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자리를 지켰다 열두 번째 나무 아래 오래 서서 복숭아 열매를 바라보았다.” 애틋한 서정을 보여주는 이은규 시인의 세 번째 시집이다. 터키 아이스크림부터 복숭아까지 다정한 사물들로 가득한 시 세계를 선보인다. 그는 누구를 기다리며 자리를 지켰을까. (아침달, 124쪽, 1만2000원)
인간은 오랫동안 수치심이라는 사회적 구속 아래 살아왔다. 성경에서는 최초의 인간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善惡果)를 먹은 이후 부끄러움을 느끼기 시작했다고 적혀 있다. 수치심은 윤리의 다른 이름으로 공동체를 유지하는 핵심으로 작용해 왔다. 모욕죄 등을 통해 성문법 체계 안에도 들어 있는 감정이다. ‘부끄럽다’는 표현으로 사과를 대신하는 정치인도 있다.수치스러운 행동의 기준은 시대마다 달랐다. 음주운전을 부끄러운 짓으로 여긴 것은 오래되지 않았다. 지금 내가 느끼는 수치심은 어디에서 연유한 걸까. 정당한 감정인가. 최근 국내 출간된 <셰임 머신>은 수치심을 비즈니스 차원에서 바라본다. 다이어트 산업은 비만을 부끄러운 일로 만들고, 명문대 학위 브로커들은 ‘지잡대(지방의 유명하지 않은 대학)’라는 모멸적 표현으로 지방 대학 졸업장을 부끄럽게 만든다. 책은 수치심을 부추겨 돈을 버는 산업 생태계, 이른바 ‘수치심 머신(the shame machine)’에 직격탄을 날린다.<셰임 머신>의 저자는 수학자 캐시 오닐이다. 미국 캘리포니아의 UC버클리를 졸업했고 하버드대에서 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사립 여자대학 버나드칼리지의 수학과 종신교수로 지내다가 금융권에 투신했다. 월스트리트에서 헤지펀드 퀀트(계량분석 트레이더)로 일했다. 정보기술(IT) 회사에서 데이터과학자로 금융상품의 위험도와 소비자 구매 패턴 등을 예측하는 수학 모형을 개발하기도 했다. <대량살상 수학무기>라는 빅데이터와 알고리즘의 편향성을 지적하는 책도 펴냈다.오닐에 따르면 ‘수치심 비즈니스’는 끊임없이 선택이라는 말을 떠벌린다. “수치심 산업의 변함없는 한 가지는 선택이라는 개념이다. 셰임 머신은 모든 실패가 피해자들로부터 초래됐다고 단정한다. 부유해지고, 날씬해지고, 똑똑해지고, 약물에서 자유로워지고, 성공하는 길을 선택할 수도 있었는데 하지 않았다고 본다.”저자가 수치심에 주목하게 된 것은 몇 년 전 한 교사를 만나면서다. 이 교사는 학부모와 학생들에게 매우 높은 평가를 받았는데도 해고될 위기에 처했다. 표준화된 교원평가에서 낙제점을 받았기 때문이다. 교육청에 채점 기준을 알려달라고 요구했더니 이런 답이 돌아왔다. “수학적 문제로 당신은 봐도 이해하지 못한다.”교사는 수치스러운 경험이었다고 했지만 평생 수학을 다뤄온 오닐은 공감하지 못했다. 그러다 문득 자신의 비만이 떠오르며 수치심이 밀려왔다. “나는 그 교사의 수학적 수치심을 한 발 떨어져 지켜보다가 나의 비만 수치심을 알아챘다.”수치심을 부추기는 현상은 혐오와 맞닿아 있다는 점에서 심각하다. 사람들의 어떤 상태나 행동을 부끄러운 일로 규정하면 공격하기 쉽기 때문이다. 미국의 저명한 철학자 마사 누스바움은 <혐오와 수치심>에서 “이 두 감정은 공통적으로 인간이 인간임을 숨기고 부정하려는 인지적 판단과 욕구를 수반하기 때문에 사회 내에서 취약한 위치에 있는 집단을 배척하는 데 사용될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했다.<셰임 머신>은 수치심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전달하지만 과학적 논증보다는 개인적 경험에 기대고 있다. 통계의 함정을 보여주는 여러 사례도 언급하는데 치밀한 데이터 분석은 찾아보기 힘들다. 수학자 오닐에 대한 기대가 너무 컸을 수도 있다. 수치와 혐오라는 감정을 다루다 보니 불가피한 서술 방식이겠으나 문제는 이런 주제의 책이 이미 많다는 것이다.국내 출간된 책만 해도 <혐오와 수치심> <여성의 수치심> <일그러진 몸> <수치심 권하는 사회> 등이 있다. 신간임에도 이들 책보다 논리적 전개가 탄탄하다거나 문제의식이 참신하다는 인상을 주지 못한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의 당부는 무시하기 힘들다. “본질적으로 수치심을 없애는 것은 그리 복잡하지 않다. 이는 당장 오늘부터 복지사무소, 기업 이사회실에 이르기까지 제도적 영역이든 개인적 영역이든 모든 곳에서 모든 사람을 신뢰하고 존엄하게 대우하자고 요구하는 일이다.”구은서 기자 koo@hankyung.com
