내거’가 빠른 속도로 사라질 수 있다. 배 아픈 걸 못 참는 인간에게 불공정이 누적되면 눈퉁이에 오이를 던지듯 시스템을 파투 내려 들기 때문이다.
예의 때문에 보이는 감읍한 눈빛만 보고 ‘내가 공정한 평가를 기반으로 충분한 보상을 해서 무려 존경까지 받는다’는 어마어마한 착각에 푹 빠져 사는 상사들이 지천이다. 내 눈에 보이는 게 결코 진실은 아니다. 지속적으로 제도를 개선하고 더 친절하게 설명하고 이해를 구하는 겸손이 절실히 필요하다. 피곤하다는 생각이 드는가? 어쩔 수 없다. 이건 MZ세대의 별난 특성이 아니라 시대가 이미 바뀌었고 다시 돌아가기 어렵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원숭이도 못 참는데 불공정을 꾹 참고 버텨낸 올드보이들이 오히려 이상한 것 아니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