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배사업은 국가가 국민을 상대로 벌이는 희대 사기극"
"암 발생 막기 위해서는 담배 제조와 매매 금지해야"
"KT&G, 국립암센터에 매년 150억원 제공 제안했었다"

[※편집자 주= 박재갑 전 국립암센터 원장 인터뷰 기사는 두 번으로 나눠 송고합니다.

오늘(14일) 송고하는 기사는 인터뷰이의 어린 시절 성장 과정과 담배 문제를 다뤘고, 다음 주 초에 송고하는 두 번째 인터뷰 기사는 국민 암 검진, 암 정복, 걷기운동 캠페인 등 나머지 전반적인 사안을 담을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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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 "선생님, 독극물 담배 팔아 나라예산에 쓴 시절 있었다면서요?"
"마약 독극물을 팔아 국가 재정에 사용했다는 사실을 후손들이 알면 얼마나 황당해할까요.

참 웃기는 일입니다"
박재갑 전 국립암센터 원장(75)은 국가가 담배를 팔아서 세수(작년 12조원)를 확보하고, 그런 돈으로 보건정책을 펴는 것은 사기극이라고 했다.

69종의 발암물질과 4천 종의 화학물질이 들어있고 매년 우리 국민 6만2천 명을 죽이는 담배가 합법적으로 판매되는 것은 정부와 정치권이 업체의 로비를 받고, 유권자들의 표와 세수입을 의식하였기 때문인데, 이 자체가 비도덕적 행위라는 것이다.

그는 암 사망원인의 30%에 달하는 담배를 추방하기 위해서는 담배 제조 및 매매 금지법을 제정해야 한다고 했다.

지난 9일 오후 서울대 암연구소에서 그를 만났다.

1948년 충북 청주에서 태어난 그는 경기고를 졸업한 뒤 서울대 의대에 진학해 같은 학교 대장암 교수, 암연구소장, 국립암센터 초대원장ㆍ2대 원장, 국립중앙의료원 원장을 지냈다.

그는 대장암 전문의로서 7천 건의 수술을 진행했고, 서울대 암연구소 소장 시절에는 국가정책인 '암 정복 10개년 계획'을 수립했다.

국립암센터 원장에 취임한 후에는 금연운동을 적극적으로 펼쳤다.

그는 단지 흡연율을 낮추는 수준에 머무르지 않고, 한국에서 담배의 제조와 매매를 금지하는 운동을 펼쳤다.

국립중앙의료원장 시절에는 운동화 신고 출근하고, 생활 속에서 운동하는 '운출생운' 캠페인을 전개했다.

[삶] "선생님, 독극물 담배 팔아 나라예산에 쓴 시절 있었다면서요?"
-- 고향은 어디인가.

▲ 충청북도 청주시에서 5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누나는 어렸을 때 숨졌다고 한다.

-- 아버지는 어떤 분인가.

▲ 아버지는 청주고보(현 청주고)를 졸업하고 공무원 생활을 하시다 4·19혁명 이후 그만두셨다.

그 이후 양조장을 직접 운영하셨다.

아버지는 무서운 분이었다.

아버지와 같이 식사하면 밥이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아버지 사진이 문지방 위의 벽에 걸려 있었는데, 형제들이 그 사진을 쳐다보기 어려울 정도였다.

-- 아버지는 왜 그렇게 무섭게 자식을 대했나.

▲ 그건 나도 잘 모른다.

나도 내 아이들한테 그렇게 엄하게 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한 번도 나에게 잘했다고 칭찬하거나 격려한 적이 없다.

인제 와서 돌아보니 집안에 그런 엄격한 분이 한 명 정도 있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 어머니는 어떤 분이셨나.

▲ 인자하신 분이었다.

평생 자녀들을 꾸중하신 적이 없다.

어머니의 아버지, 즉 나의 외할아버지는 공주 사범 교사였고, 1920년생인 어머니는 공주에 있는 미션 스쿨인 양명학교를 졸업하셨다.

