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상처, 학폭] ①끝 모를 두려움…'더글로리'는 판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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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해자는 정상 복귀하는 데 피해자는 '수렁 속'
'사적 복수'는 드라마 속 비현실…피해자 회복 지원 필요 "왜 없는 것들은 세상에 권선징악, 인과응보만 있는 줄 알까"(드라마 '더 글로리' 중 대사)
정순신 변호사가 아들의 학교폭력(학폭) 이력을 지우기 위해 소송전을 벌였다는 소식을 접한 여론은 다른 지점에서 다시 한번 공분했다.
심각한 수준의 학폭을 가한 정 변호사의 아들은 서울대학교에 단번에 합격했으나 피해자는 제대로 학교도 다니지 못하고 극단적 선택을 시도할 만큼 학폭의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는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연예, 스포츠계에서 종종 불거지는 학폭 사건도 비슷하다.
학폭 가해자는 자신의 분야에서 이탈하지 않고 유명인이 돼 부를 쌓고 심지어 선망의 대상이 되는 동안 이를 지켜봐야 하는 피해자는 또다시 좌절하게 된다.
가해자는 제도에 따라 1호(서면사과)부터 9호(퇴학)까지 '조치'를 받은 뒤 정상생활로 복귀하곤 하지만 피해자는 성인이 돼서도 극복하지 못하는 경우가 태반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가해자에 대한 '징악'만큼이나 피해자에 대한 회복 조치가 더 촘촘해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 "네가 너무 예민한 거야"…끝없이 도망치는 피해자들
박모(27)씨는 학교폭력을 당한 지 14년이 지났지만 아직 이유를 찾지 못했다.
그는 중학교 1학년 때 쉬는 시간마다 화장실에 끌려가 '샌드백'이 돼야만 했다.
가해자는 '스파링 상대'라고 했지만 사실상 일방적인 폭행이었다.
신고나 증거 수집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박씨는 "그땐 수업이 끝나고 쉬는 시간이 돌아오는 게 괴로웠을 정도였다"며 "왜 괴롭혔는지는 지금도 모르겠다"고 말했다.
피해를 알리려다가 '2차 피해'를 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은 물리적 폭력 못지않다.
윤은새(21)씨는 중학교 시절 폭력·무시·따돌림에 시달린다고 교사에게 알렸다.
하지만 "네가 너무 예민하다.
애들이 장난으로 하는 건데 참고 넘어가라"는 차가운 대답이 돌아왔다.
참다못한 윤씨가 경찰에 신고하자 교사는 "왜 경찰에 연락했느냐"고 타박했다.
그러고는 가해자를 불러낸 뒤 '억지 사과'로 무마하려 했다.
윤씨에게는 학교폭력만큼 아프고 잊을 수 없는 기억이다.
윤씨는 동급생의 폭력과 교사의 방치 속에 학창 시절을 보냈다.
등하교길에 가해자 무리를 마주칠까 봐 외출이 어려울 정도였다.
윤씨는 이제 그때의 상처를 어느정도 극복했지만 한동안 그 길을 지날 때마다 열 명에 가까운 무리가 자신을 에워싸는 악몽에 시달렸다.
김소열 학교폭력피해자가족협의회 사무국장은 "'더글로리'에 나온 복수는 사실 극적인 것 아니냐. 피해자 대부분은 꿈도 꾸지 못한 채 나약해진다"며 "어린 마음에 생긴 상처가 대인기피증으로 악화하는 경우가 많지, 실제 복수하는 사례는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고 말했다.
이모(18)씨는 험담과 비난, 단체 대화방에서 모욕에 시달리다가 도망치듯 학원을 그만뒀다.
사물함에 넣어둔 붓이 모두 부러진 채 싱크대 구석에서 발견됐을 때였다.
일부러 집에서 먼 학교로 진학하거나, 아예 다른 지역으로 이사하는 경우도 있다.
익명을 원한 20대 피해자는 "지금도 가해자가 많으면 피해자가 전학을 가는 경우가 많다더라"며 "왜 피해자가 쫓겨나야 하느냐"고 분통을 터뜨렸다.
◇ 극단선택과 '사적 복수'의 막다른 길
학술지 청소년학연구 최근호에 실린 박애리 순천대 교수와 김유나 유한대 교수 연구팀의 논문에 따르면 학폭을 경험한 적이 있는 대학생의 54.4%는 '자살을 생각해 본 적이 있다'고 답했다.
