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리아 작가 고스포디노프의 '타임 셸터'
치매 환자들에 행복한 과거 재현해주는 클리닉…날카로운 풍자 돋보여
부커상 수상작, '영광의 과거' 집착하는 유럽 세태 꼬집어
올해 부커상 인터내셔널부문 수상작은 알츠하이머를 소재로 유럽의 암울한 전망을 유머러스한 터치로 다룬 소설 '타임 셸터'(Time Shelter·시간의 도피처)에 돌아갔다.

이 작품은 알츠하이머 환자들에게 유망한 치료법을 제공하는 한 클리닉을 둘러싼 이야기다.

'가우스틴'이라는 수수께끼의 인물이 스위스 취리히에 설립한 이 클리닉의 각 층은 알츠하이머 환자들의 과거를 10년 단위로 세밀하게 재현해 이들에게 친숙하고도 행복했던 옛 시절을 되돌려준다.

이 작품의 화자는 가우스틴의 명에 따라 세계 곳곳을 떠돌며 클리닉에 갖다 놓을 셔츠 단추, 향수, 가구 등 20세기를 재현할 물건들을 수집한다.

치매 환자들에게 행복한 기억을 되돌려준다는 취지의 이 클리닉에는 그러나 점차 건강한 사람들까지 몰려들기 시작한다.

불안하고 고통스러운 현실을 피해 찾아온 사람들로 문전성시를 이루고, 이 클리닉은 단순한 알츠하이머 치료소 이상의 의미를 갖게 된다.

'시간의 도피처'를 의미하는 제목 '타임 셸터'는 여기서 유래했다.

유럽 각국은 이 클리닉의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앞다퉈 채택하고, 급기야 자기 나라의 어떤 아름다운 과거를 재현할지를 두고 국민투표를 조직하기에 이른다.

이 소설은 미래에 대한 전망을 잃고 영광스러운 과거에 집착하는 유럽의 암울한 세태를 경쾌하면서도 유머러스한 터치로 그린, 풍자 가득한 작품이다.

심사위원장인 프랑스 작가 레일라 슬리마니는 23일(현지시간) 이 작품을 수상작으로 발표하면서 "아이러니와 멜랑콜리함이 가득한 빛나는 소설"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기억이 사라지면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에 대한 현재적이고 철학적인 질문을 제기하는 심오한 작품"이라면서 "미래를 절실히 필요로 하는, 노스탤지어가 독이 될 수도 있는 유럽 대륙에 관한 뛰어난 소설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부커상 수상작, '영광의 과거' 집착하는 유럽 세태 꼬집어
이 작품을 쓴 게오르기 고스포디노프(55)는 불가리아의 시인이자 소설가로, 유럽에서는 필명을 널리 알린 유명 작가다.

그의 작품들은 25개 언어로 번역 출간됐다.

불가리아 작가가 부커 인터내셔널 부문을 수상한 것은 그가 처음이다.

저자는 부커상조직위원회와의 사전 인터뷰에서 2016년 브렉시트(Brexit·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투표가 소설을 구상하게 된 계기라고 밝혔다.

그는 "2016년 이후 우리는 다른 세상과 다른 시간에 살고 있는 것 같았다"면서 "미국과 유럽에서 '위대한 과거'를 들먹이고 포퓰리즘으로 세계가 해체되는 상황이 나를 자극했는데, 브렉시트는 또 다른 자극제가 됐다"고 했다.

공산주의 치하의 불가리아를 겪은 작가는 "나는 '밝은 미래'를 내세웠던 체제를 겪었는데, 이제 판이 바뀌어 포퓰리스트들이 '밝은 과거'를 팔고 있다.

나는 그런 것들이 아무 실체가 없다는 걸 잘 안다"고 강조했다.

'타임 셸터'은 올해 부커 인터내셔널 수상이 유력한 작품으로 꼽혀왔다.

지난 18일 부커상 주최 측이 런던 사우스뱅크센터에서 마련한 최종후보작 낭독회에서도 여섯 작품 중 청중의 반응이 가장 뜨거웠다고 한다.

이 작품을 영어로 옮긴 번역가 앤젤라 로델은 미국 출신의 번역가 겸 배우·뮤지션으로, 2005년 불가리아로 영구 이주했다.

미국 예일대와 UCLA 등지에서 수학한 로델은 불가리아로 근거지를 옮겨 음악 활동과 TV·영화 출연 등을 하면서 불가리아 작가의 소설들을 영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꾸준히 해오고 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