유관순 열사가 다녔던 양명학당이 어머니가 졸업한 그 학교다.

[삶] "선생님, 독극물 담배 팔아 나라예산에 쓴 시절 있었다면서요?"
-- 아버지가 양조장을 운영했으니 부잣집에서 자란 것 아닌가.

▲ 일반적으로 양조장을 운영했다고 하면 사람들은 우리 집이 부자인 줄 아는데, 그렇지 않았다.

나는 우리 집이 부유하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좋은 옷을 입거나, 맛있는 음식을 먹거나, 어디에 놀러 간 적이 없다.

당시에는 나라 경제가 안 좋았던 시절이어서 우리 양조장에서 술을 가져간 대리점들이 도산하는 일이 많았다.

우리 양조장은 돈 주고 원료를 사 왔는데, 대리점에 공급한 술 대금은 받지 못하니 양조장 사정이 어려웠다.

--청주중을 졸업하면 보통 청주고로 진학하는데, 경기고로 간 이유는.
▲ 나보다 8살 위인 큰 형이 "5형제 중 막내인 재갑이만은 고등학교를 서울로 보내자"고 했다.

중학교 3학년 담임선생님이 고입 원서를 쓸 때 어느 고등학교로 갈 것인지 물었다.

나는 서울로 간다고 했다.

담임선생님은 "너는 경기에 가도 되는데, 왜 서울로 가려고 하느냐"고 물었다.

나는 "가족이 서울로 가라고 하는데요"라고 했던 기억이 난다.

중학생 시절 나는 경기고와 서울고에 대해 몰랐다.

-- 경기고에 진학해서 공부를 열심히 했나.

▲ 나는 부모님 품에서 벗어났으니 해방감을 느꼈다.

철도 없었기에 많이 놀았다.

경기고 친구들이 노는 것 같아도 뒤에서 공부를 많이 한다는 걸 나는 몰랐다.

나는 고교 시절에 성적이 좋지 않았다.

[삶] "선생님, 독극물 담배 팔아 나라예산에 쓴 시절 있었다면서요?"
-- 공부를 잘했으니 서울대 의대에 합격한 것이 아닌가.

▲ 나는 서울대 의대를 1지망으로, 식물학과를 2지망으로 지원했다.

1지망에서 떨어지고 2지망에서 붙었다.

식물학과를 그냥 다닐 생각이었는데, 아버지가 재수해서 의대에 가라고 권했다.

다음 해에 서울대 의대에 합격했다.

당시에 서울대 의대는 톱 수준의 수재들이 가는 곳이 아니었다.

수재들은 주로 화학과, 물리학과 등에 갔다.

지금처럼 의대 경쟁률이 높지 않았다.

-- 아버지는 왜 의대 진학을 권하셨나.

▲ 의대에 가면 적어도 굶는 일은 없다고 하셨다.

아버지는 어린 시절 일제 강점기와 6·25 전쟁 시기를 보냈다.

고무신을 손에 들고 학교에 가다 사람이 보이면 얼른 신었다가 다시 맨발로 걸었다고 한다.

그런 아버지에게 굶지 않는 것은 중요한 판단 기준이었다.

아버지는 공부를 열심히 하라고 하시면서 출세하거나 돈을 벌기 위한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굶지 않으려면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고 하셨다.

-- 본인도 출세 욕망이 별로 없었나.

▲ 15대 할아버지가 조선 시대 을사사화로 돌아가셨다.

그분은 우리 집안의 정신적 지주였다.

그 할아버지는 "학문에 힘쓰되 절대로 과거 시험장에 나가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아버지도 벼슬을 하려 하지 말라는 말을 귀가 따갑게 하셨다.

그런 영향으로 나는 어떤 자리에 대한 제안이 들어오면 피하고, 안 하려 했다.

