伊 정치계 거목 베를루스코니…영광만큼 짙었던 추문·비리 그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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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수성가 재벌에서 정치인 변신…특유의 카리스마로 3차례 총리 재임
'스캔들 제조기' 악명에 "국격 추락, 경제 퇴행" 비판도
한때 정계에서 퇴출됐다 지난해 총선에서 상원의원으로 복귀 12일(현지시간) 향년 86세로 별세한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전 총리는 빛과 그늘의 양극단을 오간 정치인이다.
베를루스코니 전 총리는 이탈리아의 불안정한 정치 환경에서 드물게 장수했고, '스캔들의 제왕'이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을 얻을 정도로 서방 지도자 중에서 그보다 빈번하게 가십난에 등장한 인물도 드물다.
그의 독특한 매력과 카리스마를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와 동시에 '국격'을 떨어뜨린 장본인이자 이탈리아 경제를 후퇴시키고, 만성적인 재정 적자라는 고질병을 떠안긴 인물이라는 평가도 받고 있다.
베를루스코니 전 총리는 1936년 9월 29일 이탈리아 북부 도시 밀라노의 평범한 중산층 가정에서 은행원인 아버지와 주부인 어머니 사이에서 3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밀라노 국립대에서 법학을 전공한 그는 졸업 후 고향 밀라노에서 건설회사를 차려 성공 가도를 달렸다.
그는 건설업을 통해 모은 자본을 종잣돈 삼아 미디어 산업에 진출해 전국적 규모의 민간 방송 채널을 세 개나 소유한 미디어 재벌이 됐다.
이탈리아 최고 갑부가 된 그는 1986년 이탈리아 최고 명문 프로축구단인 AC밀란을 인수했다.
그가 구단주로 있을 때 적극적인 투자 속에 AC밀란은 유럽과 세계 클럽 챔피언을 여러 차례 차지하며 전성기를 맞았다.
축구는 이탈리아인들에게 종교에 버금갈 정도로 일상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막대하다.
그는 1994년 1월 이탈리아 국민들이 축구 국가대표팀을 응원할 때 쓰던 구호인 '포르자 이탈리아'(Forza Italia·전진이탈리아)란 정당을 창당하고 같은 해 3월 총선에서 승리해 총리가 됐다.
자수성가 기업가의 이미지, AC밀란 구단주로서의 인기와 더불어 자신이 소유한 언론사의 영향력을 십분 활용해 정당 결성 수개월 만에 '벼락 총리'가 된 것이다.
1994년 총선에서 처음 집권에 성공, 7개월 동안 총리를 지낸 그는 2001∼2006년, 2008∼2011년 다시 총리직을 맡았다.
3차례(2005년 이뤄진 개각을 감안하면 4차례)에 걸쳐 9년간 총리를 지내며 2차 대전 이후 이탈리아 최장수 총리 기록을 수립했다.
그는 2001년 2번째 집권에 성공하자 자신이 가진 3개의 민영방송(44%)과 공영방송 라이(RAI)(45%)를 모두 장악할 수 있는 '가스파리법'을 만들면서 이탈리아 방송 시장의 90% 이상을 점유함으로써 정계를 쥐락펴락했다.
이탈리아 국민들은 그가 기업가적인 대담함으로 이탈리아 경제를 살릴 것으로 기대했지만 그의 재임 기간 경제 성장은 정체됐고, 국가 경쟁력은 추락했다.
그가 노동시장 활성화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추진한 노동 개혁 법안은 비정규직을 대거 양산했다.
청년들은 인턴십, 알바, 단기 계약직으로 일하며 한 달에 1천유로(약 130만원) 이상 못 버는 이른바 '1천유로 세대'로 전락했다.
고학력 젊은이들의 해외 유출이 가속화됐고, 이탈리아의 국가 부채는 한때 세계 3위에 이를 정도로 불어났다.
그러나 베를루스코니가 장악한 언론은 이런 현실에 침묵했다.
대안 정치세력마저 부재한 상황에서 베를루스코니는 2008년 3선에 성공했다.
베를루스코니 전 총리는 2008년 세 번째로 총리직에 복귀한 이후 53번의 신임투표에 직면했을 정도로 집권 기간 내내 온갖 성 추문과 비리, 마피아 커넥션 등 의혹이 끊이지 않았다.
