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년 전 '하나조노 4강'…"재일동포 존재 알리는 홍보 수단"
읏맨 럭비단서 새 도전…"나도, 선수도, 한국 럭비도 함께 성장"
'60만번의 트라이' 오영길 감독 "럭비, 차별 속에서 찾은 답"
13년 전 일본 오사카부(大阪府) 히가시오사카(東大阪)시에 있는 재일 조선인 고등학교 오사카조선고급학교(오사카조고)에 전국적으로 이목이 쏠렸다.

일본에서도 강팀이 몰려 있는 오사카부의 예선을 뚫고 '럭비의 고시엔'이라 불리는 최고 권위 고교대회 '하나조노' 4강에 올랐기 때문이다.

1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이 대회는 일본 럭비 선수에게 꿈의 무대고, 조선고교인 오사카조고는 철저한 '아웃사이더'였다.

2010년 일본에서는 모든 고교 교육을 무상화하는 정책이 도입됐지만, '조선학교' 오사카조고는 배제됐다.

혐한 단체의 '헤이트 스피치(특정 민족·국민에 대한 혐오 시위)' 표적이 되는 일도 잦았다.

"럭비는 우리의 존재와 사정을 일본 전역에 알리고 인정받는 홍보 수단 같은 거였죠."
당시 오사카조고의 이야기는 2014년 개봉한 영화 '60만 번의 트라이'에 담겼다.

이 영화 주인공으로 팀을 이끈 재일동포 오영길(55) 감독은 13년 후인 지난 3월 출범한 OK금융그룹 '읏맨 럭비단'의 초대 사령탑으로 부임했다.

오 감독은 4일 서울 중구의 대한럭비협회 사무실에서 이뤄진 연합뉴스와 인터뷰에서 왜 13년 전 자신과 제자들이 럭비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털어놨다.

'60만번의 트라이' 오영길 감독 "럭비, 차별 속에서 찾은 답"
2007년부터 8년간 학교를 7번이나 하나조노에 올려놓은 오 감독은 "내가 고등학생일 때만 해도 일본 내 차별이 많았다.

아주 힘들었다"고 돌아봤다.

오 감독은 "차별의 대상이 된다고 해서 다들 너무 비관적으로만 생각하는 경향도 있었다.

항상 권리를 뺏긴 상태라는 거다"며 "그렇게만 해서는 안 된다고 봤다.

우리도 발전해야 하고, 재일동포 학교에서도 럭비를 한다는 걸 알려야 했다"고 말했다.

차별에 맞서려면 시위 등 직접적인 목소리를 내는 방법도 있다.

이런 정치적 투쟁 대신 '럭비'를 택한 이유를 묻자 오 감독은 "동년배 학생들끼리 정정당당하게 경기를 통해 우리 학교의 존재를 공식적으로 일본 사회에 알릴 수 있지 않았느냐"고 되물었다.

오사카조고 럭비부가 공식적으로 전국대회에 모습을 드러낸 건 1994년이 처음이다.

본래 출전이 불허됐지만, 럭비 지도자·변호사 등이 서명 운동을 펼치는 등 일본 국민들의 조력에 전국대회 무대를 밟을 수 있게 됐다.

오 감독은 "공식전을 한다는 건 우리가 뛰었다는 사실이 공식 기록으로 남는다는 뜻이다.

전국대회라서 교토, 도쿄, 홋카이도 등 지방 곳곳에 알려지는 효과도 있다"고 말했다.

이어 "대회 때문에 지방을 가면 선수들 이름을 보고 다들 영어로 '일본어 할 수 있나요?'라고 물을 정도였다"며 "우리도 어이가 없었다.

일본에는 아직 이런 사람들이 많다는 생각에 럭비를 더 잘해서 인지도를 올려보자고 결심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60만번의 트라이' 오영길 감독 "럭비, 차별 속에서 찾은 답"
오 감독은 "우리 같은 학교가 있다는 사실은 알지만 거기서 어떤 학생이 배우고, 어떤 교육을 하는지는 모르더라. 인식이라는 게 그렇다"며 "우리가 오사카 대표가 되니까 바뀌었다.