고(故) 박주원 양은 2015년 고등학교 재학 중 집단 따돌림을 당한 끝에 극단적 선택을 했다.
2021년 강원 양구군의 한 고등학교에서도 또래의 험담에 시달리던 학생이 스스로 세상을 등졌다.
2011년 대구에서 중학생 권모 군이 학폭에 시달리다 투신한 일도 있었다.
당시 권군이 엘리베이터 안에서 쭈그리고 앉아 우는 모습이 CCTV 영상으로 공개되면서 전국민이 공분했으나 잠시뿐이었다.
최근 방송에서 학폭 피해 사실을 공개한 표예림(27)씨는 지난달 22일 극단적 선택을 시도했다가 구조됐다.
표씨는 방송에서 피해 사실을 알린 후 각종 비판과 조롱은 물론, 가해자로부터 '신상이 공개된 영상을 삭제하고 사과글을 게재하라'는 내용증명을 받은 뒤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린 것으로 전해졌다.
정순신 변호사의 아들에게 학폭을 당한 피해자 불안·우울로 정신과 치료를 받다가 극단적 선택을 시도했다.
그는 학교에 복귀해서도 제대로 수업을 듣지 못한 채 후유증에 시달렸다.
반면 정 변호사의 아들은 강제로 전학간 학교에서도 "장난처럼 하던 말을 학폭으로 몰았다"며 반성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궁지에 내몰린 피해자가 드물게 '사적 복수'를 선택하기도 한다.
2016년 9월 강원 원주시에서 중학생이 학폭에 시달리다 가해자인 동급생을 흉기로 찌르는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이 학생이 학교폭력 피해를 신고했으나 학교 측이 무시하면서 벌어진 참사라는 비판이 일었다.
이 학생은 살인미수 혐의가 유죄로 인정돼 이듬해 소년부로 송치됐다.
학교폭력 피해 때문에 살인미수 가해자가 된 비극이었다.
학폭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그린 더글로리의 결말과는 다르게 압도적인 사적 복수는 극히 비현실적인 셈이다.
/연합뉴스
'사적 복수'는 드라마 속 비현실…피해자 회복 지원 필요 "왜 없는 것들은 세상에 권선징악, 인과응보만 있는 줄 알까"(드라마 '더 글로리' 중 대사)
정순신 변호사가 아들의 학교폭력(학폭) 이력을 지우기 위해 소송전을 벌였다는 소식을 접한 여론은 다른 지점에서 다시 한번 공분했다.
심각한 수준의 학폭을 가한 정 변호사의 아들은 서울대학교에 단번에 합격했으나 피해자는 제대로 학교도 다니지 못하고 극단적 선택을 시도할 만큼 학폭의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는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연예, 스포츠계에서 종종 불거지는 학폭 사건도 비슷하다.
학폭 가해자는 자신의 분야에서 이탈하지 않고 유명인이 돼 부를 쌓고 심지어 선망의 대상이 되는 동안 이를 지켜봐야 하는 피해자는 또다시 좌절하게 된다.
가해자는 제도에 따라 1호(서면사과)부터 9호(퇴학)까지 '조치'를 받은 뒤 정상생활로 복귀하곤 하지만 피해자는 성인이 돼서도 극복하지 못하는 경우가 태반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가해자에 대한 '징악'만큼이나 피해자에 대한 회복 조치가 더 촘촘해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 "네가 너무 예민한 거야"…끝없이 도망치는 피해자들
박모(27)씨는 학교폭력을 당한 지 14년이 지났지만 아직 이유를 찾지 못했다.
그는 중학교 1학년 때 쉬는 시간마다 화장실에 끌려가 '샌드백'이 돼야만 했다.
가해자는 '스파링 상대'라고 했지만 사실상 일방적인 폭행이었다.
신고나 증거 수집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박씨는 "그땐 수업이 끝나고 쉬는 시간이 돌아오는 게 괴로웠을 정도였다"며 "왜 괴롭혔는지는 지금도 모르겠다"고 말했다.
피해를 알리려다가 '2차 피해'를 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은 물리적 폭력 못지않다.