한 국가의 지도자답지 않은 경박한 말과 행동은 늘 논란을 일으켰다.
2008년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에 대해 젊고 잘생기고 제대로 선탠했다고 말해 국제적인 비난을 받았고, 이듬해 방미해선 오바마 대통령 부부 모두에게 "선탠했다"고 말해 외교적 결례를 범했다.
그는 10대 슈퍼모델들과 집단 섹스 파티를 벌이고 관계가 있던 모델 출신을 장관으로 임명하기도 했다.
2014년 이혼 후 49살 연하에 이어 손녀뻘 여성과 잇따라 결혼과 이혼을 반복했다.
그를 따라다닌 추문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이 '붕가붕가'(Bunga Bunga·성행위를 뜻하는 은어) 스캔들이다.
그는 2010년 밀라노 인근에 있는 자신의 호화 별장에서 당시 17세로 미성년자였던 모로코 출신 댄서 카루마 엘 마흐루그, 일명 '루비'에게 돈을 주고 성관계를 한 혐의로 기소됐다.
당시 언론에선 베를루스코니가 개최한 이 질펀한 섹스 파티를 '붕가붕가 파티'로 부르며 대서특필했다.
이 스캔들은 베를루스코니의 이미지뿐만 아니라 이탈리아 국가 전체의 이미지에도 먹칠을 한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그런데도 그는 '스캔들의 제왕'이라는 별명에 대해 "이탈리아 사람들은 나를 닮고 싶어 한다"고 당당하게 말하며 이탈리아 국민의 독특한 기질에 호소하는 배짱을 과시했다.
베를루스코니 전 총리는 2011년 이탈리아가 국가 부도 위기 직전까지 가는 벼랑 끝에 몰리자 국내외의 압력으로 자리에서 물러났다.
당시 영국 시사 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그를 "이탈리아 경제를 말아먹은 인물"이라고 비난했다.
그는 이후 미성년자 성 매수, 탈세, 수뢰 등의 혐의로 계속 법정에 불려 다녀 체면을 구겼고, 2013년에는 탈세 재판에서 끝내 유죄를 선고받으며 상원의원직을 박탈당하고 정계를 떠나는 처지가 됐다.
2016년 여름 심장 판막 교체 수술을 받은 뒤로는 각별히 애정을 쏟은 축구단 AC밀란을 중국 자본에 매각하는 등 주변을 정리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 그의 은퇴는 기정사실로 여겨졌다.
그러나 그는 5년간 공직 진출이 금지된 상황에서도 우파 연합의 구심점 역할을 하며 막후에서 상당한 입김을 행사했다.
그는 2019년 족쇄가 풀리자마자 유럽의회 선거에 출마해 당선되면서 정계에 본격 복귀했다.
지난해 9월 총선에서는 10년 만에 상원의원으로 복귀했고, 그가 이끄는 전진이탈리아(FI)는 조르자 멜로니 총리의 이탈리아형제들(Fdl) 등과 우파 연합을 결성해 총선 승리를 견인하기도 했다.
베를루스코니는 멜로니를 이탈리아 사상 첫 여성 총리로 올려놓으며 '킹메이커'로서 여전한 영향력을 과시했다.
그러나 수십 년 동안 '불사조'처럼 이탈리아 정치권을 장악해왔던 베를루스코니도 세월의 파고는 넘지 못했다.
최근 2년간 만성 골수 백혈병(CML)을 앓아온 그는 결국 계속된 입원 치료에도 건강을 회복하지 못하고 파란만장한 인생을 마감했다.
이탈리아를 넘어 전 국제사회에서 베를루스코니 전 총리보다 더 논쟁적인 정치지도자를 찾기 힘들 만큼 그는 하나의 '미스터리 현상'이다.
독특한 정치철학으로 '베를루스코니주의'라는 용어까지 탄생시킨 그가 어떻게 3차례나 총리를 지내고 지금까지도 여전히 높은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지는 쉽게 설명하기 어렵다.
미디어 재벌로서의 그의 영향력, 2차 대전 전후 수십차례 정권교체에 따른 정치혐오감 또는 무관심 등이 원인으로 지목되기도 했지만, 언제나 결론은 "이해하기 힘들다"였다.
