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내셔널 부문 1차 후보 올라…"비천한 욕망 속 숭고함 그려"
시나리오 작가→소설가→영화감독…"또 다른 내 소설 영화로 만들 생각"
'부커상 후보' 천명관 "작가로 소환해준 '고래'가 내 삶 이끌어"
"'고래'가 제 삶을 이끌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멀리 달아나고, 무력해질 때 다시 작가로 소환해주니까요.

이 작품이 없었다면 존재를 증명할 기회가 없었겠죠."
천명관(59) 작가는 출간 19년 된 장편소설 '고래'가 이달 세계적인 문학상인 영국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1차 후보(롱리스트)에 지목된 데 대해 이같이 말했다.

최근 경기도 고양시의 한 카페에서 만난 그는 "'고래' 이후 이만한 창작물에 도달한 적이 없으니 '원 히트 원더'(히트곡이 하나인 아티스트)지만 그 하나를 내기도 어려우니 고마운 작품"이라고 했다.

2004년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인 '고래'는 부커상 후보로 호명되며 국내 문단에 다시 환기됐다.

2016년 한강의 '채식주의자'가 수상하고, 지난해 정보라 작가가 최종후보에 오른 문학상이다.

천 작가는 "5~6년 전 영국에 갔다가 알게 된 한 에이전시와 해외 판권 계약을 해 이 작품이 영어판으로 번역되는 건 알고 있었다"며 "토속적이고 예스러운 표현이 많아 후보에 오른 것은 번역가(김지영)의 공이 아닐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부커상 후보' 천명관 "작가로 소환해준 '고래'가 내 삶 이끌어"
출간 당시 베스트셀러에 올랐던 '고래'는 설화적 시공간을 배경으로 세 여성(금복, 춘희, 노파)의 거친 삶을 통해 인간의 파괴적인 욕망을 스케일 있게 그린 소설이다.

산골 소녀 금복이 여러 남자를 거치며 벽돌공장과 고래극장을 거느린 소도시 기업가로 성공하지만 결국 파멸에 이르는 일대기가 중심이다.

금복은 딸의 눈을 찔러 장애인으로 만들면서까지 돈에 집착한 국밥집 노파의 유산을 손에 넣으며 저주까지 물려받고, 금복의 딸인 자폐아 춘희는 고래극장에 불을 지른 방화범으로 몰려 수감 생활을 한 뒤 벽돌을 굽는 고독한 삶을 산다.

금복과 노파에게서 모성이라곤 찾아볼 수 없다.

"놀라움과 사악한 유머로 가득 찬 소설"이란 부커상 심사위원단의 평처럼 결핍 혹은 장애를 가진 등장인물들의 삶에는 살인, 방화, 폭력, 성폭행 등 범죄가 거리낌 없이 투척된다.

성공에 정점을 찍은 금복이 갑자기 남성으로 변해 창부와 사랑에 빠지고, 노파의 원혼이 등장하는 대목에선 판타지적인 뉘앙스도 풍긴다.

천 작가는 "이들을 통해 재물, 성공을 통한 권력, 성 등 인간의 욕망을 그렸다"며 "비천한 욕망으로 얼룩진 서사 안에도 하늘을 바라보며 우주 너머의 무언가를 꿈꾸는 일말의 숭고함이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금복이 어촌마을에서 본 고래, 춘희가 굽는 벽돌과 마지막에 죽어가며 환영처럼 보는 코끼리가 이를 상징하지 않을까"라고 설명했다.

'부커상 후보' 천명관 "작가로 소환해준 '고래'가 내 삶 이끌어"
이 작품에선 시나리오 작가 출신인 천 작가의 이력도 감지된다.

기존 소설 작법과 달리 '그것이 ~의 법칙이었다'며 불쑥 해설이 등장하고, 등장인물을 묘사하는 시각적인 이미지도 강렬하다.

영화를 향한 작가의 갈망을 반영하듯 금복의 세속적 성공의 결정체도 고래극장이다.

천 작가는 "'고래'는 영화로 만들고 싶었던 이야기"라며 "처음 작품을 쓸 때 이야기의 아이디어 대신, 여자 벽돌공이란 강렬한 이미지가 있었다"고 떠올렸다.

천 작가는 영화 '총잡이'(1995), '북경반점'(1999), '이웃집 남자'(2009) 등의 각본을 쓰며 영화인으로 살다가 단편 소설 '프랭크와 나'가 2003년 문학동네 신인상에 당선되며 문단에 발을 들였다.

천 작가는 "시나리오를 쓰면서 감독으로 데뷔하지 못했고 먹고살기 어려워 포기한 상태였다"며 "그때 문학도였던 동생의 권유로 소설을 쓰게 됐다.

석 달 정도 쓰면서 중편 하나와 단편 몇 개를 썼고, 그중 한편이 신인상에 당선됐다"고 돌아봤다.

'고래' 이후 '유쾌한 하녀 마리사'(2007), '고령화 가족'(2010), '나의 삼촌 브루스 리'(2012), '이것이 남자의 세상이다'(2016) 등을 집필하며 작가의 행보를 보여준 그는 지난해 영화 '뜨거운 피'로 감독 데뷔를 했다.

그는 "소설은 혼자 써서 편하지만 외로운 데 반해, 영화는 많은 사람 속에 외로움이 있었다"며 "정체성이 모호해 혼란스럽기도 했는데 영화에 대한 꿈을 접은 것도 아니었다.

지금은 '이것이 남자의 세상이다'를 영화로 만들려고 각색 중"이라고 했다.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은 4월 18일(현지시간) 최종후보 6편이 발표되고, 5월 23일 수상작이 가려진다.

천 작가는 "후보에 올랐다고 (영국에서) 번역 출간된 책 중 가장 훌륭한 작품이라고 여기지 않는다"며 "상을 받는 건 행운의 문제라고 생각한다"고 담담하게 말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