윤은새(21)씨는 중학교 시절 폭력·무시·따돌림에 시달린다고 교사에게 알렸다.
하지만 "네가 너무 예민하다.
애들이 장난으로 하는 건데 참고 넘어가라"는 차가운 대답이 돌아왔다.
참다못한 윤씨가 경찰에 신고하자 교사는 "왜 경찰에 연락했느냐"고 타박했다.
그러고는 가해자를 불러낸 뒤 '억지 사과'로 무마하려 했다.
윤씨에게는 학교폭력만큼 아프고 잊을 수 없는 기억이다.
윤씨는 동급생의 폭력과 교사의 방치 속에 학창 시절을 보냈다.
등하교길에 가해자 무리를 마주칠까 봐 외출이 어려울 정도였다.
윤씨는 이제 그때의 상처를 어느정도 극복했지만 한동안 그 길을 지날 때마다 열 명에 가까운 무리가 자신을 에워싸는 악몽에 시달렸다.
김소열 학교폭력피해자가족협의회 사무국장은 "'더글로리'에 나온 복수는 사실 극적인 것 아니냐. 피해자 대부분은 꿈도 꾸지 못한 채 나약해진다"며 "어린 마음에 생긴 상처가 대인기피증으로 악화하는 경우가 많지, 실제 복수하는 사례는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고 말했다.
이모(18)씨는 험담과 비난, 단체 대화방에서 모욕에 시달리다가 도망치듯 학원을 그만뒀다.
사물함에 넣어둔 붓이 모두 부러진 채 싱크대 구석에서 발견됐을 때였다.
일부러 집에서 먼 학교로 진학하거나, 아예 다른 지역으로 이사하는 경우도 있다.
익명을 원한 20대 피해자는 "지금도 가해자가 많으면 피해자가 전학을 가는 경우가 많다더라"며 "왜 피해자가 쫓겨나야 하느냐"고 분통을 터뜨렸다.
◇ 극단선택과 '사적 복수'의 막다른 길
학술지 청소년학연구 최근호에 실린 박애리 순천대 교수와 김유나 유한대 교수 연구팀의 논문에 따르면 학폭을 경험한 적이 있는 대학생의 54.4%는 '자살을 생각해 본 적이 있다'고 답했다.
고(故) 박주원 양은 2015년 고등학교 재학 중 집단 따돌림을 당한 끝에 극단적 선택을 했다.
2021년 강원 양구군의 한 고등학교에서도 또래의 험담에 시달리던 학생이 스스로 세상을 등졌다.
2011년 대구에서 중학생 권모 군이 학폭에 시달리다 투신한 일도 있었다.
당시 권군이 엘리베이터 안에서 쭈그리고 앉아 우는 모습이 CCTV 영상으로 공개되면서 전국민이 공분했으나 잠시뿐이었다.
최근 방송에서 학폭 피해 사실을 공개한 표예림(27)씨는 지난달 22일 극단적 선택을 시도했다가 구조됐다.
표씨는 방송에서 피해 사실을 알린 후 각종 비판과 조롱은 물론, 가해자로부터 '신상이 공개된 영상을 삭제하고 사과글을 게재하라'는 내용증명을 받은 뒤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린 것으로 전해졌다.
정순신 변호사의 아들에게 학폭을 당한 피해자 불안·우울로 정신과 치료를 받다가 극단적 선택을 시도했다.
그는 학교에 복귀해서도 제대로 수업을 듣지 못한 채 후유증에 시달렸다.
반면 정 변호사의 아들은 강제로 전학간 학교에서도 "장난처럼 하던 말을 학폭으로 몰았다"며 반성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궁지에 내몰린 피해자가 드물게 '사적 복수'를 선택하기도 한다.
2016년 9월 강원 원주시에서 중학생이 학폭에 시달리다 가해자인 동급생을 흉기로 찌르는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이 학생이 학교폭력 피해를 신고했으나 학교 측이 무시하면서 벌어진 참사라는 비판이 일었다.
이 학생은 살인미수 혐의가 유죄로 인정돼 이듬해 소년부로 송치됐다.
학교폭력 피해 때문에 살인미수 가해자가 된 비극이었다.
학폭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그린 더글로리의 결말과는 다르게 압도적인 사적 복수는 극히 비현실적인 셈이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