/연합뉴스
'스캔들 제조기' 악명에 "국격 추락, 경제 퇴행" 비판도
한때 정계에서 퇴출됐다 지난해 총선에서 상원의원으로 복귀 12일(현지시간) 향년 86세로 별세한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전 총리는 빛과 그늘의 양극단을 오간 정치인이다.
베를루스코니 전 총리는 이탈리아의 불안정한 정치 환경에서 드물게 장수했고, '스캔들의 제왕'이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을 얻을 정도로 서방 지도자 중에서 그보다 빈번하게 가십난에 등장한 인물도 드물다.
그의 독특한 매력과 카리스마를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와 동시에 '국격'을 떨어뜨린 장본인이자 이탈리아 경제를 후퇴시키고, 만성적인 재정 적자라는 고질병을 떠안긴 인물이라는 평가도 받고 있다.
베를루스코니 전 총리는 1936년 9월 29일 이탈리아 북부 도시 밀라노의 평범한 중산층 가정에서 은행원인 아버지와 주부인 어머니 사이에서 3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밀라노 국립대에서 법학을 전공한 그는 졸업 후 고향 밀라노에서 건설회사를 차려 성공 가도를 달렸다.
그는 건설업을 통해 모은 자본을 종잣돈 삼아 미디어 산업에 진출해 전국적 규모의 민간 방송 채널을 세 개나 소유한 미디어 재벌이 됐다.
이탈리아 최고 갑부가 된 그는 1986년 이탈리아 최고 명문 프로축구단인 AC밀란을 인수했다.
그가 구단주로 있을 때 적극적인 투자 속에 AC밀란은 유럽과 세계 클럽 챔피언을 여러 차례 차지하며 전성기를 맞았다.
축구는 이탈리아인들에게 종교에 버금갈 정도로 일상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막대하다.
그는 1994년 1월 이탈리아 국민들이 축구 국가대표팀을 응원할 때 쓰던 구호인 '포르자 이탈리아'(Forza Italia·전진이탈리아)란 정당을 창당하고 같은 해 3월 총선에서 승리해 총리가 됐다.
자수성가 기업가의 이미지, AC밀란 구단주로서의 인기와 더불어 자신이 소유한 언론사의 영향력을 십분 활용해 정당 결성 수개월 만에 '벼락 총리'가 된 것이다.
1994년 총선에서 처음 집권에 성공, 7개월 동안 총리를 지낸 그는 2001∼2006년, 2008∼2011년 다시 총리직을 맡았다.
3차례(2005년 이뤄진 개각을 감안하면 4차례)에 걸쳐 9년간 총리를 지내며 2차 대전 이후 이탈리아 최장수 총리 기록을 수립했다.
그는 2001년 2번째 집권에 성공하자 자신이 가진 3개의 민영방송(44%)과 공영방송 라이(RAI)(45%)를 모두 장악할 수 있는 '가스파리법'을 만들면서 이탈리아 방송 시장의 90% 이상을 점유함으로써 정계를 쥐락펴락했다.
이탈리아 국민들은 그가 기업가적인 대담함으로 이탈리아 경제를 살릴 것으로 기대했지만 그의 재임 기간 경제 성장은 정체됐고, 국가 경쟁력은 추락했다.
그가 노동시장 활성화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추진한 노동 개혁 법안은 비정규직을 대거 양산했다.
청년들은 인턴십, 알바, 단기 계약직으로 일하며 한 달에 1천유로(약 130만원) 이상 못 버는 이른바 '1천유로 세대'로 전락했다.
고학력 젊은이들의 해외 유출이 가속화됐고, 이탈리아의 국가 부채는 한때 세계 3위에 이를 정도로 불어났다.
그러나 베를루스코니가 장악한 언론은 이런 현실에 침묵했다.
대안 정치세력마저 부재한 상황에서 베를루스코니는 2008년 3선에 성공했다.
베를루스코니 전 총리는 2008년 세 번째로 총리직에 복귀한 이후 53번의 신임투표에 직면했을 정도로 집권 기간 내내 온갖 성 추문과 비리, 마피아 커넥션 등 의혹이 끊이지 않았다.