[삶] "선생님, 독극물 담배 팔아 나라예산에 쓴 시절 있었다면서요?"
-- 본인은 출세한 것이 아닌가.

▲ 서울의대 대장암 교수, 서울대 암연구소장, 국립암센터 원장, 국립중앙의료원장 등을 지냈으니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런데 내 뜻에 따라 된 것이 아니다.

나는 서울대학교 교수가 될 줄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나는 그런 능력이 안 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원래는 고향인 청주에 내려가 개원할 생각이었다.

가톨릭 의대를 졸업하고 미국에서 의사 생활을 하던 큰 형은 "청주도 너무 크니, 근처의 내수나 증평에 가서 의사 생활을 하라"고 권했다.

나보다 1년 먼저 진학했던 의대 친구들은 개원하려면 박사학위를 따두는 게 도움이 된다고 했다.

나는 박사과정을 밟았는데, 지도교수가 주변의 예상과 달리 외과의 주임교수가 됐다.

그분이 나에게 서울대 의대에 남으라고 권하셨고 나는 전임강사를 거쳐 교수가 됐다.

대장암을 선택한 것도 나의 의지는 아니었다.

그 주임교수가 "내가 아직 위암을 좀 더 해야 하니, 너는 대장암을 하라"고 해서 수용한 것이다.

-- 서울대 암연구소 소장과 국립암센터 원장은 어떻게 하게 됐나.

▲ 47세의 젊은 나이에 암연구소장이 됐다.

그 자리는 환갑 나이의 유능한 분이 맡는 곳으로, 서울대에서는 상당히 명예로운 보직이었다.

우리가 소장으로 모시려 했던 종양내과 김노경 교수가 사양하면서 나를 적극적으로 추천했다.

국립암센터 원장도 원래는 김노경 교수가 되기를 우리는 희망했으나 본인이 완강하게 거절했고, 다음으로 우리가 추천했던 분이 우여곡절 끝에 그만두면서 내가 거론됐다.

당시 나는 52세의 젊은 나이였다.

[삶] "선생님, 독극물 담배 팔아 나라예산에 쓴 시절 있었다면서요?"
-- 금연운동을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

▲ 젊은 나이에 국립암센터 원장이 됐으니 무엇을 해야 하나 고민스러웠다.

내가 볼 때 국립암센터의 목적은 국민이 암으로 죽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사람들은 암 치료가 중요하다고 생각하겠지만, 암 치료는 의료기관들이 사활을 걸고 열심히 하고 있었다.

치료실적에 따라 수입이 생기기 때문이다.

나는 국민이 애당초 암에 걸리지 않도록 하는 게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 담배가 암 발생에 결정적인가.

▲ 우리나라 전체 암 사망 원인의 30%가 담배다.

폐암뿐 아니라 신장암, 방광암, 후두암 등 거의 모든 암을 일으킨다.

담배로 죽는 사람이 연간 6만2천 명이다.

담배 30갑의 연기에서 나오는 청산 가스만 모아 70㎏ 체중의 사람이 한 번에 마시면 치사량이다.

두 명 중 한 명이 죽는다는 의미다.

석면에서 발암물질 한 가지만 나와도 세상이 난리인데, 담배에는 69종의 발암물질이 들어있다.

발암물질은 30억 쌍의 유전자 부호에 영향을 주는데, 유전자 부호 하나만 바뀌어도 문제가 발생한다.

세포가 빨리 자라거나, 적당한 시점에 소멸해야 하는데 계속 살아있게 된다.

이것이 암 발생이다.

-- 담배 참느라 스트레스받는 게 암을 일으킨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는데.
▲ 스트레스가 암 발생의 원인인지는 학술적으로 확인되지 않았다.

담배를 피운다고 해서 스트레스가 해소되는 것도 아니다.

혈중 니코틴 농도가 떨어지면 불안해지고, 담배를 피우면 농도가 올라가 잠시 불안이 줄어드는 것뿐이다.

