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요사 권위자 박성서 평론가 "왜색 벗어나 서구 음악에 우리 것 접목 계기"
패티김·윤복희·한명숙·키보이스 등 배출…'프듀' 뺨치는 혹독한 오디션 치러
미8군쇼 70년…"K팝 한류의 원류로 기억돼야"
"그 어렵던 시절 이곳에서 젊음을 불사른 분들이 있었기에 우리 음악이 K팝 한류로까지 이어질 수 있었습니다.

미8군쇼는 그야말로 K팝 한류의 원류로 기억될 가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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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한미군 기지에서 일반 시민에 개방된 서울 용산 어린이정원에서 '한국 대중음악의 산실' 역할을 하던 미8군쇼 70년사를 조명하는 뜻깊은 전시가 열리고 있다.

김시스터즈, 패티김, 윤복희, 한명숙, 현미, 최희준, 신중현, 키보이스, 장미화, 조용필 등 한국 가요 전성기를 열어젖힌 스타를 배출한 미8군쇼의 이모저모를 소개하는 자리다.

전시를 구성·정리한 한국 가요사 연구의 권위자 박성서 대중음악평론가는 28일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우리 대중음악이 광복 이전까지는 일본의 영향을 강하게 받다가 미8군쇼를 통해 서구화되기 시작했다"며 "왜색을 벗어나 서구 음악에 우리 것을 접목해 우리만의 또 다른 장르를 만들어냈다"고 평가했다.

박 평론가에 따르면 미8군쇼는 1953년 한국전쟁 휴전 이후 우리나라에 주둔한 미군을 대상으로 한 음악 무대다.

미8군 쇼단은 연주인 5∼7명, 가수 2∼3명, 무용수 3∼5명, MC, 음향, 조명, 매니저 등 17명가량으로 구성됐다.

이는 미군 트럭 한 대로 한 번에 이동할 수 있는 인원이기도 했다.

늦은 시간 공연을 마치면 통행금지 때문에 미군 측에서 출연자 전원을 집까지 데려다줬다.

미8군쇼가 흥행 가도를 달리고 규모가 커지면서 정부는 1958년께부터 쇼단을 상공부 등록허가제로 바꿨다.

미8군쇼의 전성기인 1960년대 미8군쇼 공급대행업체 소속 쇼단은 20여개에 달했다.

당시 활약하던 가수들의 면면을 보면 '미국 한류의 원조'로 꼽히는 김시스터즈, 유독 '최초'란 수식어를 많이 몰고 다닌 패티김, '노오란 샤쓰의 사나이' 한명숙, 미니스커트 붐을 일으킨 윤복희, 작곡가 이봉조와 음악적 콤비를 이뤄 활약한 현미 등으로 화려했다.

미8군쇼 70년…"K팝 한류의 원류로 기억돼야"
박 평론가는 "당시 '꿈의 무대'로 불리던 미8군쇼에 서기 위해서는 미군 부대에서 파견된 쇼 관계자가 심사하는 오디션을 거쳐야 했다"며 "이 오디션을 통과한 가수들이 우리 음악의 흐름을 완전히 바꿔놓으면서 '가요 르네상스'가 시작됐다"고 말했다.

오디션 결과에 따라 가수들은 AA, A, B, C, D로 등급이 매겨졌다.

등급에 따라 1회 기준 출연료도 140달러(AA), 120달러(A), 100달러(B), 80달러(C)로 나뉘었다.

D 등급은 탈락이었다.

또 높은 등급을 받은 가수들은 장교 클럽에서 공연할 자격을 얻었다.

이 오디션은 한 번만 통과하면 되는 게 아니라 3개월마다 재심사를 받아야 할 정도로 엄격했다.

이에 윤복희 등 A 등급을 꾸준히 유지한 가수들의 자부심은 대단했다고 한다.

그야말로 '프로듀스 101'이나 '보이즈플래닛' 같은 K팝 오디션 프로그램 못지않은 시스템이었다.

박 평론가는 "가수들은 최신곡을 소화할수록 더 높은 점수를 딸 수 있었기에 늘 AFKN 라디오를 들으며 미국 최신 음악의 멜로디를 익혔다"며 "공개 오디션 현장에서 펼쳐지는 쇼의 구성, 음악성, 테크닉 등은 서로의 비교·연구 대상이었다.

이 같은 실전을 방불케 하는 오디션 시스템이 미8군쇼가 성장하는 힘의 원천이었다"고 짚었다.

또한 "이러한 과정을 거쳐 미국을 필두로 한 서구권 세계 음악의 흐름이 우리 가요계로 유입됐다"며 "현재 전 세계에서 사랑받는 K팝 한류의 원류가 미8군쇼에 있다는 말이 그래서 과장이 아닌 것"이라고 강조했다.

실제로 초창기 어눌한 영어로 미국 음악 모방에서 출발한 미8군쇼는 차차 미군 부대를 넘어 우리 대중음악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출연 가수들이 남는 시간을 활용해 TV 방송, 음반 취입, 일반 무대 공연을 통해 일반 대중을 상대로도 활약했기 때문이다.

특히 1961년 '노오란 샤쓰의 사나이'(한명숙)의 대히트는 미8군 가수들이 일반 무대로 대거 진입하게 된 일대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미8군쇼 70년…"K팝 한류의 원류로 기억돼야"
1960년대 비틀스가 서구권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끈 것과 맞물려 우리 가요계에 그룹사운드(밴드)가 전면에 등장하게 된 계기도 미8군쇼였다.

박 평론가는 "1960년대 이전까지는 '노래는 가수, 연주는 악단'이라는 이분화된 공식이 통용됐지만 비틀스의 등장으로 기타 세 대와 드럼만으로 노래와 연주가 가능하다는 것이 입증됐다"며 "비틀스의 노래와 연주는 미8군 그룹사운드의 연습 테마이자 주요 레퍼토리였다"고 소개했다.

이 시기 '한국의 비틀스'라는 타이틀을 앞세운 키보이스를 비롯해 신중현과 애드포, 히파이브(후일 히식스), 영화 '고고 70'의 주인공인 데블스, '가왕' 조용필이 활동한 김트리오 등 다양한 그룹사운드가 활약했다.

이는 이후 1970년대 청년 문화가 꽃피우는 자양분이 됐다.

"베트남 전쟁으로 주한미군의 규모가 급격하게 축소되면서 미8군쇼도 쇠퇴했습니다.

과거의 영광은 사라졌어도 미8군쇼가 대한민국 대중음악의 판도를 바꿔 놓은 중요한 '터닝 포인트'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아요.

그래서 70년이 지난 지금도 기억할 가치가 있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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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