모두가 당연하고 평등하게 받아들이는 게 스포츠더라"라고 답했다.

하나조노는 선수·감독 모두에게 도전이었다.

당시 오사카조고는 전교생 400명가량의 작은 학교였다.

오 감독은 "길이 어려울 수도 있다.

그래도 같이 가자, 같이 해보자고 했다.

'내가 이끌어줄게'라고 말해주고 싶지만 내게도 도전이었다"며 "해보자고 결심한 이상 포기하지 말자고 하면서 (제자들과) 같이 했다"고 힘줘 말했다.

'하나조노 4강'을 이룬 제자들을 언급할 때는 목소리에 더욱 힘이 붙었다.

그는 "일본 모든 고등학생이 똑같은 조건에서 맞붙는 대회니까 잘하라고, 거기서 잘해서 너희들의 운명을 바꿔보라고 했다"며 "당시 재일동포라서 일본 대학·기업에 들어가지 못하다는 의식이 지배적이었는데 그런 것도 바꿀 수 있으니 해보라고 했다.

지금 그 친구들 중 상당수가 일본 럭비계에서 뛰거나 기업에 다닌다"고 자랑스러워했다.

도전한 건 선수들뿐만이 아니다.

오 감독도 나름의 도전 끝에 한국에 왔다.

고교 지도자로서 학교에 남을 수도 있었지만, 수준 높은 럭비를 경험해보고자 2015년부터 일본 세미프로팀인 NTT 도코모에서 전력분석원으로 일했다.

'60만번의 트라이' 오영길 감독 "럭비, 차별 속에서 찾은 답"
30여 년 전 대회에서 적으로 처음 만났다는 재일동포 럭비선수 출신 최윤 OK금융그룹·대한럭비협회 회장과 연이 닿아 2021년부터는 협회 이사직과 한국 국가대표팀 코치직도 맡았다.

최 회장은 오 감독에게 새로 출범하는 읏맨 럭비단의 사령탑을 맡아달라고 요청했다.

낮에는 생계를 위해 OK금융그룹 실무 부서에서 일하고, 나머지 시간에 운동하는 '일하는 선수'라는 생소한 구단 운영을 담당하려면 선수들을 다독이는 리더십이 중요하다고 봤기 때문이다.

오 감독의 새 목표는 '막내' 실업팀 읏맨 럭비단의 성공이다.

선수들은 주 5회 오전 8~10시 훈련을 진행한 후 출근해 대출 심사, 채권 추심 등 각자 업무에 매진한다.

그간 럭비에 집중해온 선수들이 금융 업무를 비롯한 각종 사무에 곧장 적응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오 감독은 "13년 전 하나조노 때와 같다.

나도, 선수들에게도 읏맨 럭비단은 도전"이라며 "해보지 않으면 결국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3월 말부터 3주간 열린 코리아 슈퍼럭비리그 1차 대회가 오 감독의 국내 데뷔 무대였다.

읏맨 럭비단은 1, 2, 3라운드 모두 대패했다.

1라운드에 한국전력에 5-59로 진 읏맨 럭비단은 2·3라운드에서 현대 글로비스·포스코이앤씨와 만나 10-67, 0-43으로 깨졌다.

오 감독은 6일 인천 남동아시아드 럭비경기장에서 열리는 리그 2차 대회 1라운드 국군체육부대와 맞대결에서 첫 승을 벼르고 있다.

"일단 첫 승이 목표"라는 오 감독에게 '언제 첫 승을 따낼 것 같냐'고 묻자 "모레, 이번 주 토요일"이라고 답했다.

그러면서 "내년에는 우승이 목표다.

한국전력, 포스코이앤씨, 현대 글로비스를 이겨야 한다"며 "나도, 팀도, 한국 럭비도, 선수들도 모두 함께 성장하겠다"고 웃었다.

'60만번의 트라이' 오영길 감독 "럭비, 차별 속에서 찾은 답"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