[삶] "선생님, 독극물 담배 팔아 나라예산에 쓴 시절 있었다면서요?"
-- 여성 흡연자의 경우 태아에 안 좋은 영향을 주나.

▲ 여자는 두 개의 난소에 각각 100만 개씩 200만 개의 난자를 갖고 태어난다.

남성은 정자를 계속 새로 생산한다.

여자는 난자를 새로 생산하는 것이 아니므로 흡연 영향을 더 받게 된다.

임신한 사람이 담배를 피우면 체내 산소량이 줄어들어 산소가 태아 두뇌에 충분히 들어가지 않는다.

이는 아이의 지능 등 여러 분야에 부정적 영향을 준다.

-- 술도 매우 해로운가.

▲ 술도 국제암연구소가 정한 1군 발암물질이다.

-- 전자담배는 궐련보다 덜 해로운가.

▲ 궐련보다 가열 담배(궐련형 전자담배)가 덜 해롭긴 하지만, 전자담배도 안 피우는 것보다는 엄청나게 해롭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담배는 끊어야 한다.

[삶] "선생님, 독극물 담배 팔아 나라예산에 쓴 시절 있었다면서요?"
-- 담배판매로 생기는 세금을 국가 재정에 쓰는 것은 문제가 있나.

▲ 독극물을 팔아서 세수를 확보하고, 이것으로 재정을 운용하는 것은 국가가 국민을 대상으로 벌이는 사기극이다.

우리나라에 보건복지부가 있는데 이것도 말이 안 된다.

담배를 팔면서 어떻게 보건이라는 말을 붙일 수 있는가.

모든 보건정책을 합해도 담배로 인한 폐해를 극복할 수 없다.

그냥 복지부라고 하는 게 맞다.

우리 후손들은 담배를 팔아서 얻은 세금으로 국가 재정을 운용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깜짝 놀랄 것이다.

-- 담배는 대마초보다 건강에 더 안 좋은가.

▲ 내가 검찰에 방문해서 금연에 대해 강의한 적이 있었다.

당시 서울중앙지검장이 과거에 담배를 피우면서 대마초 흡연자를 심문하곤 했다고 했다.

나는 "독한 마약을 하면서 순한 마약을 했다고 조사한 것"이라고 했다.

담배가 대마초보다 중독성이 강하다.

-- 어떻게 해야 하나.

▲ 담배 제조와 매매를 금지하는 법률을 제정해야 한다.

당장 흡연을 불법화하자는 것이 아니다.

법을 만든 다음에 입법예고를 통해 10년∼15년 후에는 담배를 팔지 않으니 줄여나갈 것을 권고하고, 흡연자 수가 많이 줄어들어 50만 명 정도로 되면 정부가 관리하면 된다.

환자처럼 의사 처방에 따라 제한적으로 담배를 제공하는 방식이다.

[삶] "선생님, 독극물 담배 팔아 나라예산에 쓴 시절 있었다면서요?"
-- 담배 제조와 매매를 금지하는 법안을 제출한 적이 있지 않나.

▲ 2006년에 입법청원을 했다.

대표 청원인은 김대중 전 대통령, 박관용 전 국회의장, 박재갑 등 3명이었다.

청원을 받은 국회는 논의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

17대 국회 때 입법과 관련해 나한테 설명해보라는 국회의원이 없었다.

딱 한 번 문서로 연락이 왔다.

문서에는 "귀하의 입법청원은 17대 국회 회기가 끝났으므로 자동 폐기됐음을 알려드립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18대 국회 때 다시 입법청원을 했더니 마찬가지로 아무런 연락이 없다가 똑같은 문서가 왔다.

-- 헌법소원도 내지 않았나.

▲ 2012년에 담배사업법 위헌 확인 소송을 이석연 변호사(전 법제처장)와 함께 헌법재판소에 제기했다.

