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레피센트는 원래 빌런이 아니었다
# 아이 참. 나쁜 마녀야. 저렇게 여리고 귀여운 아기 공주에게 나쁜 마법을 걸다니!

어린 시절 즐겨 읽던 유명 동화들은 원전의 사악함과 공포를 걷어내고 대체로 행복한 결말을 안겨준 덕분에 인기를 끌었다. 그런데 이 예쁘고 다정한 ‘페어리 테일’들이 실은 너무나 어둡고 잔혹한 원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점차 알게 되면서 동화 속 ‘악역’들은 대체 어떤 사정이 있는 걸까 궁금해졌다.

<잠자는 숲 속의 공주>에 등장하는 나쁜 마녀. 그녀는 왜 아기에게 저주를 걸었을까. 때마침 파티에 늦은 요정이 그 저주를 감하는 일을 하지 않았다면 아기 공주의 생은 미처 펼쳐지기도 전에 마감될 뻔 하지 않았던가.

잠깐, 그런데 그녀는 왜 공주의 생일 파티에 초대 받지 못했을까?
안젤리나 졸리가 주연을 맡은 영화 <말레피센트>는 바로 그 지점에서 출발한다.

말레피센트가 처음부터 빌런이었던 건 아니다. 요정 왕국을 수호하는 역할을 가진 그는 누구에게나 친밀하고 따뜻한 존재였다. 그런데 연인이었던 인간 왕 스테판이 자신의 야망을 위해 말레피센트의 날개를 꺾었고, 이로 인해 둘이 적대적 관계가 되면서 상황이 달라진 것이다. 자,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말레피센트의 이글거리는 눈빛과 부득거리며 이를 가는 얼굴이 슬쩍 이해가 된다.

생각해보니 그 ‘빌런’의 이름이 말레피센트인 것도 영화를 보면서 알았다. 이름이… 있었구나!

# 소녀는 검을 쥔 손에 힘을 준다. 이미 호흡은 흐트러지고 몸은 쉽사리 말을 듣지 않지만 미끄러지지 않도록 버티고 있는 발과 작은 움직임조차 놓치지 않으려는 눈을 믿고 검을 휘두른다.

아아… 훈련이 고되다. 하지만 소녀는 어리광을 부리거나 푸념을 하면서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다. 소녀는 어둠의 지배를 받고 있는 세계를 구해야하는 운명을 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블 퀸의 명령을 받고 스노우 화이트의 목숨을 앗으러 왔던 헌츠맨은 소녀가 누구인지 알아보고 소녀의 스승이 된다. 이블 퀸과 맞서게 될 병기가 그렇게 길러진다.

익숙한 이야기이다. 백설공주 얘기다. 하지만 십 여 년 전 만들어진 이 영화 <스노우 화이트 앤 더 헌츠맨>은 우리에게 익숙한 이야기를 살짝 비틀어 비장미 넘치는 서사를 들려준다. 멋지다, 스노우 화이트! 세계를 구할 운명을 지닌 전사라니!

# 이야기는 꾸준히 재해석된다. 그리고 재해석 되어야 한다. 기존의 이야기들을 계속 우려먹자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보편적으로 공감할 수 있고 흥미를 가질 수 있는 이야기들의 얼개는 생각보다 그 폭이 넓지 않다. 더구나 이야기들이 엄청나게 쏟아져 나오는 지금 (그럼에도 사람들은 더 많은 이야기들을 원하고 있다. 나도 그렇다) 늘 처음인 이야기, 새로운 이야기가 나올 수는 없다.
말레피센트는 원래 빌런이 아니었다
생각해보면 많은 이야기의 원전인 신화는 그래서 대단한 이야기이다. 우리가 생각해 낼 수 있는 대부분의 이야기들이 (내용이건 구조이건) 신화에 기대고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비극적인 사랑을 그린 대표적인 이야기 ‘로미오와 줄리엣’도 그리스 로마 신화의 ‘피라모스와 티스베’의 이야기를 근간으로 삼고 있고 (이 또한 거슬러 올라가면 바빌로니아 신화에서 따 온 이야기이다 :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 2> ) 세익스피어의 유명한 희곡 <로미오와 줄리엣>은 또 이후 수많은 사랑 이야기의 원전이 되고 있으니 말이다.

