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는 엄마들에게 영광을…. <더 글로리>
늦은 저녁, 한 여자아이가 피투성이가 된 얼굴로 계단 한 구석에 앉아있다. 무릎에 포장도 뜯지 않은 식칼을 올려놓은 아이가 스마트폰으로 검색하는 건 ‘촉법소년 몇 살까지’. 검색 기록에는 ‘경동맥 위치’ 같은 말들이 남겨져 있다. 선아는 아빠를 죽이려 한다.

동은(송혜교 분)은 ‘피투성이 소녀’ 선아의 집으로 향한다. 반지하 방 창문 사이로 남편에게 맞고 있는 선아의 엄마 현남을 말없이 지켜보는데 선아가 뛰어들어가 아빠에게 칼을 들이민다.

수없이 상상했겠으나 끝내 복수를 하지 못하는 딸을 보고 동은은 생각한다. 뭐가 됐든, 누가 됐든, 날 좀 도와줬다면 어땠을까. 그는 돌아서며 현남에게 ‘이모님 구합니다’라는 문자를 보낸다. 동은이 돕고 싶었던 건 '엄마' 현남일까. '딸' 선아일까.

“나는 자식을 구하기 위해 스스로 지옥을 선택한 엄마들을 알아, 연진아.”

올해 상반기 가장 뜨거웠던 드라마인 넷플릭스 오리지널 <더 글로리>는 폭력과 가해자, 그리고 피해자에 대한 이야기다. 동시에 엄마들에 대한 이야기다.
빛나는 엄마들에게 영광을…. <더 글로리>
<더 글로리>에는 ‘첫 번째 가해자’인 동은의 엄마도 있고, 가정 폭력의 피해자이지만 아이를 위해 행동하는 현남 같은 엄마도 있다. 스스로를 위해 자식을 버리는 비정한 연진의 엄마도, 자식의 행복을 위해 복수마저 응원하는 여정의 엄마도 있다. 자식을 살리기 위해 지옥을 선택한 엄마들과 그렇지 않은 엄마를 둔 아이들의 삶은 극명하게 엇갈린다.
빛나는 엄마들에게 영광을…. <더 글로리>
나의 뿌리. 내게 무조건적인 사랑을 주고, 세상 모두가 나를 등져도 망설이지 않고 달려갈 수 있는 피난처. 자식에게 엄마는 그런 존재다. 그래서 엄마가 등을 돌리면 자식은 홀로 남는다.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긴 동급생 가해자들 앞에서 단단하고 절제돼 있던 동은은 엄마 앞에선 절규한다. 자식의 학교폭력 피해를 외면하고, 딸이 몸을 뉘일 곳까지 앗아간 엄마는 첫 가해자다. 그럼에도 연진과의 공모 사실을 알고 “자식 인생 망친 년이랑 편은 먹지 말았어야지, 어떻게 날 또 버려”라며 오열하는 동은의 모습에서는 어머니의 보호와 지지를 바랐던 마음이 비친다.

현남은 반대다. 그에게 딸인 선아는 삶의 하나뿐인 기쁨이다. 그래서 남편의 폭력이 선아에게까지 번지자 남편을 죽이기로 결심한다. 사모님이라 부르는 동은은 그의 동앗줄이다. 동은의 일을 하려 운전면허를 따고, 사진 찍는 법도 배우는 현남은 웃는 일이 많아진다. 멍든 그의 얼굴에도 삶이 변할 거라는 희망이 깃든다.
'더 글로리'에서 정미희(박지아 분)가 딸 문동은(송혜교 분)을 찾아간 장면 /사진=넷플릭스
'더 글로리'에서 정미희(박지아 분)가 딸 문동은(송혜교 분)을 찾아간 장면 /사진=넷플릭스
선아에게도 엄마의 희망은 퍼진다. 아빠의 폭력은 같아도 더이상 촉법소년 연령을 검색하지 않는다. 여느날처럼 계단에 앉아서 피투성이 얼굴을 한 선아는 엄마 현남에게 말한다. “엄마 잘못이 아니야. 엄만 매일매일 최선을 다하고 있어.”

현남과 동은 모두, 선아를 보면서 어린 시절의 동은을 떠올린다. 학창시절의 동은과 선아 모두 폭력에 노출돼 있다. 그러나 선아가 현실을 버텨내고 공부를 하고,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건 태산처럼 든든한 엄마가 있어서다.

동은에게도 현남 같은 엄마가 있었다면 복수로만 가득찬 삶을 살지는 않았을지 모른다. 자퇴하고 공장에 다닐지언정 온몸의 흉터가 조금은 옅어졌을 테고, 한강 앞에서 몇 번이나 몸을 던질까 고민하던 날들은 없었을지 모른다. 현남은 복수가 끝나갈 즈음 동은에 대한 안타까움을 내비친다. “사모님은 어떤 아이였을까 가끔 궁금했는데. 웃으니 이렇게 예쁜데….”

선아가 행복하고 평범하기를 바라는 동은의 마음은, 피해자이기만 했던 자신의 어린 시절을 다른 누군가가 되풀이하지 않길 바라는 마음인 것도 같다. 엄마를 두고 미국으로 가는 선아에게 동은은 현남 대신 당부의 말을 건넨다. “공부하다 틈틈히 여행도 가고, 미술관도 가고, 천천히 저녁도 먹어.” 찌개도 끓이고 계란도 부쳐서 천천히 먹어도 되는 저녁. 현남이 꿈꿨던 평범한 일상이다.

하나 더. 동은을 살린 것도 결국 엄마의 사랑이다. 복수가 끝나고 삶에 아무것도 남지 않은 동은을 결정적인 순간 붙드는 사람은 여정의 엄마 상임이다. 아버지를 죽인 살인범에게 복수하고 싶어 몸부림치는 아들을 묵묵히 받쳐주던 상임은, 내 아들 좀 살려달라며 동은에게 삶의 의미를 다시 부여한다.

동은과 일면식도 없는 그가 폐건물 옥상을 어떻게 때마침 찾았는지는 한 가지 이유로 설명된다. 엄마니까.

노유정 기자 yjro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