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쪄서 부끄럽다고?'…당신의 그런 수치심은 돈이 된다 [책마을]
오랫동안 인간에게 수치심이란 윤리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성경 속 최초의 인간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善惡果)를 먹고 비로소 알몸을 부끄럽다고 느꼈듯이. 불륜, 청결….

수치심은 개인이 사회의 금기나 규범을 어기지 않도록 유도한다. 모욕죄 등 법 체계 안에도 들어와 있는 감정이다. 정치인들은 종종 “부끄럽다”는 표현으로 사과를 대신한다.

그런데 수치스러운 행동의 기준은 시대에 따라 다르다. 음주운전이 부끄러운 짓이 된 건 오래되지 않았다. 내가 느끼는 수치심은 어디서, 어떻게 온 걸까? 정당한 감정인가?

최근 국내 출간된 책 <셰임 머신>은 “수치심은 우리 사회의 거대한 구조적 문제”라고 주장한다. 비만을 부끄러운 일로 여기게 만드는 다이어트 산업, 학벌주의를 등에 업은 가짜 명문대 학위 취득 브로커 등을 예시로 든다.

오늘날 수치심 이면에는 거대한 산업 생태계가 형성돼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의 수치심을 부추겨 돈을 버는 구조, 이른바 ‘수치심 머신(the shame machine)’을 비판한다.

물론, 인간의 감정을 활용해 돈을 버는 산업은 한둘이 아니다. 배달의 민족, 카카오택시 등은 ‘귀찮음’이라는 인간의 감정에서 사업 기회를 찾았다. 책이 수치심을 문제 삼는 건 이런 수치심 머신이 빈곤 같은 사회적 문제를 온전히 개인의 탓으로 돌리기 때문이다.

“수치심 산업에서 변함없는 한 가지는 선택이라는 개념이다. 약물 중독부터 빈곤 문제까지, 이들은 기본적으로 피해자가 실패를 초래했다고 전제한다. 즉 부유해지고 날씬해지고 똑똑해지고 성공하는 길을 선택할 수도 있었는데 하지 않았다고 본다.”

또 수치심은 ‘혐오’와도 맞닿아 있다. 수치심은 자기를 혐오하는 데서 시작한다. 누군가의 상태나 행동을 부끄러운 일로 규정하면 그 대상을 혐오하고 공격하기 쉽다. 미국의 저명한 철학자 마사 누스바움은 <혐오와 수치심>에서 “이 두 감정은 공통적으로 인간이 인간임을 숨기고 부정하려는 인지적 판단과 욕구를 수반하기 때문에 사회 내에서 취약한 위치를 지닌 집단을 배척하는 데 사용될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했다.
'살쪄서 부끄럽다고?'…당신의 그런 수치심은 돈이 된다 [책마을]
<셰임 머신>의 저자는 캐시 오닐. 수학자다. UC버클리를 졸업하고 하버드대에서 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버나드 칼리지 수학과 종신교수로 강의하다가 월가 헤지펀드 퀀트(계량분석 트레이더)로 옮겼다. 이후 IT업계에서 데이터과학자로서 금융상품의 위험도와 소비자 구매 패턴 등을 예측하는 수학 모형을 개발했다. 전작 <대량살상 수학무기>는 빅데이터와 알고리즘의 편향성을 지적하는 책이다.

그가 수치심에 주목하게 된 건 몇년 전 어느 교사와의 만남 때문이었다. 그 교사는 학부모와 동료 교사, 학생들에게 매우 높은 평가를 받았는데도 표준화된 교원평가에서 낙제점을 받아 해고될 위기에 처했다. 교육청에 채점 기준을 알려달라고 요구하자 이런 답이 돌아왔다. “수학적 문제라서 당신은 봐도 이해하지 못한다.”

평생 수학을 다뤄온 오닐은 수학으로 모욕 당한 이 사건에 크게 공감하지 못했다. 하지만 곧 그도 비만이라는 주제에 대해서는 피해자라는 걸 깨닫는다. “나는 그 교사의 수학적 수치심을 한 발 떨어져 지켜보다가 나의 비만 수치심을 알아챘다.”

다만 책은 과학적 논증보다는 개인적 경험에 기댄다. 통계의 함정을 보여주는 여러 사례를 언급하긴 하지만, 오닐에게 기대할 법한 치밀한 데이터 분석은 찾아보기 힘들다. 수치와 혐오라는 감정을 다루다 보니 불가피한 서술 방식이겠으나, 문제는 이런 주제의 책이 이미 많다는 것이다.

국내 출간된 책만 해도 <혐오와 수치심> <여성의 수치심> <일그러진 몸> <수치심 권하는 사회> 등이 있다. 신간임에도 이들 책보다 논리적 전개가 탄탄하다거나 문제의식이 참신하다는 인상을 받진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의 당부는 무시하기 힘들다. “본질적으로 수치심을 없애는 것은 그리 복잡하지 않다. 이는 저녁 식사 자리부터 복지사무소, 기업 이사회실에 이르기까지 제도적 영역이든 개인적 영역이든 모든 곳에서 모든 사람을 신뢰하고 존엄하게 대우하자고 요구하는 일이다.”

구은서 기자 k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