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스 3세의 즉위식, 이 숨막히는 안무가 왕실을 지탱한다
▲출처: 로이터


지난 5월 6일 영국 찰스 3세의 즉위식이 열렸습니다. 의식은 버킹엄 궁전에서 웨스트민스터 사원까지 ‘왕의 행렬’로 이동하여 대관의식을 치른 후 다시 ‘대관식 행진’으로 버킹엄 궁전으로 돌아오는 구성이었습니다. 대관 의식만 두 시간 거행된 데다 사흘간 축제까지 열렸으니 보기 드물게 거창한 왕실행사였습니다.

백마 6필이 이끄는 황금마차를 탄 왕이 무려 삼천 명의 군인의 호위를 받으며 행렬하는 모습을 보며 발레전공자인 저는 기시감이 들었습니다. 역사책을 읽으며 상상했던 장면 때문입니다.

발레의 시작은 르네상스 시대 대행렬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이탈리아 대영주들은 결혼식이나 즉위식, 왕족의 방문 등 특별한 행사를 치를 때면 가장행렬과 마차, 무용수와 광대 등 온갖 볼거리로 호화스런 행렬을 조직해 성에서 출발하여 영지를 한 바퀴 돌았다고 하지요. 행렬은 지배계층이 부와 권력을 과시하고 승인받는 수단이었습니다. 찰스 3세의 행렬을 보기 위해 일부 시민들이 며칠 전부터 명당자리를 맡으려 텐트를 치고 기다렸다는 소식엔 특별한 볼거리에 몰려든 민중들의 모습이 겹쳤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선 내빈들이 자리 잡은 후 식이 시작되면 영연방 국가 대표들과 왕실 가족들, 주교 일행, 그리고 왕세자가 차례로 입장했습니다. 중요한 사람일수록 늦게 등장한다는 원리에 따라 섬세하게 계획된 행렬입니다.

발레 작품에도 행렬이 많습니다. <백조의 호수>, <지젤>, <레이몬다> 등 유명한 발레 작품들엔 긴 행렬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라바야데르>의 3막 결혼식 장면에선 무용수는 물론이고 황금불상과 가마, 코끼리까지 동원되는 호화찬란한 행렬이 5분 가까이 진행되며 권위를 과시합니다. 물론 주인공이 제일 마지막에 등장하고요.
찰스 3세의 즉위식, 이 숨막히는 안무가 왕실을 지탱한다
▲출처: 인사이더

행렬은 단순한 행위입니다. 걷기 외엔 별 다른 동작이 없지요. 하지만 한 방향으로 걷습니다. 제자리에 고정된 관람자에겐 계속하여 다가왔다 사라지는 사람들이 활동사진처럼 흥미롭습니다. 가장 단순한 형태의 스펙터클인 것이죠. 군인의 각 맞춘 행진이나 놀이공원의 화려한 행렬도 있지만, 민속 축제의 퍼레이드나 시위 행렬에서 보듯 다양한 개인과 집단이 모여 한 방향으로 함께 걷는 것만으로도 큰 힘을 발휘합니다.

행렬에선 목적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과정과 절차가 중요합니다. 얼마나 많은 이가 참여했나, 얼마나 화려하거나 보기 드문가, 누가 어떤 순서로 걷는가에 섬세하게 조율된 의미가 담겨있지요.
찰스 3세의 행렬에서 가장 의미심장했던 부분은 동선이었습니다. 버킹엄 궁전에서 출발했다가 다시 돌아오는 사이 왕세자는 왕이 되었습니다. 거리의 시민들은, 정작 대관의식은 두 눈으로 보지 못했지만 새로운 왕을 환영했습니다. 70년 인생에 65년을 기다려온 왕세자가 드디어 왕이 되었음을 천명하는 순간입니다.

대관의식은 길고 느리고 복잡했습니다. 하지만 안무의 눈으로 보면 흥미로워집니다. 안무는 움직임을 구성하는 행위입니다. 주로 춤에서 사용되지만 춤에만 국한되는 개념은 아닙니다. 행과 열을 맞춰 행진하는 군인의 행렬도, 지치지 않고 이동하기 위해 자리를 바꿔가며 날아가는 철새의 이동도 안무입니다.
찰스 3세의 즉위식, 이 숨막히는 안무가 왕실을 지탱한다
▲출처: 더스타

대관의식에선 왕세자가 성경에 손대고 선서했다가, 의자로 이동했다가, 옷을 갈아입었다가, 각종 레갈리아를 들었다가 합니다. 모두 상징적이고 추상적인 의미를 구체적인 사물, 그리고 이와 관계 맺는 신체 움직임으로 변환시키는 의식들입니다. 하지만 움직임의 대부분이 서기와 앉기에 국한됩니다. 왕을 포함하여 의식을 주도하는 이들은 실수하지 않고 절차에 따르기 위해 온 몸이 경직되어 있었습니다. 내빈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두 시간 이상 팔 한 번 뻗지 못하고 앉아있기란 얼마나 힘든가요. 워낙에 꼼짝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한 영국 왕실 근위대조차 긴 행사를 준비하느라 쓰러질 정도였습니다. 모두들 움직이지 않기라는 안무를 행한 셈입니다.
막대한 인력을 동원한 행렬과 몸의 움직임을 극도로 제한한 대관의식은 엄숙하고 장대한 안무였습니다. 이 숨 막히는 안무는 21세기에 왕실을 지탱해주는 가느다란 생명줄인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