로버트 와이즈 감독의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는 ‘로미오와 줄리엣’을 1960년대 뉴욕으로 옮겨 온 것이고 (이 영화 또한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 2021년 리메이크 했다) 같은 이야기는 아벨 페라라 감독에 의해 1988년 <차이나 걸>로 재탄생했다.

들어도 들어도 재미있고 마음 아픈 이 사랑 이야기는 영화로도 꽤 만들어졌는데 아마도 대표적인 작품은 1968년 프랑코 제피렐리 감독의 작품이겠다. 프랑코 제피렐리 감독은 무대연출가로도 워낙 유명해서 작품의 해석과 연출에 적합했을 것이다. 그리고 1996년 바즈 루어만 감독의 <로미오와 줄리엣>도 빼놓을 수 없는데 기존의 줄거리와 분위기를 현대로 가져 오면서 당대의 음악과 패션으로 재해석해 각광을 받았다.

수 세기 전에 쓰여진, 내로라하는 작곡가들의 악보를 보고 재현해 내는 연주자들과 지휘자들에게 있어 필수적인 것 또한 아마도 해석일 것이다. 있는 그대로 음을 내는 것을 우리는 해석이라 하지 않는다. 악보의 음표와 기호 등을 면밀히 들여다보고 작곡가는 이 음표를 통해 어떤 음악을 구현하고 싶었을까를 고민하는 과정을 통해 연주자와 지휘자는 해석에 들어간다. 그렇게 해석되어진 곡들은 그래서, 같은 악보를 보고 연주하지만 조금씩 다른 느낌, 다른 분위기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문화콘텐츠가 다루는 이야기도 그러하다. 같은 원전이겠지만 그것을 그대로 옮겨 오는 것이 아니라 중심 이야기를 어떻게 재구성하고 각 캐릭터의 성격과 성향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 방향을 잡고 서사를 다듬으면서 어떤 톤으로 작품을 세워갈 것인지 잡아가는 과정이 필요한 것이다.

# 미키 마우스로 시작된 디즈니. 엄청난 인기를 끌던 디즈니도 세월과 함께 여러 가지 이유로 부침을 겪었다. 디즈니의 이름이 예전 같지 않은 시기를 지나 1989년 애니메이션 <인어공주>가 개봉되었다. 원작의 슬픈 분위기가 쏙 빠지고 빨간 머리카락의 당돌하고 씩씩한 에어리얼을 내세운 새로운 ‘인어공주’는 전세계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이후 <알라딘>, <미녀와 야수>, <포카혼타스>, <뮬란> 등의 디즈니 애니메이션 작품들이 1990년대를 휩쓸었다. 이 애니메이션들의 공통점은 원작의 재해석이다.
말레피센트는 원래 빌런이 아니었다
나약하고 온순하고 착한 여주인공들은 씩씩하고 진취적이며 독립적인 성격으로 바뀌었고 그것은 곧 작품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 넣었다. 이렇게 재해석된 작품들은 수 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우리의 마음에 남아 있다.

위에 말레피센트나 스노우 화이트 이야기를 쓰기도 했지만 문화콘텐츠의 재해석은 단순히 캐릭터와 플롯을 바꾸는 것만 의미하지는 않는다. 주변 캐릭터에 눈을 돌려 서사를 부여하고 그 이야기를 통해 기존의 이야기를 다른 면에서 보게 하는 것. 그것이 익숙한 이야기를 새롭게 받아들일 수 있게 만드는 재해석의 힘이다.

신지혜 CBS-FM <신지혜의 영화음악> 제작 및 진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