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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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1918년부터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는 1939년까지를 전간기라고 부릅니다. 전쟁과 전쟁 사이의 기간이라는 의미입니다. 제1차대전 후 맺어진 베르사유 조약에 대해 프랑스의 페르디낭 포슈 원수가 '항구적 평화가 아닌 길어봐야 20년 정도의 휴전'이라고 표현한 것처럼 전간기의 유럽 정치와 외교는 매우 불안했습니다.

이 기간 유럽과 미국은 엄청난 변화를 겪습니다. 세계 경제의 중심이 된 미국은 유례없는 경제적 황금기를 누리게 됩니다. 유럽은 1차대전의 피해를 복구하지 못하고 허덕였습니다. 이후 미국이 대공황에 빠지자 그렇지 않아도 힘들던 유럽의 경제는 더 악화했습니다.

전간기 영란은행, 정치적 판단에서 금본위제 복귀 결정

영란은행(영국 중앙은행)은 제 1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접어든 1919년 4월에 이르러서야 파운드화 가치를 방어하는 데 한계를 느끼고 금본위제에서 이탈합니다. 타 국가에 비해선 다소 늦은 행보였습니다. 다만 영란은행은 다른 중앙은행과는 달리 전쟁이 끝나면 다시 금본위제로 복귀할 계획이었습니다.

전쟁이 끝나자 영란은행은 계획대로 1925년 4월 28일 당시 재무장관이던 윈스턴 처칠의 주도하에 금본위법을 발표하고 금본위제로 복귀합니다. 문제는 이러한 결정이 경제적인 관점에서가 아닌 정치적인 관점에서 이뤄졌다는 것이었습니다. 영국 내부에서는 다시 파운드의 가치를 금에 묶어서 기축통화의 지위를 회복하자는 주장이 힘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이미 많은 금이 미국으로 옮겨갔기 때문에 파운드의 가치를 금에 고정하면 파운드는 오히려 금이 아니라 달러에 종속될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케인스의 지적에 처칠은 "이는 경제적인 문제가 아닌 정치적인 결정"이라며 "이 결정은 우리가 1918년에 계획한 것을 완수할 역량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라며 금본위제로 복위해버립니다. 그리고 그 결정은 최악의 경제적 결과를 초래합니다.

1차대전 이전의 금본위제는 1파운드당 4.86달러로 교환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문제는 금본위제 복귀를 결정한 당시 달러와 파운드의 교환비가 3.81달러였다는 점입니다. 전쟁 이전으로 돌아가려면 파운드의 가치를 억지로 높여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미국의 중앙은행은 1924년 금리를 내리고, 영란은행은 금리를 높여 파운드당 4.86달러로 환율이 수렴하도록 조치합니다. 미국 중앙은행의 도움으로 영국은 파운드화를 억지로 고평가하지 않고서도 4.86의 교환비를 이뤄낼 수 있었습니다.

프랑스 금본위제 복귀하자영국 경제 악화, 파운드화 고평가 탓

문제는 다른 데서 터졌습니다. 프랑스도 금본위제로 복귀를 결정했습니다. 독일로부터 전쟁 배상금을 받아 전후 복구를 하겠다는 자신감이 반영된 것입니다. 하지만 독일이 배상금을 갚지 못할 상황에 빠졌고, 1924년 9월부터 1926년 9월까지 2년간 정부가 10차례나 바뀌고 재무장관도 10명이나 교체되는 등 프랑스 내 정치적 위기까지 부각됐습니다.

그러자 프랑(프랑스의 옛 통화)의 가치는 폭락합니다. 1차대전 이전, 파운드당 25프랑이었던 교환비가 1928년 파운드당 124프랑이 돼버립니다. 그러자 프랑스의 대(對)영국 수출이 늘어나게 됩니다. 프랑보다 높은 가치를 지닌 파운드를 받고 파는 것이 이득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과정에서 영국의 금이 프랑스로 이동했습니다. 1926년 말 약 550만파운드였던 프랑스의 외화보유액은 5개월 만에 1억6000만파운드로 증가했습니다.

1928년 프랑스가 금본위제 복귀를 위해 파운드를 금으로 바꾸기 시작했고 이미 금본위제로 복귀한 영국은 파운드를 금으로 바꿔줘야 할 의무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영란은행의 금보유량은 바닥을 드러냈습니다. 결국 프랑스는 당시 환율이던 파운드당 120프랑으로 금본위제를 선언했고 영국의 경상수지 적자는 심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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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자국의 금리를 낮춰 유럽 국가들이 금본위제로 복귀하도록 도왔습니다. 이 과정에서 미국이 보유했던 금의 상당 부분이 유럽으로 빠져나갔습니다. 금리가 낮아지자 주식시장은 과열됐고, 1920년대 말 미국의 주식시장은 활황을 맞았습니다. 1928년 초 190 정도에 머물던 다우존스 지수는 1928년 말 300까지 급등했습니다.

그러나 활황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1929년 10월 28일, 미국 주식시장은 23% 폭락하며 대공황이 시작됐습니다. 이미 경제 사정이 너무 나빴던 영국은 대공황으로 인해 심한 타격을 입었습니다. 결국 1931년 영란은행은 금태환을 중단합니다.

인류는 이 사건을 통해 금본위제에서 자국 통화가치가 고평가되면 수출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을 학습했습니다. 반대로 자국 통화가 평가절하되면(환율이 오르면) 수출이 잘돼 국제수지가 개선되는 것도 느꼈습니다. 하지만 금본위제 폐지 후 인류는 브레튼우즈 체제를 통해 다시 한번 금본위제를 시험하게 됩니다.

<한경닷컴 The Moneyist> 홍기훈 홍익대학교 경영대 교수, 메타버스금융랩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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