한 국가의 지도자답지 않은 경박한 말과 행동은 늘 논란을 일으켰다.
2008년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에 대해 젊고 잘생기고 제대로 선탠했다고 말해 국제적인 비난을 받았고, 이듬해 방미해선 오바마 대통령 부부 모두에게 "선탠했다"고 말해 외교적 결례를 범했다.
그는 10대 슈퍼모델들과 집단 섹스 파티를 벌이고 관계가 있던 모델 출신을 장관으로 임명하기도 했다.
2014년 이혼 후 49살 연하에 이어 손녀뻘 여성과 잇따라 결혼과 이혼을 반복했다.
그를 따라다닌 추문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이 '붕가붕가'(Bunga Bunga·성행위를 뜻하는 은어) 스캔들이다.
그는 2010년 밀라노 인근에 있는 자신의 호화 별장에서 당시 17세로 미성년자였던 모로코 출신 댄서 카루마 엘 마흐루그, 일명 '루비'에게 돈을 주고 성관계를 한 혐의로 기소됐다.
당시 언론에선 베를루스코니가 개최한 이 질펀한 섹스 파티를 '붕가붕가 파티'로 부르며 대서특필했다.
이 스캔들은 베를루스코니의 이미지뿐만 아니라 이탈리아 국가 전체의 이미지에도 먹칠을 한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그런데도 그는 '스캔들의 제왕'이라는 별명에 대해 "이탈리아 사람들은 나를 닮고 싶어 한다"고 당당하게 말하며 이탈리아 국민의 독특한 기질에 호소하는 배짱을 과시했다.
베를루스코니 전 총리는 2011년 이탈리아가 국가 부도 위기 직전까지 가는 벼랑 끝에 몰리자 국내외의 압력으로 자리에서 물러났다.
당시 영국 시사 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그를 "이탈리아 경제를 말아먹은 인물"이라고 비난했다.
그는 이후 미성년자 성 매수, 탈세, 수뢰 등의 혐의로 계속 법정에 불려 다녀 체면을 구겼고, 2013년에는 탈세 재판에서 끝내 유죄를 선고받으며 상원의원직을 박탈당하고 정계를 떠나는 처지가 됐다.
2016년 여름 심장 판막 교체 수술을 받은 뒤로는 각별히 애정을 쏟은 축구단 AC밀란을 중국 자본에 매각하는 등 주변을 정리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 그의 은퇴는 기정사실로 여겨졌다.
그러나 그는 5년간 공직 진출이 금지된 상황에서도 우파 연합의 구심점 역할을 하며 막후에서 상당한 입김을 행사했다.
그는 2019년 족쇄가 풀리자마자 유럽의회 선거에 출마해 당선되면서 정계에 본격 복귀했다.
지난해 9월 총선에서는 10년 만에 상원의원으로 복귀했고, 그가 이끄는 전진이탈리아(FI)는 조르자 멜로니 총리의 이탈리아형제들(Fdl) 등과 우파 연합을 결성해 총선 승리를 견인하기도 했다.
베를루스코니는 멜로니를 이탈리아 사상 첫 여성 총리로 올려놓으며 '킹메이커'로서 여전한 영향력을 과시했다.
그러나 수십 년 동안 '불사조'처럼 이탈리아 정치권을 장악해왔던 베를루스코니도 세월의 파고는 넘지 못했다.
최근 2년간 만성 골수 백혈병(CML)을 앓아온 그는 결국 계속된 입원 치료에도 건강을 회복하지 못하고 파란만장한 인생을 마감했다.
이탈리아를 넘어 전 국제사회에서 베를루스코니 전 총리보다 더 논쟁적인 정치지도자를 찾기 힘들 만큼 그는 하나의 '미스터리 현상'이다.
독특한 정치철학으로 '베를루스코니주의'라는 용어까지 탄생시킨 그가 어떻게 3차례나 총리를 지내고 지금까지도 여전히 높은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지는 쉽게 설명하기 어렵다.
미디어 재벌로서의 그의 영향력, 2차 대전 전후 수십차례 정권교체에 따른 정치혐오감 또는 무관심 등이 원인으로 지목되기도 했지만, 언제나 결론은 "이해하기 힘들다"였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