헌재는 몇 년을 끌더니 2015년 4월 30일 금요일 오후에 많은 안건 가운데 담배사업법 건을 끝부분에 집어넣어 기각한다고 판결했다.

판결 직후에 뉴스가 나오지 않았다.

다음날이 노동절 휴일이어서 그다음에 보도될 줄 알았는데, 깜깜무소식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기자단이 1주일 후에나 보도하는 엠바고를 걸었다고 한다.

아는 사람을 통해 확인한 것이지만 헌재 소장은 KT&G와 비슷한 논리를 갖고 있었다고 한다.

미국 금주법 시행 당시 마피아만 돈을 벌고 사회 혼란이 왔으니 담배를 금지할 수 없다는 이야기였다.

헌재는 정치권과 달리 거룩한 집단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다.

언론도 썩었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 시민단체와 함께 운동을 펼치는 게 효과적일 듯한데.
▲ 경실련이나 참여연대 같은 시민단체도 문제가 있다.

경실련은 경제정의 관점에서 담배 문제를 제기해야 하는데, 침묵만 지키고 있다.

참여연대는 정치적인 집단이라고 생각해서 아예 접근조차 안 했다.

[삶] "선생님, 독극물 담배 팔아 나라예산에 쓴 시절 있었다면서요?"
-- 코미디언 이주일 씨(작고)는 흡연으로 폐암에 걸린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가 있던데.
▲ 전 이수성 총리가 국립암센터 원장이었던 나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이주일이 폐암에 걸렸는데, 치료해달라는 것이었다.

이주일 씨는 국립암센터에 입원한 이후 TV 예능 프로그램에서 자신의 폐암은 흡연과 상관없다고 이야기했다.

내가 확인해봤더니 그의 폐암도 흡연과 관련이 있었다.

나는 국립암센터 내 그의 병실을 찾아가 금연 광고에 출연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선뜻 수용했고, 출연료도 받지 않았다.

이 광고는 국민에게 충격을 줬고, 많은 흡연자가 담배를 끊는 계기가 됐다.

-- 정치인들도 금연했나.

▲ 김대중 전 대통령은 미국에서 살고 있을 때 담배를 피웠더니 주변 사람들이 야만인으로 취급해서 끊었다고 했다.

한광옥 김대중 대통령 비서실장, 전윤철 전 경제부총리도 담배를 끊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담배를 끊지 못했다고 나한테 말한 적이 있다.

그분이 돌아가시기 1년 전이었다.

[삶] "선생님, 독극물 담배 팔아 나라예산에 쓴 시절 있었다면서요?"
-- KT&G는 민영화됐다고 하는데, 바람직한가.

▲ 전매청 시절에 선배들은 국가가 담배를 만든다는 것에 대해 비판했다.

일본과 중국은 아직도 국가가 직접 담배 사업을 하고 있다.

내가 국립암센터 원장 시절에 KT&G 사장이 만나자고 해서 식사를 한 적이 있다.

그는 암센터 연구비로 아무 조건 없이 매년 150억원을 주겠다고 했다.

나는 당연히 거절했고, 밥값도 내가 냈다.

-- 담배가 사라질 날이 올까.

▲ 뉴질랜드의 한 지자체가 담배 금지를 추진 중인 것으로 알고 있다.

불교국가인 부탄도 담배를 금지하고 있지만, 불법 밀수가 적지 않다고 한다.

우리나라가 담배 금지를 입법화한다면 사실상 세계 처음이다.

역사적으로 기록될 일이다.

-- 금연운동의 최종 목표는 무엇인가.

▲ 흡연율을 낮추는 것이 목표가 아니다.

흡연율 30%를 20%로 낮추는 것이 목표가 될 수는 없다.

담배를 만들거나 팔거나 사지 않도록 하는 것, 담배 제조 및 매매금지가 목표다.

(취재지원 이건희 인턴기자)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