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은 언어 갖지 못한 다른 존재들에 입 빌려주는 자"
나희덕 시인의 두 번째 시론집 '문명의 바깥으로'
시인으로서의 작품 활동 외에도 깊이 있는 비평과 마음을 건드리는 산문으로도 정평이 난 나희덕이 '보랏빛은 어디에서 오는가'(2003) 이후 20년 만에 시론집을 내놨다
'문명의 바깥으로'에서 저자는 등단 이후 꾸준히 천착해온 생명·생태·환경 등에 대한 생각을 유려하고도 날카로운 언어로 풀어냈다.

시론집이라고는 하지만 저자 자신의 시적 존재론이나 방법론을 본격적으로 개진한 책은 아니다.

그보다는 "다른 시인들의 시를 거울과 등불 삼아 읽으며 내 시의 좌표를 그려보거나 나아가야 할 방향을 가늠할 수 있었다"는 저자의 말처럼 다른 시인들에 대한 애정 고백에 가깝다.

1부에서는 자본주의의 말기적 증상과 이로 인한 생태 위기의 현실에서 시의 역할을 되짚어 보는 글을 모았다.

백무산, 허수경, 김혜순의 시들을 통해 시인들이 어떤 문제의식을 지니고 자본주의의 가공할 위력에 저항하는지를 읽어낸다.

김혜순의 시집 '피어라 돼지'(2016)에 관한 글에선 "시인은 자신의 입으로 스스로 말하는 자가 아니라 언어를 갖지 못한 다른 존재들에게 자신의 입을 빌려주는 자"라고 정의한다.

2부는 저자의 '문학적 스승'들이라 할 수 있는 정현종, 김종철, 강은교에서부터 제자들인 조온윤, 박규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시인들에 대한 작가론을 엮었다.

작가들에 얽힌 저자의 개인적인 에피소드와 생각들을 곁들여 각각의 작가와 대화를 나누는 듯한 부드러운 글들이다.

저자 역시 "주로 시인의 문학과 삶을 사숙(私淑·마음속으로 본받아 학문을 닦는 일)하거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쓴 이 글들에는 어쩔 수 없는 편애가 들어있다"고 고백한다.

시인 백석, 윤동주, 김수영, 김종삼에 관한 글을 모은 3부는 한국 현대시의 밑바탕을 살펴본다.

김현과 백낙청이 각각 엮은이로 참여한 김수영의 두 시선집을 비교한 글에선 "'거대한 뿌리'가 완전한 자유를 향한 불가능한(그래서 불온한) 싸움을 해나가는 현대적 예술가의 초상을 그려냈다면 '사랑의 변주곡'은 시대에 대응해간 시적 내력을 가감 없이 더듬어봄으로써 그의 독자성과 현재성을 새롭게 조명했다"고 분석한다.

나희덕은 시가 상처 입은 세계를 치유하는 가장 근본적인 치료 약일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그가 쓴 시를 읽는 것도, 그리고 그가 다른 시인의 시를 두고 쓴 글을 읽는 것도 모두 병든 세계를 치유하는 행위에 독자 역시 조심스럽게 동참하는 일일 것이다.

"시를 읽고 쓸수록 시에 대해 말하는 일이 조심스럽고 어려워진다.

다른 시인의 시에 대해 말한 것이 내 시의 발목을 잡는 때도 많다"면서도 여전히 시를 쓰고 시에 대해 말하는 나희덕이라는 존재가 새삼 든든하다.

창비. 280쪽.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