‘삼인행 필유아사(三人行 必有我師).’세 사람이 길을 떠나면 그 가운데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다는 <논어> 술이편의 말이다. 주변의 장점은 배우고, 단점은 타산지석으로 삼으라는 가르침은 자연에서도 유효하다. 지구에는 38억년 전 생명체가 처음 등장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수천만 종의 생물이 살아왔다. 이들이 자연에 적응한 방식은 인류의 훌륭한 참고서다.최근 출간된 <자연은 언제나 인간을 앞선다>는 인간이 만물의 영장으로 군림하기까지 자연에서 깨달은 지식을 정리한 책이다. 생물학자이자 영국 방송사 BBC의 다큐멘터리 제작자로 활동 중인 저자 패트릭 아리가 ‘생태 모방’이라고 부르는 사례들이다.그는 열대우림을 탐사하며 사람들이 모기떼에 시달린 경험을 회상한다. 놀랍게도 인간은 피를 빨아먹는 ‘해충’으로부터도 배울 점을 찾았다. 저자는 모기의 주둥이 형태에 주목한다. 모기 침의 옆면은 매끈하지 않고 울퉁불퉁하다. 울퉁불퉁한 돌기의 끝부분만 살에 닿기 때문에 피부와의 마찰 면적이 최소화된다. 모기는 삽관할 때 머리를 미세하게 떤다. 동물들이 피부에 모기의 바늘이 들어오는 것을 모르게 하기 위해서다.과학자들은 모기의 흡혈 장치를 모방해 ‘아프지 않은 주사’를 개발하고 있다. 주삿바늘에 미세한 돌기를 만들고 작은 모터로 진동을 일으키는 방법을 동원해서다. 그 결과 기존 제품보다 고통이 훨씬 적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주사를 맞는 것을 유난히 힘들어하는 사람에게 희소식이다.모기뿐만이 아니다. 책은 30종의 동물로부터 인간이 혁신을 달성한 일을 소개한다. 인류에게 친숙한 개미와 고양이부터 비교적 생소한 아라파이마, 천산갑까지 다양하다. 친환경 하수처리 체계에 아이디어를 제공한 소의 소화기관 구조, 미세플라스틱 오염 해결 방안으로 떠오른 대왕쥐가오리의 아가미 형태, 바닷가재의 눈에서 착안한 엑스선 우주망원경 등. 무심코 지나친 자연의 지혜에 새삼 고개를 숙이게 된다.인간은 자연의 일부로 누군가의 스승이 되기도 한다. 인공지능(AI) 얘기다. AI는 인간이 수천 년간 쌓아온 지식을 학습하고, 인간의 행태를 따라 하며 인류를 생태 모방하고 있다. 저자는 책을 이렇게 마무리한다. “언젠가는 자의식이 있는 AI가 이 책과 비슷한 책을 집필할 것이다. 그때 AI는 AI를 더욱 영리하게 만든 인간에 관한 이야기를 서술하게 되리라.” 언젠가 인간이 이 책의 ‘31번째 에피소드’로 소개될지도 모르는 일이다.안시욱 기자 siook95@hankyung.com
시대를 대표하는 감정을 정의할 수 있을까. 최근 출간된 <감정의 역사>는 나치즘을 연구해 온 김학이 동아대 사학과 교수가 시대별 ‘감정 레짐’에 주목해 지은 책이다.책은 방대한 역사적 자료를 바탕으로 시대를 상징하는 감정을 탐색한다. 16세기 독일을 휩쓴 종교적 ‘공포’를 설명하기 위해 루터의 <소교리문답> 속 텍스트를 풀이하는 식이다.당시 독일은 ‘신성한 공포’가 지배했다. 종교가 개인의 일상에 깊숙이 관여한 시대였기 때문이다. 공포는 신의 전유물이었다. ‘하나님만을 두려워해야 한다’는 명목으로 신에 대한 경외심 이외의 사사로운 공포는 엄격히 통제됐다. 심지어 지옥을 두려워해서도 안 됐다. ‘지옥을 두려워하는 자는 지옥에 간다’는 루터의 선언이 이를 보여준다.17세기의 ‘무감동’과 ‘분노’에 대해선 <스웨덴 백작부인 G의 삶> 등 세 편의 소설을 동원한다. 엔지니어링 기업 지멘스 창업주의 회고록을 통해 노동이 ‘기쁨’으로 전환하던 산업혁명 시기의 모습을 설명한다. 나치 치하 독일인들의 ‘차분한 열광’은 슈푀를의 코믹소설 <가스검침관>으로 분석한다.이런 여정을 통해 시대에 따라 중요하게 여겨진 감정이 바뀌었고, 부정적인 감정에 대응하는 방식에도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찾아낸다. 저자는 “감정이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양상을 확인하면 각 시대의 고유성을 도출할 수 있다”고 말했다.사학자로서 김 교수는 16세기부터 20세기에 이르는 독일의 감정사를 파고들었다. 고도로 절제된 일상을 보낸 칸트부터 프로테스탄티즘의 금욕주의를 강조한 베버까지. 독일의 사상가들은 독일이 ‘감정의 불모지’라고 느껴질 정도로 딱딱한 인상을 준다. 이런 독일의 근현대사도 감정의 차원에서 살펴볼 수 있다고 한다.21세기 한국 사회는 훗날 어떤 감정 레짐으로 기억될까. 저자는 대표적인 감정 중 하나로 ‘혐오’를 꼽는다. ‘분노 사회’ 혹은 ‘혐오 사회’란 단어가 빈번하게 눈에 띄는 것을 보면 저자의 분석에 타당한 부분이 있다.안시욱 기자 siook95@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